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스파이?(2)
정말 이은미의 아버지가 재준에게 제보를 한걸까? 하는 의문이 들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 의심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은미의 아버지가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머지 회의는 은미씨가 좀 주도해 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골자는 다 나왔으니까, 큰 부담은 없어요.”
“고마워요. 은미씨는 저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니 믿고 가볼게요.”
내 칭찬에 은미가 싱긋 웃었다. 사실 그녀는 회장을 해도 될 정도로 듬직한 사람이다. 매 순간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옳은 판단을 한다. 오너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내가 회귀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그녀의 하수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아버지를 더 감시해야 한다. 그녀를 잃을 수 없으니까.
“어? 어디가요?”
노랑머리가 나를 따라 나오려고 했지만, 무시하고 나갔다. 노랑머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좋게 끝날 수 없을 테니까.
은미의 아버지는 내가 쫓아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조용히 차에 올랐다. 다행히 본인이 직접 운전을 하였다, 만약 비서가 운전했다면, 내가 쫓아가는 것을 빨리 눈치 챘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도 조용히 차로 다가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다 다시 내려서 트렁크에 있는 헬멧을 꺼내 들었다. 은미의 아버지가 내 차를 알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김설아가 절대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지만, 지금 딱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은미의 아버지는 예상대로 재준의 회사를 향해 갔다. 그토록 가지 않기를 바랐건만, 내 바램을 무시하듯 그의 차가 유유히 재준의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실망스럽네.”
나는 그의 뒤를 쫓아 들어가다 멈추고 1층에 오토바이를 주차했다. 지금 1층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와 딱 마주칠 거란 계산이 들었다. 오토바이 보관함에서 대충 아무거나 집어 들고 회사로 들어갔다. 퀵서비스 직원이라고 속이기 위해서였다. 헬멧을 벗지 않으면 나인 줄 모를 것이다.
“퀵이요. 은성에서 보냈어요.”
회귀 전, 은성에서 왔다고 하면 퀵 배달원을 무사 통과시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행히 입구에서 무사통과하였다. 재빨리 다가가서 엘리베이터를 붙잡았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중이다. 분명 은미의 아버지가 타고 있을 것이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가 타고 있다. 다소 긴장한 모습이다. 대체 왜 스파이 짓을 하는 걸까?
그가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들었다. 볼펜 형 녹음기다. 그가 녹음기를 잠깐 틀었는데 분명 내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서 헬멧을 벗었다.
“사장님 바쁘시네요?”
“네?”
그가 내 얼굴을 보고 놀란 듯 뒷걸음치다 발을 헛디뎠다.
나는 재빨리 그의 허리를 붙잡고 엘리베이터 멈춤 버튼을 눌렀다.
덜컥.
“바쁘시네요? 스파이 짓 하시느라?”
“엇, 그게…….”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나는 그의 허리를 내 쪽으로 당겼다. 흡사 스칼렛 오하라 같은 자세로 허리가 꺾였다.
“정말 스파이 짓을 하시는 거냐구요? 사장니임!”
“아니 그게…….”
그때, 엘리베이터 스피커로 경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엘리베이터가 곧 사람을 부를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 눌렀어요.”
나는 얼른 그를 놓아주고 다시 헬멧을 썼다. 내가 갑자기 허리를 놓은 바람에 그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의 손을 잡고, 작동 버튼을 누르니 원래대로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우웅.
“일단 따라 내리시죠.”
나는 그를 데리고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바로 위층이 재준의 사무실이기 때문이었다.
* * * *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번 어성초 사건도 사장님이 하신 겁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주먹을 꼭 쥐었지만, 그걸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자는 이은미의 아버지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왜! 왜 그랬는지 알아야, 그 핑계로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도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아보면 알거야. 내 귀한 딸이 전과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말이야.”
그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만, 그건 엄연히 범죄이다. 그도 전과자나 다름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그래도 그건 아니죠. 제가 지금 당장 신고하면 사장님도 전과자가 됩니다. 그걸 모르고 하신 건 아니시죠?”
내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자기도 전과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듯 했다.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였네.”
“하, 모르셨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 내가 미안하네.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내 잘못인건 맞으니 변명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럼 지금 당장 신고를 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아니, 그러지 말고 벌금을 내도록 하지. 말만 하시게. 내 충분히 보상해줄게.”
그는 돈이 많은 사람이기에, 늘 이런 식으로 해결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돈이 많다. 더 필요 없다.
“그럼 돈 말고 다른 걸 주시지요.”
“뭘? 돈보다 중요한 게 있는가?”
그의 입장에서는 돈이 항상 제 몫을 해왔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우선, 사장님이 제 편인 것은 확실한 건가요?”
그가 또 배신을 하지 않아야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그럼, 내 딸 일만 아니라면 자네 편이지. 그동안 봐온 결과 자네는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사람이야.”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그러니 부동산 부자가 된 것이고.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래, 말을 해보게나.”
“이 상황을 역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이용?”
“네, 재준이는 지금 사장님을 굳게 믿고 있는 상태잖아요?”
“그렇지. 내덕에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도 했지.”
재준에게 그는 은인과도 같다. 그걸 이용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만나는 것도 약속을 하신 거구요?”
“그래, 오늘 중으로 간다고 했어.”
“그럼 만나세요. 대신 녹음 파일은 제가 조금 조작할 생각입니다.”
