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가 기자를 잡아라(4)
나는 서둘러 이 차장을 찾아갔다.
이 차장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 어서와. 녹차 향이 아주 좋아.”
“대체 왜 그러세요? 이건 불쌍하게 죽은 배우 한 명을 도와주는 것뿐이라고요.”
“근데 왜 오재훈을 띄워주지?”
그럴 거라고 예상했던 답변이 들려왔다.
“그건 그 사람이 조만간 제 동생과.”
“자네 동생 사법고사 통과도, 오재훈과 만나게 해준 것도 전부 나라는 것을 잊었어? 내가 다시 가서 그걸 막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이 차장은 손에 낀 회귀의 반지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가 그렇게 한다면 할 수 있다. 그걸 막을 길은 없어 보였다.
“왜 그런 짓까지 하려는 거죠? 오재훈이 뭐라고?”
“그니까? 그 놈을 왜 그렇게 밀어주는 거지? 어차피 니들은 내게 안 될 텐데?”
이 차장은 오재훈이 대통령 후보까지 되는 것을 모르는 상태이다.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 준 줄 아는 것이다.
오재훈이 진짜 대통령 감인 것을 이 차장이 알 리가 없다. 그것을 안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을 테지만.
“그거 하나 뿐인 거죠? 그 방송만 취소하면 더 방해하지 않을 겁니까?”
“그래, 놈을 영웅시하는 그런 방송은 원치 않아.”
이 차장은 단호했다. 그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우리 준희의 인생도 새로 써질 수 있다.
“알겠습니다. 방송은 취소할 테니 소송은 하게 해 주시죠.”
“그래, 곧 조치를 취할 테니 가봐.”
“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고 가려다가 문득 이 차장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어졌다.
“반지가 살아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시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반지가 주인을 물 수도 있어요. 조심하고 신중하게 사용하셔야 합니다.”
“하하, 알겠어. 그래서 너는 이 반지를 포기한 건가? 반지가 무서워서?”
이 차장은 조롱 섞인 얼굴로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지만 일단 넘겼다.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할 바엔 포기하는 것이 좋을 수 있죠. 저는 악용하는 것을 포기한 겁니다. 반지 덕을 이미 많이 봤으니까요.”
“악용이라, 사실 네 인생도 남의 인생을 밟고 올라선 거 아니겠어? 그것도 네 입장에서는 선용한 거지만, 남의 입장에서는 악용이야. 네가 감히 그런 위치에까지 올라간 것은, 남의 인생을 밟고 올라간 거야. 너라고 다르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어때?”
맞는 말이긴 하다. 나란 인간이 이 위치에 올라간 것은 누군가가 올라간 것을 밀치고 간 것이다. 앞서 이 차장이 오재훈의 인생을 밀어내고 올라간 것처럼, 그레이스가 재준의 아내의 자리에 올라탄 것처럼 말이다.
“네, 그래서 반지가 사라져야 하는 겁니다. 자꾸만 사람들 인생이 어그러지니까요.”
“설교 그만하고 가봐.”
이제 이 차장과의 인연은 완전히 접어야 할 듯 했다. 김주원과 이 차장은 이제 내게 적이 될 것이다. 다행히도 김주원의 말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 할 수 있었다.
* * * * *
“뭐? 그게 뭔 소리유? 또 제재가 들어온 거유?”
양 기자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특성상 이런 일이 자주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화가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방송은 일단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거든요.”
“그 인간 뒤가 아주 구린 인간이유. 내가 그 인간 뒤도 함 캐봐야겠어.”
“일단 지금은 냅두는 게 좋아요. 우리가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우, 뭐 그딴 게 다 있지? 암튼 골치가 아파 내가.”
양 기자가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영상은 파기하실 거예요?”
“뭐 파기까지 해야 하나?”
“안하실거면 저 좀 주세요.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러시구랴.”
양 기자가 전해 준 영상은 후에 요긴하게 쓰이게 된다.
