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모든 것이 없던 일로(3)
양해리, 재준을 구워삶았던 여자, 나를 회귀하게 만들었던 여자다. 그녀라면 재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재준은 현재 가장 잘 나가는 기업인 중 하나가 되었으니, 그녀가 욕심내기에 충분하다. 거기다 앞서 승철과 선정이를 보면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 정해져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이은미를 본 승철이 자꾸 끌렸던 것처럼, 인연이라면 분명 서로 당기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원래는 TV에 가끔씩 얼굴을 비추곤 했는데, 요즘 그녀는 단역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해리에게 소개해주었던 무속인을 찾아갔다. 아마 그 무속인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저기, 안녕하세요.”
“으허헝, 왜 이제 나타났엉.”
무속인은 나를 보자마자 무척 반가운 듯 달라붙었다. 사실 그때 내가 미래에 유행하는 드라마와 벌어지는 일들 몇 개를 알려주어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왜 이러세요?”
“자기 때문에 나 족집게 도사 취급 받았었는데, 이제 영발이 떨어졌다고 하잖앙.”
무속인은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근데 그때 왔던 해리라는 여자는 어디에 있는지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흥흥, 내가 알려주면 그쪽도 알려줄 고양?”
미래에 대해 알려달라는 이야기다. 뭐, 대충 몇 개만 알려주면 된다. 크게 지장이 없는 것들로. 다만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은 몰라야 한다. 그래야 후에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저도 들은 이야기가 있긴 한데, 정확하지는 않아요. 암튼 해리 어딨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음…… 알긴 한데, 나도 정확하지는 않앙. 여기저기 옮겨 다니더라공.”
“옮겨요? 어딜?”
“룸싸롱?”
“네? 해리가 룸싸롱에 다닌다고요?”
“어, 성형을 하느라고 돈을 땡겨썼더라공. 그거 갚느라고 여기저기 옮겨 다녀.”
“헉, 어쩌다 그리 되었지…….”
“그쪽 덕분이징? 안 그런가? 그쪽이 말하라고 한대로 했을 뿐이라공 나는.” “그래도, 어찌 그리 된 거지? 어휴.”
“암튼 난 전달했엉. 나한테 전달할건 무어징?”
나는 무속인에게 올해 벌어질 일들을 대충 말하고는 바로 해리가 있다는 룸싸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양해리는 그곳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몇 군데를 옮겨갔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해리가 있는 룸싸롱을 찾아갈 수 있었다.
* * * * *
해리는 성형으로 완성된 얼굴과 몸매를 갖고 있었다. 웬만한 연예인에게도 꿀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무속인에게 언급했던 것처럼 2002년에나 뜰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 연예인 쪽은 일단 접어두었다고 했다.
“용건만 간단하게 말해요. 나 바쁘거든요.”
해리는 룸싸롱에서 일하며 많이 찌들어 있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어려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게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빚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대신 갚아주기라도 하게요?”
해리는 빚을 갚아주지 않으면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일해서 빚을 갚아야 연예인 생활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갚아주면, 내 부탁 들어줄 건가요?”
해리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정말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장난할거면 꺼지라니까?”
“갚아줄게요. 대신 어떤 남자를 당신 것으로 만들면 됩니다.” “남자? 남자를 꼬시라는 말인가?”
“그렇죠. 간단하게 말하면 꼬시라는 말입니다.”
내 말에 구미가 당기는 듯 내 쪽으로 다가오는 해리.
“빚이 상당할 텐데? 아저씨는 미용사잖아. 그 빚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돈 많으니 걱정 말고 내게 협조한다고나 해요.”
해리는 내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화류계에 몸담고 있으면, 차림새만 봐도 돈이 얼마나 있는지 대충 감이 온다고 한다.
내가 돈이 없어보이게 하고 다니진 않으니까, 일단 내 말을 믿어보기로 하는 해리.
“무슨 일부터 하면 되는데요?” “일단 쉬면서 상대 남자에 관해 이야기 하죠.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아야 당신 것으로 만들 테니까.”
“그러죠. 쉬는 것은 정말 좋네요.”
해리는 그동안 룸싸롱에 다니면서 버는 돈을 전부 빚을 갚는데 썼다. 그래서 좀 더 빡세게 일하는 중이었다. 빚을 다 갚지 못하면 다른 룸싸롱에 팔아넘기기도 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팔아넘기며 빚을 늘리고, 결국 이 바닥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가씨들은 물주를 잡지 못하면 영원히 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녀가 내 제안에 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 제 제안에 응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는데, 그녀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표정, 저 표정에 반했었지…… 마치 자기를 왜 좋아하느냐는 표정이다. 자기를 좀 더 알고 싶냐는 표정.
“나한테 왜 잘해줘요?”
“그건…….”
저 말투, 상대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말투와 표정. 그녀는 상대를 옭아매는 힘을 지녔다. 회귀 전에는 그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룸싸롱에 다니면서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나는 당신에게 차갑게 굴었잖아.”
반말, 남자를 옭아매기 전 상대 남자에게 말을 트는 그녀다. 이제 그녀의 수법 정도는 다 꿰고 있다.
“비즈니스에요. 그 남자를 혼란시켜야 내가 사니까.”