“어? 그걸 조작하면 뭐가 나오나?”
“네, 우리가 우리 제품만 이야기한 게 아니잖아요.”
“그랬지.”
내 생각은 이러하다. 우리가 앞서 나눈 대화는 녹음이 되어있다. 그걸 가져가서 들려주기로 약속도 되어 있다. 그럼 그걸 들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준 쪽에서도 의심할 테니까.
“우리가 다른 제품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에, 제가 따로 그 실리콘 성분에 대하여 언급할겁니다. 그걸 녹은 파일에 합성할거구요. 우리도 실리콘을 많이 넣어서 만들자! 하는 거죠.”
“오, 그래서?”
“그럼 재준이 선택하겠지요.”
녹음 파일을 들은 재준은 새로운 전략을 짤 것이다.
“무엇을?”
“우리처럼 실리콘을 많이 넣은 제품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실리콘의 유해성을 알릴 것인가?”
“오호, 그렇겠구만.”
재준의 선택에 따라 우리 측의 조치도 달라진다. 어떤 선택이든 우리의 피해는 제로다.
“그럼 그에 맞게 우리 측에서 다음 작업이 들어가는 거죠.”
“어떻게?”
“전자를 선택하면 우리 측에서 실리콘 성분의 유해성을 알리는 거죠. 방송국이든 어디든.”
“오, 그러면 일석이조구만?”
두 회사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다. 사실 이쪽이 더 좋은 방법이지만, 리스크가 있을 것이다.
“네, 후자면 재준이 그쪽 1위 회사를 잡아주는 거구요.”
“그럼 결국…….”
“네, 어떻게든 우리 회사가 1위를 먹을 겁니다. 1위 회사는 무조건 잡는 거니까요.”
“하…….”
“네, 결국 사장님이 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겠구만.”
그는 갑자기 풀이 죽었다.
“자네가 녀석의 뒷배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네. 그런 계획이라면 내가 이길 수 없을 거야. 너무 완벽해.”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마침맞게 엘리베이터가 이층에 도착하였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열리는데, 안에는 재준과 그레이스정이 타고 있었다. 은미의 아버지도 놀라고 재준과 그레이스도 놀랐다. 나는 너무 깜짝 놀랐지만 헬멧 덕분에 감출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이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다행히 내 존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 * * *
“왜 내려가시는 거죠? 들려줄 녹음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재준이 은미의 아버님에게 물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다그치는 목소리다.
은미의 아버님은 뜻밖의 상황에 놀랐지만,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하였다.
“녹음기를 놓고 왔어요. 하하, 죄송합니다.”
그레이스는 그런 은미의 아버님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혹시나 거짓말을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많이 기다릴 순 없어요. 재준씨가 바쁘거든요.”
“네네, 곧 가져오겠습니다.”
“다그치진 마. 저번에 도움도 주셨는데.”
재준의 말에 그레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었다.
“알았어.”
“근데 이 차장이라는 사람은 왜 감시하라는 거지?”
“쉿, 조용히 해.”
“그가 누군지 알아들을 사람은 없잖아?”
재준이 나와 은미의 아버님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충분히 알아듣는다구 친구.
나는 조용히 품에 있는 녹음기를 켰다. 마침 아주 적절한 아이템이 손에 있다.
“아무튼 감시하다가 이 차장의 손에 검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는 그때, 바로 데리고 와.”
“그니까, 그 위험한 걸 왜 하라는 거야? 그 사람 곧 국회의원이 될 거라고 하던데? 그런 사람 건드리면 큰일 나.”
재준은 자기 부모가 그리 된 것이 이 차장 때문인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국회의원은커녕 뭣도 못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내 말대로 좀 해.”
“그니까, 왜? 왜 그놈을 그리 하냐고?”
“당신 부모님 그렇게 만든 사람이 그놈이야. 몰랐어?”
“뭐? 진짜야?”
재준의 부모를 잡은 검사는 따로 있다. 그 뒤에 이 차장이 있는 거다. 그러니 재준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 그니까 놈을 잡아! 단 반지가 같이 있어야 해.”
“반지? 반지는 왜?”
“그게 신호야. 놈을 잡을 수 있다는 표식이야.”
그레이스는 재준에게 그 반지가 회귀의 반지임을 절대 알리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그러니 저런 이상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지.
“그래, 알았어. 그리 말해둘게.”
후에 은미의 아버님이 내가 조작한 녹음 파일을 재준에게 전달하였다. 재준은 후자, 즉 실리콘 샴푸를 언론에 재보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현명한 처사이다. 그래야 우리 회사와 1등 회사를 둘 다 날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자신을 거지로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나는 품에 든 녹음기를 끄고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 차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 * * * *
“괘씸한 것들.”
녹음을 들은 이 차장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또, 손 안대고 코를 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준은 회귀자 두 명을 원수로 둔 셈이다. 참으로 불쌍한 녀석이다.
“어, 이쪽으로 좀 와봐.”
이 차장은 바로 비서를 불렀다. 앞서 만났을 때는 못 봤던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이 차장의 차림새나 위세가 전과는 다르다. 오재훈이 김설아의 남편이었을 때 느꼈던 그런 아우라가 느껴졌다.
“고재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 현재 놈의 회사에서 뭘 하는지, 앞으로 뭘 할 건지. 약점이든 뭐든 싹 다 알아와.”
“네, 알겠습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