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안녕, 설아 씨(1)
“네?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노랑머리가 내 말을 듣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차장에게 반지를 주기 전으로 가서 반지 자체를 주지 못하게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를 막을 수 없어.”
“그렇긴 하지만 나나 형님은 회귀의 반지로 그때로 돌아가면 죽어요. 알잖아요.”
“휴, 그렇지. 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아이가 망가지는 꼴을 어떻게 보냐고.”
이 차장의 말대로 아이가 계속해서 그런 일을 겪게 놔둘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오재훈이 대권을 포기하게 할 수도 없다. 이 차장에게 내줄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이를 주고 간 그분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놔둘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없어요. 다른 누군가가 가야하는데요.”
“그래, 다른 누군가가 가야 하지.”
노랑머리는 첫 회귀 때 학력 때문에 아이로 갔기 때문에 회귀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두 번에 걸쳐서 회귀를 하였기 때문에 그때로 갈 여력이 없다.
“누굴 보내느냐가 관건이네요.”
“그러게, 누가 가서 이 차장을 막아주나.” “준희는 어때요? 준희가 가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준희는 이 차장 덕분에 검사가 되었어. 준희가 이 차장을 대적하는 일은 쉽지 않아. 거기다 그때 나이가 이 차장을 상대할 나이도 아니고.”
“그럼 오재훈이 가야 하겠네요. 오재훈이라면 이 차장을 몰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긴 한데, 오재훈이 가면…….”
오재훈이 가면 자기의 첫사랑인 김설아를 자기의 여자로 만들 것이다. 그게 원래 그 둘의 운명이니까.
“뭐가 걸립니까?”
“그게, 오재훈의 원래 여자가 김설아거든. 그가 가면 내가 김설아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라.”
“네? 아니 뭐 그런 황당한? 진짜에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랑머리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사람을 찾아봐야겠네요. 착하고 나쁜 의도가 없는 그런 사람을요.”
“글쎄.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인줄 알고 보낸 거였는데.”
나는 이 차장이 엄마를 위해 울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죽는 것에 가슴 아파하던 사람이 그런 사람일 줄은 진정 몰랐다. 후에 그가 운 것이 순전히 엄마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그런 선택을 또 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사람이 변하는 거죠. 누구나 잘난 사람이 되면 변하잖아요. 형님 같은 사람이 흔하진 않죠.”
“너도.”
우리는 적어도 변하지는 않았다. 김주원도 변했고, 오아영도 변했다. 그레이스도 변했고, 재준은 더 이상하게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나와 노랑머리, 강상구 정도였다.
“강상구에게 가볼까? 강상구는 변하지 않았고, 거기다 회귀 날짜도 많이 남았잖아.”
“오, 그 사람은 괜찮겠네요.”
노랑머리와 나는 서둘러 강상구에게 찾아갔다.
* * * * *
“어서 오세요!”
“잘 지내셨죠?”
강상구는 나를 반겨주었다. 그는 노랑머리를 알아보고는 크게 놀랐다.
“어? 감독님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저도 회귀자입니다.”
노랑머리가 멋쩍게 웃자, 강상구가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둘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우와, 대체 회귀자가 몇 명인가요?”
“그러게요. 우리도 다 알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모르지 뭐.”
그때, 우리가 만난 장소에 익숙한 인간이 들어왔다. 이 차장이었다. 나와 노랑머리는 이 차장을 보고 황당해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차장은 아주 반갑게 웃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놈의 얼굴을 본 나는 화가 나서 주먹을 쥐었다. 내 주먹이 곧 놈을 향해 뻗어나갈 것을 염려한 노랑머리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일단 릴렉스 하시죠.”
“어! 형님 오셨어요?” “혀, 형님?”
“오 마이 갓.”
“여기들 모여 있었네?”
이 차장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서 강상구를 껴안았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전에 형님이 박준수 씨 오면 꼭 불러달라고 하셨거든요. 회귀자끼리 친하게 지내야한다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강상구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냥 해맑게 웃는 모습이 백치미를 연상케 했다. 어이가 없게도.
“그래, 우리 다들 친하게 지내야지. 안 그래?”
이 차장이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놈을 밀쳤다.
“그만 두시죠.”
순간, 강상구가 놀라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가 실수한건가요?”
그러자 노랑머리가 껄껄대며 웃었다. 그는 나를 꼭 잡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럴수록 놈에게 놀아나는 겁니다. 아시잖아요.” “후, 알았어.”
“그냥 좀 싸웠어. 그래서 내가 불러달라고 한 거야. 화해하려고. 안 그런가, 박준수?”
이 차장이 나를 보며 말하였지만, 나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놈에게 쌍욕을 할 것 같아서 참는 중이었다.
“아 그렇죠. 하하. 같이 잘 지내야죠, 우리.”
노랑머리가 애써 웃고, 강상구도 어색하게 웃었다.
이 차장이 웃다가 노랑머리를 보며 말했다.
“감독님이 박준수 편이구나? 회귀하셨구나?” “아, 그…….”
갑작스러운 말에 노랑머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 해리에게 냉정하셨구나? 진작 말하시지. 그럼 해리 안 보냈었지.”
“아, 그냥 역할이 안 맞아서 그런 거예요.”
“그렇지, 마음이 맞아야 역할도 맞지.”
“그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따로 뵙지요.”