그렇게 가 기자 고소 사건이 시작되었다.
* * * * *
미용실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가 기자가 찾아와서 알짱거렸다. 놈을 그냥 보낼 수도 있었지만,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옆에 있게 두었다.
“아주 엿을 제대로 먹게 생겼네?”
가 기자가 정성스럽게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수 없음이 딱 맞는 표정이다.
나는 손님을 마무리 하고 가 기자에게 차를 내어주었다. 손톱의 때만큼 미안한 까닭이다.
“그러게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짐승처럼 날뛰면 벌을 받는 거지요.”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건가?”
가 기자가 처음으로 욕을 하였다. 그동안 재수 없는 표정과 말만 하였지 욕을 한 건 처음이다. 그만큼 열이 받은 거겠지. 놈을 도발하는 것은 성공이다.
“조사 받을 때 드시고 싶은 거 맘껏 넣어드릴게요. 맛있는 거 먹으면서 천천히 조사하시죠.”
그러자 가 기자가 껄껄대며 웃었다.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 너 나랑 선을 지켰어야 했어. 우리는 그런 사이로 남았어야 했다고.”
“그런 사이로 남지 않은 것은 당신이 먼저야. 그리고 고소한 것은 내가 아니고 피해자야. 그 사람에게 가서 빌어야지 내게 와봐야 아무 소용없어.”
“그냥 경고해두려고 왔지. 앞으로 볼만할 거라고.”
“네 볼만한 인생을 먼저 구경하고 생각해 보지.”
“쳇, 두고 보자고.”
가 기자가 가고, 십년 묵은 체증이 확 가시는 것 같았다. 놈이 저토록 화를 낸 것을 본적이 없었다. 늘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제대로 한방을 먹인 것 같았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판이 시작되었고, 전관예우의 힘을 업고 저들에게 각각 최고 형량이 내려졌다. 가 기자는 달랑 징역 2년뿐이지만, 그게 최고 형량이니 어쩔 수 없었다.
재판은 웬일인지 국민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가 기자가 기자들에게 많이 미움을 받고 있던 탓이었다. 다른 기자들의 속까지 풀어 준 셈이었다. 덕분에 방송을 하지 않았음에도 오재훈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특히 여성들이 오재훈을 사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재훈과 준희의 결혼식이 올려졌다.
* * * * *
준희와 오재훈의 결혼식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준희가 미스코리아 출신인 것과 현직 검사인 것, 오재훈이 전직 검사이며 국민적인 관심을 받는 것, 그들이 나와 김설아와 연결된 것 등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기자들은 앞서, 내가 가 기자를 처치해 준 일로 더 내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준희가 나와 김설아를 제치고 결혼한 것 때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런 관심이 가중될수록 오재훈의 인기도 더 올라갔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오재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결혼 후 한동안 인권문제에 관한 변호에 힘썼다. 그게 다 정치권으로 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는 정치인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회사는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준희 커플과 우리 커플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아주 바람직하게도.
이 차장은 그때까지 큰 말이 없었다. 내가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그도 약속을 지킨 것이다. 독한 인간이긴 해도 약속을 지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첫 회귀 때 내게 은혜를 갚겠다고 하고 준희를 검사로 만들어준 것처럼, 약속 하나는 칼이었다. 그걸 후에도 이용할 수 있었다. 약속을 지키려는 이 차장의 깊은 사명감을 내 쪽에서 이용하면 그를 컨트롤 할 수 있다.
그 시각, 그레이스와 재준은 우리를 잡기 위해서 위험한 짓을 계획하고 있었다.
* * * * *
“저것들이 시장 독식하게 그냥 놔둘 거야? 멍청하게 그냥 둘 거냐고?”
