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인수합병(2)
악세뉴아 인수합병을 논하는 곳에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재준과 그레이스 정 이었다.
“저것들이 대체 여길 왜?”
노랑머리는, 내가 재준을 싫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놈 아버지 회사 망한 거 아니었나?”
조 이사가 시답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망했지만 미용 전문 회사는 잘 나가더라구요.”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랬다.
재준과 그레이스 정이 우리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저들의 표정은 전에 봤을 때와 사뭇 달랐다. 웃고 있지만 째려본다고 해야 할까?
“오랜만이네. 꽤 많이 성장했더구나?”
재준은 전과는 다르게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와 지금은 위상이 다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레이스는 내가 김주원과 이 차장과 관계되어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은, 나도 회귀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 차장에게 반지에 대해 알려준 것이 나라는 것은 아직 알지 못 할 테지만, 내가 그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았으니,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독차지하려던 회귀의 반지를 앗아간 것이 두 사람이니까.
“어,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악세뉴아 인수합병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왔지. 너도 그런 거 아니니?”
“어, 그렇긴 한데…… 너희는 염색약 시스템이 이미 완비되어 있잖아?”
재준은 그레이스의 도움을 받아서 이미 염색약 시스템과 미용 기업에 갖추어야 될 모든 것을 다 갖춘 상태였다.
“그건 니 생각이고, 우리는 좀 더 큰 기업으로 도약해야 하거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려야 하지 않겠냐?”
재준의 아버지가 이 차장에 의해서 망하게 되자, 그 복수를 재준이 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몸집을 불려야 한다.
“그랬구나. 어쨌든 우리는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네.”
“대결이랄 게 있겠어? 너희는 아직 우리 상대가 되지 못해.”
재준의 재수 없음이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다. 만약 있다면, 눌러서 이기고 마는 사람이다.
그의 그런 재수 없음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도 이제는 더 당하고 살지 않을 거니까.
“상대가 되는 것은 두고 봐야 알 일이지. 네가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며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이거 여기에서 두 분을 보게 되나요? 반가워요. 희망 화장품 유선미입니다.”
희망 화장품? 거기는 업계 1위의 화장품이다. 현재 CF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이고, 인수합병이 전혀 필요 없는 사람들인데? 대체 왜?
“아, 안녕하세요.”
“누님, 여기는 누님이 오실 자리가 아닌데요?”
유선미는 재준과는 일면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재준씨 아버님이 그리되셔서 신경 쓰이지만, 경쟁은 경쟁이구나요?”
“1등이 뭘 자꾸 남의 걸 탐냅니까? 양보를 좀 하시죠.” “우리도 필요한 회사이구, 양보를 다 하면 1등하기 어렵더구나요.”
이상한 말을 하는 유선미는, 희망 회장품의 1등 신화를 이루어 낸 장본인이다. 그녀까지 경쟁에 뛰어들 줄은 몰랐다. 난감한 일이다.
그때, 악세뉴아 측의 인사가 나타나 우리 앞에 섰다.
“이렇게 쟁쟁한 분들이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악세뉴아 인사는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쩐지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세 회사에서 내신 금액은 큰 차이가 없이 비슷합니다. 그걸로 결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럼 뭘로 결정한다는 거죠?”
유선미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여주며 말했다.
악세뉴아 인사는 유선미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 조건은 인수합병을 하되, 우리 회사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시켜서 생산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것이 조건입니다.”
“그건 인수합병이 아니고 그냥 도움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선미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이 거래에 더는 참여하고 싶지 않은 듯 조용히 가방에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조건이 좀 이상하군요.”
“끝까지 들어봅시다.”
“회사의 인지도가 있으니까, 우리는 외국 기업에서 분리해 온 상태잖아요. 그 외국 기업에 누가되지 말아야 하니까 그런 겁니다. 생산은 하되 악세뉴아 본연의 제품도 같이 생산해주길 원하는 거죠.”
“난 됐어요. 가겠습니다.”
유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유선미가 가는 것을 보고 재준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그레이스 정이 재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분이 아니라고 하니, 우리도 덤빌 필요가 없어요. 그냥 쟤들에게 주죠. 우리를 이용해서 본사에게 이득을 주겠다는 말이잖아요.”
그레이스는 우리를 얕잡아 보는 모양이었다.
“어, 그럼 우리도 갈까?”
재준이 그레이스를 따라 일어났다.
뜻하지 않게 경쟁자가 둘이나 사라졌다.
“저도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재준도 더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돌아섰다.
손 안대고 코푼 격이다. 물론 내 쪽에서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악세뉴아측 인사가 나를 바라보았다. 순한 강아지가 밥을 달라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저희가 참여하도록 하지요.”
“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악세뉴아 측 인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나까지 갈까봐 겁을 집어먹고서 말이다.
“대신 우리 측에서도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인가요?”
“기술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염색약 등을 생산하는 기술을 말이에요.”
“아, 그럼 우리 악세뉴아와 같은 제품을 생산하신다는 말이신가요? 그건 우리 측에서 거부할 겁니다.”
