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한류 드라마의 헤어(3)
“어? 저 사람 고재준이고 뒤에 이 원장이네?”
조 원장이 저들을 알아보며 말했다. 이 원장도 재준의 밑에서 나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의 힘이라고 봐야 하겠다. 이 원장의 실력이 조 원장의 반도 못 따라가기 때문이다.
“근데 저 뒤의 여자 자기가 한 머리랑 똑같네?”
뒤에 있는 여자의 머리가 최지수의 머리랑 같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모델은 박 원장 모델이 훨씬 낫네.”
조 원장이 말했다. 위로인지 비꼬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러자 고재준이 우리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뒤의 이 원장도 우리를 아는 눈치였다.
“여기서 만나네? 여기 볼 일이 있나?”
“너는 어쩐 일이지? 네가 언제부터 드라마 제작에 관심이 있었지?”
“나 드라마 좋아해. 해리가 좋아하잖아.”
“너 마누라 죽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구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재준은 그레이스가 죽고 난 뒤 자존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레이스의 기에 눌려서 존재감이 없었는데 요즘 부쩍 어깨를 피고 다닌다.
“그래서 남의 밥그릇이나 뺏고 다니는가보지? 배가 많이 고픈가?”
“말 조심해. 우리 이제 아무 말이나 하고 다니는 위치가 아니잖아?”
재준의 매서운 눈빛은 회귀 전 그 눈빛과 비슷했다. 그레이스가 죽기 전까지의 눈빛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때, 제작사 대표가 재준을 알아보고 뛰쳐나왔다. 그를 보고 나는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약점이 뭔지 알기 때문이다. 첫 회귀 때, 해리가 그 대표의 약점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 드라마 제작발표회를 하기 바로 전까지는 유리잔이나 병 같은 것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깨지면 드라마가 망할 거라는 강박관념이 사로잡혀 있다. 그건 아주 측근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다.
“어서 오세요. 지금 배우들이랑 준비하고 있으니 바로 미팅하시면 됩니다.”
대표는 아주 상냥하게 말하더니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은 누구? 아 오아영 씨가 말씀하셨던 그 분들?”
“네, 저희도 배우들을 볼 수 있겠지요?”
내 말에 대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재준이 듣고 기분 나쁠까? 해서였다.
재준은 의외로 쿨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버스 떠났어도 손은 흔들 수 있으니 그렇게 하시지요.”
“아이고 너무 감사합니다.”
재준의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류사희가 입을 삐죽거렸다. 조 원장은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일단 두 사람을 진정시켜야 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도 안했는데 입구부터 진을 뺄 필요는 없으니까.
“흥분해봐야 도움 안 되니까 진정들 하세요.”
“진짜 싸가지 없는 놈이네요.”
“그렇죠 뭐.”
재준이 앞서 미팅에 들어갔다. 우선 재준이 최지수 스타일을 제시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 관건이었다.
* * * * *
재준이 미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그를 붙잡았다.
“네가 제시한 스타일을 볼 수 있을까?”
“왜? 겹치기라도 할까봐?”
“그래, 겹치면 그만둬야 하니까.”
사실이다. 그들이 같은 스타일을 제시했다면 우리가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재준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헤어스케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자마자 펼쳐보았다. 마음이 조급해서 용지가 찢어지기까지 했다.
다행이다. 저들이 제시한 것은 원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 원장이 한 스타일에 가까웠다.
“안 겹치네.”
“우리 이 원장님이랑 너랑은 수준이 달라.”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그래, 우리는 이미 계약을 마친 상태야. 너희들이 해봐야 소용없는 싸움이니까 힘 빼지 말길 바란다.”
재준이 자기 할 말을 마치고 돌아갔다. 나는 그때까지 조 원장과 류사희를 부르지 않았다. 재준과 마주쳐봐야 화만 나니까 저들을 릴렉스 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가지고 온 유리잔을 재준에게 내밀었다. 커피가 든 유리잔이었다.
“이거 먹고 기다리고 있어.”
“됐어. 커피는 나도…….”
재준이 말을 멈췄다. 루왁커피를 마다할 재준이 아니다. 그도 그 커피의 향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커피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귀한 커피니까, 거기다 재준이 엄청 좋아하는 커피니까.
“잘 마실게, 루왁커피구나.”
“루왁? 그 유명한 루왁이요?”
이 원장이 커피 냄새를 맡아보려고 끙끙거렸다. 저들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도록 두고, 우리는 배우들을 만나러 들어갔다.
“오아영 씨 부탁이라서 특별히 시간 내드린 겁니다. 아니 근데 협찬을 해주실 거면 진작에 말씀하시지. 그러면 우리도 그쪽이랑 했을 건데요.”
대표는 나중에 우리와 함께 할 경우를 대비해서 말을 아꼈다.