그레이스는 재준을 이잡듯이 잡았다.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그에게 잔소리를 했다. 그래봤자 재준은 회사에 관심이 없다. 다들 그레이스의 말만 듣기 때문이다. 사실 재준은 오너의 능력을 갖춘 놈이다. 그레이스가 없다면 그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런데 그레이스가 그의 능력을 자꾸 짓이겼다. 뭐든 자기 위주로 진행하고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재준은 어느 샌가 의지를 상실했다. 그게 다 그레이스 덕이다.
“잘난 니가 계획을 세워보든가?”
재준은 그레이스와 같이 있는 것조차 싫었다. 재준에게 유일한 안식은 해리뿐이다. 해리는 그 사건 이후로 자중하며 재준에게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하는 중이다. 재준은 그럴수록 그레이스의 자리에 해리를 앉게 해주고 싶어졌다. 해리가 원래 자신의 신부였는데, 그레이스가 들어와서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해리의 가스라이팅인데도 그대로 넘어갔다.
“내가 계획하면 도와줄 거야?” “뭔데?”
“반지를 훔쳐와야지.”
“반지 또 반지!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재준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레이스는 그 전에도 늘 반지 이야기만 했었다. 반지를 가져와야 모든 것이 끝난다며 똑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반지에 대한 집착은 김주원 못지않았다.
“그럼 뭐가 있는데? 있으면 말해보든가?” “그래, 그렇다 쳐. 김주원과 이 차장 손에 있는 반지를 무슨 수로 가져올 건데? 그놈들 따라다니는 사람이 항상 세 명 이상이야. 그것도 아주 유능한 놈들만 붙어 있어. 그것들 다 제끼고 가져온다고? 과연 가능할까?” “당신은 해보지 않고 벌써 포기부터 하냐? 그래서 박준수한테 지는 거잖아!”
“내가 지는 건 너 때문이잖아. 니가 내 인생에 끼어들면서 다 망가졌다고!”
사실 재준의 인생은 준수가 망쳐놓은 상태였고, 그레이스가 그를 다시 일으켰었다. 그렇게 올라갔던 인생이 또 곤두박질 친 것이다. 그레이스 때문이 아니고 박준수 때문이라고 해야 맞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네 인생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데?”
그레이스가 울먹거렸다. 많이 외롭고 힘들었던 그레이스는 한순간 설움이 폭발했다. 재준은 그레이스가 우는 것을 처음 봤기에 매우 놀라하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래, 알았어. 미안하다.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이 뭔데?”
“내가 김주원과 이 차장 주변에 사람을 심어두었어. 한참 전에 해두었지.”
그레이스는 반지를 스틸하기 위해서 미리 사람을 심어두고 놈들의 모든 상황을 보고 받았다. 놈들의 스케줄까지 전부 꿰고 있는 상태였다.
그레이스는 반지 이야기를 시작하며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이 반짝거렸다.
재준은 책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언제 그랬어? 암튼 정말 대단해.”
“그래서 놈들에게 반지를 받아 올 타이밍을 알아두었지. 요즘 사우나에서 회동을 자주 한다고 하더라고.”
“어, 그래서?”
재준은 평소보다 더 친절한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재준의 다정한 모습을 본 그레이스는 더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사우나에 미리 매복하고 있는 거지. 당신과 내가 말이야. 이 일에 다른 사람이 개입되면 반지에 대한 것도 알게 될 테니 우리만 가야하지 않겠어?”
“그건 그런데, 다른 사람은 회귀 후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기억하지 못할 거야. 우리 많이 겪어본 일이잖아?”
“그래, 그렇긴 하지. 아무튼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행동해야지.”
“그래, 알았어. 그럼 디데이는 언제로 하지?”
“세팅을 다 해놓았어. 다음주 일요일에 하면 딱 좋을거야.”
재준은 그레이스의 말을 다 녹음해 두었다. 책상에 녹음 기능을 가진 제품을 숨겨놓았기 때문에 언제든 녹음이 가능했다. 그는 대체 누구에게 들려주려고 녹음한 걸까?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