101화. 연쇄 살인마의 이름
“화순 연쇄살인범에 대해 뭘 알고 있다는 건지,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어?”
강철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표정이 그토록 진지한 것은 처음 보았다.
“아…… 그게 그니까. 남자고요.”
내 말에, 강철수가 순간적으로 코앞에 다가왔다.
“남자인거는 당연한 거고, 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놈의 얼굴을 보면 알 것 같은데,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며칠 동안 그걸 고민했는데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지역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나는 명작 드라마인 시그널에서 화순 연쇄살인마에 관하여 다룬 부분을 떠올렸다. 그래, 생각나지 않는 이름보다는 일단 이런 식으로 말해서 넘기자.
“그게 무슨 말이지? 구체적으로 말하라니까?” “그게 화순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그 지역으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 타깃을 정한 거라니까요? 그니까 수원에 사는 사람이 화순에 가서 사람을 죽인 거라고 하던데.”
“누가? 누가 그랬는데?”
강철수가 다그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 살인의 추억 속 형사의 말로가 생각났다. 그 영화는 아직 개봉하기 전이다.
“그냥 얼핏 들었습니다. 예전에 화순 연쇄살인범을 잡으려고 했다가 은퇴하신 분의 머리를 잘라준 적이 있어서요,”
강철수는 다행히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 그 사람이 못 잡은 거잖아. 그런 자의 말을 듣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 사건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무슨 말을 또 들은 건가? 말을 제대로 좀 해봐.”
강철수는 다급한 마음에 큰 소리를 냈다.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이름을 아는데 왜 검거를 못해?” “이름만 알면 무조건 검거할 수 있습니까?”
“그럼, 무대뽀로다가 뒤지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
“그렇군요. 제가 며칠 더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강철수가 내 머리에 주먹을 갖다 대며 말했다. 순간 나는 움찔했다.
“생각이 늦어질수록 주먹의 세기가 달라진다.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강철수의 주먹은 내 얼굴만큼 컸다. 저 주먹에 맞는다면 최소 뇌진탕이다. 빨리 생각해내야 하는데 큰일이다.
* * * *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강철수의 협박(?) 때문에 며칠 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이사장이 호출을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말이다. 그러자 화가 난 이사장이 내게 호통을 쳤다.
“죄송합니다. 뭔가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도 안날 것 같기도 해서요.”
“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네, 말씀하시죠.”
이사장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조만간 왕수정과의 계약이 끝나가기 때문에 예민해져 있었다.
“수정이 계약기간이 끝나가는 거 알고 있겠지?”
“네, 알죠.”
“재계약은 없다고 하더군.”
“네, 대신 송애교와 성예진이 있잖습니까?”
“그래, 송애교는 정말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지.”
송애교가 없었다면, 이사장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분은 대한민국을 사로잡는 대배우가 될 겁니다.”
“그래, 성예진도 조만간 드라마에 합류하게 될 것 같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갑갑하십니까?”
이사장은 한숨을 푹 쉬고는 대답했다.
“가수가 없잖아. 나는 가수를 원해.”
“아, 네…….”
자사 가수에게 홀대한 것이 누군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눌렀다.
“그래서 내가 업계 친구들을 만나봤는데, 나이트나 클럽에서 디제이를 하는 애들이 그렇게 괜찮다고 하더군.”
“그죠. 그 분야에서 웬만큼 실력이 있어야 거기에서 일할 수 있는 거니까요.”
디제잉을 하는 친구들을 데려다가 가수를 시키면 중간은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근데 여자 디제이는 많지 않잖아. 여자 디제이라면 실력이 엄청날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해서.”
“그죠, 여자에게 디제잉의 벽이 높아서 웬만한 실력으로는 못 올라가는 걸로 압니다.”
그 시절, 남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디제잉 시장에, 여자들이 올라가려면 탑급 남자 디제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내가 들었는데, 정말 괜찮은 디제이가 있다고 하더라고.”
“아, 그렇군요. 만나보시게요?” “어. 자네가 좀 가서 먼저 보고 왔으면 좋겠어.”
“네, 그러시죠. 오늘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좋아. 우리 준수는 미루는 법이 없어서 참 좋단 말이지.”
이사장은 성예진의 합류 이후로 내게 무한의 신뢰를 보여줬다. 얼굴과 연기력이 다 되는 그녀를 안겨주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성예진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최근, 탑스타들이 거쳐 간다는 이온음료 CF까지 하게 되었으니, 그녀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렇게 나는 강남 유명 나이트클럽에 가게 되었다.
* * * * *
“이야, 박 쌤 이런데도 오세요? 이런 데는 절대 안 올 줄 알았는데?”
강남 줄리어스 나이트클럽 입구, 노랑머리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사실 이런데 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회귀한 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자제하고 있었다. 어렵게 회귀를 하였다. 인생을 리셋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도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철칙을 늘 가슴에 새겨두었다. 그래서 오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오는 시간이 아까워서 오지 않은 것이야. 나도 춤을 추는 건 좋다고.”
“오호, 그럼 우리 신나게 놀고 가자구요.”
“난 놀러온 게 아니라고 했잖아.” “뭘? 일하러 모인 장소가 놀이동산이면 일하면서 노는 거지.”
노랑머리는 나를 끌고서 줄리어스 입구에 섰다. 다행스럽게도 입구에서 뺀지를 당하지 않았다. 예전 회귀 전에는 가끔씩 당했는데, 지금은 1초의 막음도 없었다. 웃긴 일이다.
“요오, 여기 여자애들이 죽인다고 하던데, 입구에 선 애들부터 다르네요.”