배우들은 우리가 제시한 스타일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하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저들도 재준의 회사에서 제작비를 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조 원장과 내가 머리를 꽤 잘하는 것만 확인시켜 주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우리가 문을 나서고, 제작사 대표도 문을 나섰다. 그러자마자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악.
제작사 대표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쫓아나갔다. 재준이 갖고 있던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뭐야! 거기서!”
재준에게 부딪친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망치고 없었다.
“으악, 그러면 안 되는데!”
대표의 눈에는 이미 유리잔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준이 다치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내가 사람을 시켜서 문을 열자마자 재준의 유리잔을 깨지게 부딪치라고 시켰다. 대표의 성향을 알기 때문에 이런 일을 계획하였다.
“괜찮냐? 조심 좀 하지.”
이 원장이 재준을 붙잡고, 내가 유리잔을 손수 치워주었다. 이 정도는 해야 동창이지 하면서.
“됐어. 커피는 잘 마셨다.”
“그래.”
대표는 그때까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 상황을 해결한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헤어 담당을 바꾸는 것, 제작비를 대주는 회사를 바꾸는 것 하나.
“죄송하지만 이분이랑 드라마를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징크스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재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로서는 황당할 것이다. 대표가 왜 그러는지 안다면 더 황당할 것이다.
“이분들이 제시한 스타일이 더 좋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음에 함께 하시지요.”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게 저분들 스타일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는데, 지금 마음이 바뀌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 저는 그걸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는 거죠?”
재준은 흥분을 한 나머지 얼굴까지 빨개졌다. 그걸 보고 조 원장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사이다를 마신 기분이 이런 거구나.”
“그러니까요. 호호.”
두 사람이 히죽거리는 것을 본 재준이 인상을 구기며 다가왔다.
“지금 웃깁니까? 내가 우스워?” “왜 애먼 사람한테 시비야? 경찰 부를까?”
내 말에 재준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대표를 쳐다보았다. 대표는 애써 다른 쪽을 보려고 하였지만, 재준이 바로 앞에 서자 어쩔 수 없이 재준을 바라보았다.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다음 드라마에 저희 쪽 자본을 대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다른 기업의 계열사입니다. 그쪽 기업의 협찬도 아마 받지 못할 겁니다.”
거의 협박조였다. 재준의 뒤에 다른 기업이 있는 것은 저들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래서 우리 쪽의 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만 딱 놓고 봤을 때는 동등했지만, 재준 쪽에는 다른 기업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대표가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자 연기자들이 있던 방의 문이 열렸다.
“저도 저쪽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건 최지수 씨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앞서 저 분의 머리를 보고 저 스타일로 하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배형준이 이 원장의 뒤에 있는 스텝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원장의 스텝이 최지수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우리 쪽에서 제시한 배우의 머리를 보고 더 마음에 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원장이 우리 측 도우미였던 셈이다.
그때, 최지수가 나와서 끼어들었다.
“저 머리 정말 마음에 들어요.”
두 사람이 그렇게 나오자 재준도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편법을 쓰긴 했지만, 어쨌든 스타일로 승리한 셈이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쩔쩔매던 대표가 나서서 말했다.
“네, 죄송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쳇, 알겠습니다. 다음에 그쪽에게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네요.”
재준은 기분이 나쁘지만 애써 참으며 말했다. 사실 이 드라마 말고 다른데 투자하면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냥 중간정도로 흥행할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는 부분도 있었다. 오늘일로 이 드라마 제작사와는 영원히 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만 오늘은 그런 마음이었다.
제작사 대표는 재준이 가고 나자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드라마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계속해서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 매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드라마가 대박이 날 거라는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고서 그와 계약을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계약을 하게 된 거라서 제작사도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걸어주었다. 나름 성공한 계약이 되었다.
* * * * *
그렇게 한류 드라마에 합류하게 되고, 2002년이 되었다.
드라마는 당연히 대박이 나고 우리 미용실은 국내를 넘어서 일본과 동남아까지 진출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재준은 땅을 치고 후회하였다. 대체 왜 자기가 밀린 것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까짓 커피 한잔 때문에 자기가 밀린 것을 안다면 나를 죽이려고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결혼식을 진행하였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결혼을 해야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월드컵은 아내가 된 김설아와 함께 집에서 행복하게 보고 싶었기 때문에 서둘렀다.
딴딴따단.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루었다.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아름답게. 특히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던 가 기자를 감옥에 보내놓고, 회사는 전 세계적인 입지를 마련해 놓고 그렇게 완벽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도 정말 재밌었고, 신혼생활은 말도 못하게 행복했다. 꿈을 꾸는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모든 게 완벽한 몇 달이 지나고 월드컵 시즌이 되었다. 길거리 응원으로 온 도시가 들썩거리던 그때, 우리도 저들과 함께 즐거운 응원을 하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아니 누군가는 예상하고 누군가는 예상하지 못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