지극히 건조한 말투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차갑게 굴었다. 그녀에게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내 건조한 말투를 들은 해리는 곧 내게 준 눈길을 거두었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그럼, 돈 해결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죠.”
해리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일어났다. 자기를 필요로 한건 저 미용사니까, 그녀 입장에서는 자기가 갑이다. 빚을 갚아준다고 굽신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해리를 따라 일어나면서 가지고 온 현금이 든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을 본 해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설마 지금 당장 돈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건?”
“당장 이걸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가방을 열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만 원짜리 지폐가 꽤 많이 쌓여 있었다. 그녀도 이 만한 돈을 실제로 본적은 없을 것이다. 하긴 나도 회귀 전에는 상상도 못한 상황이다.
“그럼 당장 자유의 몸이 되겠네?”
“그죠. 지금 같이 나갑시다.”
해리가 밝게 웃었다. 그동안 정말 힘들었던 듯 했다. 자유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 그녀가 보여준 표정은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는 걸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그길로 해리를 데리고 마사지샵을 찾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며주기 위해서였다. 해리도 그런 호사가 좋은지 연신 웃었다. 내게 김설아가 없었다면 또 반할 정도의 미소였다.
“그럼 이제 소속사도 정하고 연기 연습도 해야겠지?”
또 반말, 그녀는 나를 남자로 여기고 있다.
“그건 일단 내가 준 미션을 하고 난 뒤에 결정하죠. 내가 아주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 줄 수 있는 건 알죠?” “그건 알지. 그럼 믿어도 되는 건가?” “네, 나만 믿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말, 전에 첫 번째 회귀했을 때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또다시 그녀에게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이제 이 여자에게 절대 물리지 않을 거니까.
“난 나만 믿어. 누구도 믿을만하지 않거든.”
그때, 해리가 한 말을 지금도 똑같이 한다. 그녀는 늘 변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 건가 싶다.
“그럼 일단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부터 알려드리죠.”
“응.”
나는 해리를 데리고 재준이 일하는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이 회사의 사장이 고재준이라는 사람인데.”
고재준이란 말을 들은 해리가 움찔했다. 혹시 먼저 만났던 건가?
“알아요?”
“아니, 모르는데 왠지 친숙하네.”
둘이 연분인 게 맞는 것 같다.
“그 사람을 꼬셔서 아내와 헤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아내와 헤어지고 당신과 결혼하면 더 좋고요.”
“어머, 정말이야?” “정말이죠.”
“그럼 저 회사 사장을 꼬시게 나를 후원해준다는 이야긴가?”
나는 해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드를 꺼내서 내밀었다. 카드를 받아 든 해리가 엷게 웃었다.
“당신이 쓰고 싶은 만큼 쓰세요. 부담가질 거 없습니다.”
돈은 김주원 못지않게 있지만, 특별히 김주원이 직접 내게 현금과 카드를 주었다. 반지를 없애주는 조건이었다.
“정말 화끈한 오빠구나. 존나 멋지네.”
“그리고 그 말투를 좀 손볼 필요가 있어요. 너무 …….”
“너무?”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과.”
회귀 전, 해리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말투까지 저급해졌다. 저런 말투라면 재준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리의 말투와 행동까지 교육에 들어갔다. 회귀 전 해리의 행동들에 맞춘 교육이었다. 물론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할 테지만.
아무튼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리가 세팅을 마쳤다. 이제 재준이 좋아하는 골프 연습장으로 해리를 투입하면 될 것이다.
해리는 운동신경이 제법 있어서 골프를 금방 배웠다. 원래는 골프 캐디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재준과 친해졌을 때 골프를 자주 치게 되기 때문에 들어간 특훈이었다.
재준은 해리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꿰뚫고 있던 것이 한몫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리는 재준의 여자가 되었다. 크게 공들이지 않았음에도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레이스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레이스를 화나게 하려는 데는 일단 성공하였다.
재준은 해리 덕분에 정신을 좀 놓게 되었고, 나와 경쟁구도에서 조금 뒤처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레이스가 전면으로 나섰다. 재준이 해리에게 정신이 팔리자, 미래 지식을 가지고 정치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레이스는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져낸 저력을 지닌 여자다. 재준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기 때문에 그녀가 회귀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재준보다 그레이스가 더 위협적이긴 했지만, 그녀가 회귀한 것이 아니었기에 경계하지 않았다.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재준의 회사는 눈부시게 성장해 나갔다. 회귀를 한 것은 불과 일년도 되지 않는데, 정말 알차게 회사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전부 그레이스의 공인 것 같았다. 결국 같이 회귀한 나는 2등을 지키는 것에 그쳤다.
나는 그 안에 해야 할 일들을 전부 해야 했기에 무지하게 바쁜 탓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 했다. 하지만 덕분에 내 동료이자 소울메이트인 노랑머리의 결혼식이 물 건너갔다. 재준이 저 정도로 성장한다면 앞으로도 1등은 무리일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노력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노랑머리는 결혼하지 못하였다. 그의 회귀 전 신혼생활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기 때문에 미안함이 극에 달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지고 만다.
부우우웅.
“여보세요.”
“살려줘! 살려줘!”
분명 해리의 목소리였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