줄리어스에 입장을 하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기도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남자고 여자고, 차림이 이상하거나 너무 못생기면 입구에서 돌려보내곤 했다. 그 때문에 입구에 서있는 여자애들은 최대한 꾸민 상태이다. 나이트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가 미모를 평가받는 관문이기 때문에 돈을 들여서 꾸미고 줄을 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예쁠 테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설아씨보다 예쁜 여자는 한명도 없네.”
당연한 일이겠지만, 직접 보니 정말로 그렇다. 김설아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쁘다.
“참나, 그건 당연한 거고요. 미스코리아보다 더 예쁜 게 김설아 아닙니까?”
“조용히 하자.”
노랑머리가 큰소리로 말했고 나는 황급히 노랑머리의 입을 막았다. 괜히 남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다.
“아이고, 걱정 말아요. 누가 둘이 사귀는 걸 알겠어요? 상상이나 했을라고?”
“그렇지? 하하.”
우리는 여유롭게 웃으며 나이트클럽으로 입장했다.
나이트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 소리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나는 디제잉을 한다는 그 여자가 나오는 타이밍을 계산하며 자리를 잡았다.
몇 시간은 이 시끄러운 곳에서 참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귀찮았지만, 이사장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었다.
“형님들, 외제차 끌고 다니시면서 룸에 안가시고?”
나이트 웨이터가 술을 내오면서 말했다. 내 손에 쥔 외제차 키를 보고 한 말이다.
나이트에서는 남자 손님들을 주로 룸으로 모신다. 그래야 여자 손님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합석하기가 편해서다. 룸이 스테이지 앞보다 상대적으로 돈도 더 비싸니, 돈을 갖고 있는 남자들이 주로 룸으로 향한다.
“그냥 디제이 보러 왔으니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부킹도 필요 없습니다.”
내가 건조한 말투로 말하자, 노랑머리가 정색을 했다.
“여기까지 와서 부킹을 안 한다고?”
“부팅하러 온 게 아니잖아.”
“아니, 그 재미로 온 건데 나는?”
“너나 하던지 그럼.”
“에이 씨, 김빠지게.”
그러자 웨이터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부킹을 안 하는 것이 반갑지 않은 듯 했다.
“부킹 해요 말아요?”
“해요, 해! 이 분은 돈도 아주 많은 분이고 연예계 매니저도 하니까, 좀 많이 예쁜 분으로?”
“야?”
내가 화를 내자, 노랑머리가 주머니에서 만 원 권을 여러 개 꺼내서 웨이터에게 건넸다.
“연예인급 아니면 안 됩니다?”
“오케이, 걱정 마십쇼! 돼지 엄마가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웨이터가 가고, 시끄러운 음악이 끝났다. 부르스 타임이 되자, 돼지 엄마가 정말 예쁜 분을 모셔왔다.
“자, 연예인급 여기 모셔왔습니다.”
나는 돼지 엄마가 데리고 온 여자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정말 예쁘게 성형을 한 얼굴이었다.
“오, 진짜 예쁜 분이네?”
노랑머리가 정말 예쁘다며 칭찬하는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양해리였다.
해리도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웃었다. 기쁜 미소가 아닌 비웃음이었다.
“이런 양아치를 상대하라고 나를 불렀어? 웨이터! 이 사람은 매니저가 아니고 미용사라고!”
“야, 너 뭔데 난리야? 이쁘면 다야?”
“뭔 소리야? 매니저라던데?”
돼지 엄마는 해리와 이미 안면이 있는 듯 했다. 예전에도 그렇게 나이트를 전전하더니, 지금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웨이터와 아주 친밀해 보였다.
“야, 저 사람 암것도 아니니까, 우리 친구들 한명도 여기 보내지 마? 알았지?”
“어, 그래. 알았어 해리야.”
돼지 엄마는 해리에게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이트는 물이 중요했다. 물은 나이트에 있는 남녀의 얼굴값이나 다름없다. 즉,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 있어야 나이트가 유지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웨이터들은 예쁜 애들은 각자 관리하곤 했다. 연예인급 예쁜 애들이 있어야 돈이 있는 남자들이 몰려오니까.
“쟨 뭔데 저렇게 고약해?”
노랑머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랑머리가 해리를 보긴 했지만, 성형한 뒤에는 못 봤으니 기억 못할 만도 했다.
“냅둬, 이제 디제이 나올 시간 되어가니까, 좀만 있다가 가자.”
“으, 좋다 말았네.”
“너 자꾸 그러면 제수씨한테 이른다?”
“네? 아니 남자끼리 그러면 씁니까? 이거 참.”
노랑머리는 은미와 잘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에 온 것은 분명 혼날 일이지만, 그도 은미를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 괜찮은 놈이니까.
“그니까 부킹은 포기해.”
“네, 저런 고약한 애들만 있으면 나도 싫네요.”
그렇게 다음 디제이가 나올 타이밍이 되었다.
디제이는 아주 섹시한 목소리로 수준급의 디제잉을 선보였다.
“어? 저 여자.”
“왜요? 아는 사람?”
“어, 그게 저 여자 빡빡이…… 춘미?”
“빡빡이? 춘미?”
디제이는 머리를 빡빡 밀고 데뷔하는 춘미였다. 그녀는 음색도 좋고, 감각도 좋아서 분명 뜰 것이다. 하지만 아주 많이 뜨진 못한다. 한 5년만 뒤에 태어났어도 분명 더 잘 될 사람인데, 너무 일찍 태어났다고 해야 하나?
“아, 그냥 가야겠다. 이사장님이 고려할 대상이 아니야. 추구하는 앨범 스타일이 너무 달라.”
이사장이 데리고 있는 작곡가들의 음악과 춘미는 맞지 않는다.
그때, 돼지 엄마가 우리의 테이블로 웬 여자를 데리고 왔다. 나는 춘미 말고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