“아니, 기술을 알려주면, 그걸 토대로 다른 제품을 연구해서 내놓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구요.” “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제가 임의로 결정할 것이 아니니, 의논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것만 지켜주시면 뭐든 원하는 대로 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우리 측이 원하는 것만 얻으면, 뭐든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후에 벌어질 골치 아픈 일은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얼마 뒤, 악세뉴아와 우리의 합병이 성사되었다.
* * * * *
“유승철이 이혼했다고? 애는 어쩌고?”
승철이와 선정이가 이혼을 했다. 애는 선정이가 키우는 걸로 하고, 깔끔하게 헤어졌다고 한다. 문제는 승철이와 선정이가 차례대로 나를 찾아왔다는데 있다.
“나 이혼했다.”
승철은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이야기했다. 마치 그동안 나를 보지 않은 것이 선정이 때문이라는 말투였다.
“애는 어쩌고?”
둘 사이에서, 나랑은 그렇게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아이가 한방에 생겼다. 그래서 천생연분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애는 선정이가 키우기로 했어. 애한테도 그게 좋을 것 같아.”
승철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 호된 시절을 보낸 듯 눈이 퀭하다. 하긴 이혼이란 게 결혼보다 더 큰일이 아니던가? 나도 선정이와 헤어질 때 많이 힘들었는데, 그는 아이까지 놓고 와야 하니, 더 힘들었겠지.
“고생했다.”
마치 내가 해야 할 고생을 그가 대신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빚을 진 느낌이랄까.
“그래서 말인데, 나 위자료 좀 뜯겼거든. 지방에 좀 보내주라. 꼭 원장 아니라도 상관없어. 아직 그럴 깜냥도 되지 않고.”
그는 그럴 깜냥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은미와 만나서 수십 개의 지점을 거느린 사람으로 발전하는데, 지금은 그저 그런 놈이 되어있다. 그에게 이은미는 동아줄이었던 건가?
“그래, 조만간 연락 줄게. 조금만 기다려줘.”
“고맙다. 너에게 자주 연락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됐어. 미안할 게 뭐 있냐.”
승철은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지난 시간들이 전부 아까운 듯 보였다. 어쩌면 지금의 나와 비슷한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는 녀석인데,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는 생각이었다.
“그래, 나중에 또 보자.”
승철은 그렇게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갔다. 그의 어깨가 축 쳐져있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무거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정이가 찾아왔다.
“오랜만이야.”
선정이는 아이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예뻤다. 내게 김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녀에게 다시 반할 정도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나를 만나러 한껏 꾸미고 왔다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아직도 첫사랑인 건가?
“이야기 들었어. 많이 힘든 거야?” “아니, 다 힘들게 살잖아? 오빠도 그런 사고를 당했는데도 여전히 잘 살고 있는데 뭐.”
선정이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힘들었던 듯 피부결이 조금 거칠어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싱글맘으로 사는 것이 많이 힘든 일일 것이다.
“나 부탁이 있어서 왔어.”
“무슨 부탁?”
승철이처럼 취직을 부탁하러 왔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우리 애 후견인이 되어줘.”
“어? 아 그건 좀 그런데? 너희 남편이 나와 너의 사이를 의심했던 거 잊었어? 그 소리를 또 들으라고?”
“그래, 그거 때문에 내가 이혼한 거야. 내 이혼의 원인이 당신이라고, 알아?”
억지다. 도대체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이후로 만난 적도 통화를 한 적도 없는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그게 도화선이 된 거지. 그 거지같은 유 사장도 한몫했고.”
“그렇구나.”
유 사장은 아직도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니 인생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후원? 그건 우리 회사에서 장학금 차원으로 대줄 수 있도록 해줄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말이야.”
“정말이야?”
선정이가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싱글맘으로 사는 것이 힘들 테니, 동아줄이라도 잡으려고 한 것이다. 그게 내 돈이고 말이다.
선정이의 마음을 대변하듯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건 너 때문이라기보다는 둘 다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니까 너는 이제 내가 가라는 곳에 취직해서 일해. 기초부터 다시 제대로 배워야해. 지인이라고 잘해주는 것은 전혀 없을 테니까, 각오해야 할 거야.”
내 말에 선정이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알아서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대신 지방이라도 괜찮겠어?”
“그럼, 아무데나 괜찮아.”
“그래, 조만간 연락할게. 준비하고 있어.”
그렇게 선정이를 보내고, 얼마 뒤 승철이를 만났다.
* * * * *
승철이는 총각이라도 된 양, 한껏 꾸미고 다녔다. 그동안 육아를 한다고 꾸미지 않은 것이 한이라도 맺힌 듯 과했다. 흡사 한원장의 젊을 때를 보는 느낌이었다.
“일단 거기서 실장으로 일하다가 조만간 부원장으로 승진시켜줄게.”
승철은 내가 말한 조건이 아주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입부터 웃고 있으니까.
“고마워. 정말 열심히 할게.”
“그럼 이 친구랑 나랑 셋이서 가보자.”
“어.”
내 옆에 서있던 노랑머리가 승철에게 인사했다. 과거 본적이 있지만 친하진 않은 사이다.
“여기 있었네?”
그때, 이은미가 노랑머리를 보며 다가왔다. 그런데 어라? 승철이가 은미를 보고 반한 표정이다? 둘이 원래 결혼하는 사이라서 그런 건가? 그럼 곤란한데…………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