나는 그곳에 더 있기 싫어서 일어났다. 노랑머리도 따라 일어났다.
“제가 눈치도 없이 죄송합니다.”
강상구가 따라 나오면서 사과를 하자, 노랑머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나중에 대포 한 잔 하시죠.”
“그러시죠.”
그렇게 강상구를 포섭하려던 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강상구는 이미 이 차장의 편에 섰기 때문에, 그를 막아서는 일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차장은 정말 대단한 인간이었다. 내가 강상구를 언젠가 찾아갈 것을 미리 알았던 듯 행동하였다. 만만하지 않은 인간, 이 차장을 없애는 일이 정말 힘든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카를 살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노랑머리가 나를 따라 나오면서 말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이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 차장에게 협조할 테니 아이만 죽이지 말라고 하면…….”
나는 화가 나서 노랑머리의 멱살을 쥐었다. 그와 함께 한 수많은 시간동안 멱살을 쥔 건 처음이었다.
“놈은 악마야. 악마에게 세상을 내어주면 어찌되는지 몰라? 너 그런 놈 아니잖아. 어떻게 협조라는 말이 나오냐?”
그러자 노랑머리가 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럼 형님이 결정하셔야죠. 악마에게 세상을 내어주느냐, 아니면 아내를 포기하느냐. 둘 다 얻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노랑머리가 하는 말이 맞다. 이 차장을 없애느냐? 아내를 포기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 * * * *
덜컥.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깊은 밤에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아이들 우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씻고 들어가서 잠을 자려고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아이들 방문을 열었다. 두 아이가 마치 쌍둥이인양 서로를 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쪽. 쪽.
아이들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가려는데 아이가 내 손가락을 잡았다. 그러더니 옆의 다른 아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빠.”
그러자 다른 아이도 따라서 말했다.
“아빠.”
두 아이가 동시에 내게 처음으로 아빠라고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아이들을 안고서 김설아에게 달려갔다.
“여보! 애들이 나보고 아빠래요!”
그러자 막 잠에서 깬 김설아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자다가 나왔음에도 너무 아름다운 김설아.
“아까 비슷한 말을 하긴 했는데. 정말 그랬어요?” “네. 둘이 동시에요!”
그러자 아이들이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같이 아빠라고 했다. 나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좋아요?” “그럼 안 좋아요?”
내가 울면서 웃자, 김설아도 같이 웃어주었다.
정말 행복하다. 너무 행복하다. 이걸 포기해야 한다니. 참을 수 없다. 미칠 것만 같다.
나는 아이들을 내려놓고서 김설아를 버럭 안았다. 김설아는 내게서 술 냄새가 난다며 피했지만, 싫지는 않아 보였다.
“애들 쳐다보는데, 왜 그래요.” “나 이제 당신 없이 못살 것 같은데.”
“나도 그래요. 우리는 천생연분이잖아요.”
그 말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 뜨거운 눈물이 김설아의 어깨에 뚝뚝 떨어졌다. 김설아가 놀라서 나를 보려고 했지만, 나는 그녀를 앉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왜 울어요? 우는 거야?” “아니, 안 울어요. 그냥 좋아서 그래.” “술 많이 먹었어요? 좀만 먹지 그랬어요.” “미안해요. 좀 먹었어요.”
나는 계속 그녀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죽을 때까지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천생연분이 아니니까. 그녀는 원래부터 오재훈의 여자였으니까. 놓아주어야 하는데, 그럴 바엔 그냥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 * *
다음날, 또다시 내 조카가 죽었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또 아이를 죽게 놔둘 수 없다.
오재훈과 준희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결국 두 사람 다 입원을 하였다. 준희의 병실에 갔다가 오재훈의 병실에 갔는데, 오재훈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오재훈이 자게 두고 조용히 병실을 나오려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으악! 살려줘! 살려줘!”
오재훈이 악몽이라도 꾼 듯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일어났다. 나는 얼른 달려가 오재훈의 이마를 짚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괜찮아? 악몽을 꾸었어?” “형님, 내가 죽었어요. 국회의장님 만나러 오페라에 가는데, 가던 길에 건물이 무너져 내려서 죽었어요. 기억이 너무 생생해요. 너무 아팠어.”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회귀하기 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차장이 한 말이 다 맞았다. 회귀로 살아난 사람들이 회귀 전 기억들을 조금씩 떠올린다는 말이 정말이었다.
“꿈이야. 악몽이니 너무 고통스러워 말고.”
그러자 오재훈의 표정이 밝게 바뀌었다.
“휴, 다행이다. 우리 아기가 죽었거든요. 꿈에.”
“후.”
“빨리 우리 아기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병원에 있는 게 너무 답답해서.”
“아기가…… 아기가 죽었잖아.”
“네? 그건 꿈이라면서!!!!!!!!”
오재훈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얼굴로 울부짖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표정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
“아니야. 살려낼 수 있잖아요. 우리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래요? 형님 살려낼 방법 알죠? 꿈에서 형님에게 뭐가 있다고 했어요. 반지인가 뭐가 있으니 돌릴 수 있다고!”
결국 오재훈도 회귀의 반지를 기억해 내었다. 그가 전부 기억해낸다면, 어차피 김설아까지 기억해 낼 것이고, 그땐 원망을 하겠지. 나를…… 준희를.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