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노랑머리는 책임져야지(1)
“내가 시간이 남아서 프랑스어를 좀 배웠거든. 미안하게도 다 알아들었어.”
“아니, 그게.”
오재훈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준희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응을 찬찬히 살펴보던 오재훈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아니, 눈치 채고 있었다.”
“뭐? 뭘요?”
준희는 두려웠다. 운명주의자 오재훈이 자기가 운명이 아닌 것을 안다면 어떻게 나올지 알기 때문이었다.
“너도 나와 같은 거지?” “네?”
하지만 오재훈은 준희의 우려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오재훈은 사실 준희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가끔씩 준희에 대해 알아보곤 했다. 그래서 준희가 서울에 없다는 것.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 등을 알고 있었다. 원래 준희의 인생이 조금씩 달라졌음을 깨닫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준희도 혹시 회귀를 한 것인가? 하고.
“나도 형님한테 회귀의 반지를 받았고, 너도 혹시 반지를 받은 거야? 그게 그렇게도 되는 건가?” “아, 그게.” “아무튼 상관없어. 내 운명 같은 건 내가 바꾸기로 했거든. 더 좋은 쪽으로 바뀐 거라고 생각해. 널 선택한건 운명이 아닌 내 자신의 의지야. 그것은 너에 대한 마음이 운명까지 바꿀 정도라는 뜻이고.”
그러자 준희가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조마조마했던 일들이 가끔 있어서, 조금 힘들었던 준희였다. 그런데 오재훈이 그걸 알고도 준희를 사랑한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던가?
“미안해요. 미리 알려줬어야 했는데.”
“됐어. 알려줬어도 난 널 선택했을 거야.”
준희는 울며 오재훈에게 안겼다. 레스토랑의 직원과 사람들의 눈길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프랑스 요리사는 멀리 떨어져서 둘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준희가 매일 보고 싶다던 그 남자가 바로 저 남자인 것을.
“저 남자라면 내가 양보할 수 있지.”
프랑스 요리사는 사실 준희가 보고 싶어서 서울에 자리 잡았었다. 흔히 말하는 짝사랑 같은 거였다. 하지만 오늘 준희의 모습을 보고 깨끗하게 마음일 비웠다.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준희가 매일 말하던 딱 그 모습이네. 정말 잘 어울려.”
오재훈과 준희는 그렇게 행복한 회귀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더없이 완벽한 회귀생활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고 두 사람이 같이 회귀하기 전의 날짜가 되어갔다.
* * * * *
준수는 준희와 오재훈에게 회귀의 반지를 주고 난 뒤,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김설아와 이별 여행까지 하였고, 그녀를 보낼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보낸 그 시점에서부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잘 회귀한 거겠지.”
따르르릉.
전화가 왔다. 준수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누굴까? 준희인가? 아니면 설마 이 차장인가? 아니면 이 사장인가?
“여보세요.”
“여보! 왜 안 와? 퇴근 시간 안 끝났어요?” “어? 설아 씨??”
“그럼 나지 나 말고 여보라고 할 사람이 또 있어요?”
준수는 설아가 아직도 자신의 아내인 것을 알고 미친 듯이 기뻤다. 오재훈과 준희가 결국 부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희와 오재훈이 회귀하고 지낸 세월들이 준수에게 고대로 전달된 것이 아니니까. 그저 인생이 바뀐 것만 알 뿐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니.
“당장 갈게요. 지금 총알같이 갈게요.”
“술 먹었으면 운전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와요.”
“응, 알았어요!”
준수는 너무 기뻐서 춤을 추며 일어났다. 원래부터 가졌던 인생임에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전부 포기했던 삶이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준수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뭔가 이상했다. 이 차장만 도려 낸 것일까? 아니면 뭐가 더 많이 바뀐 건가? 뭐가 어떻게 바뀌고 달라졌는지 알려면 준희부터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보!”
준수는 김설아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김설아는 준수가 하는 행동이 이상했지만 싫진 않았다. 최근 준수가 보여줬던 모습은 사랑 그 자체였기 때문에,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박준수와 김설아는 이제부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유지할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 더.
* * * * *
다음날, 준수는 눈을 뜨자마자 준희부터 찾아갔다. 준희는 아기를 안고 반가운 얼굴로 준수를 맞아주었다. 오재훈도 변함없이 그 옆에 있었다. 준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둘이 결국 다시 만났구나 하는 생각에 기뻤다.
“정말 다행이다. 너무 고마워.”
준수는 둘이 같이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물론 어제 김설아와 같은 집에서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저 하루하루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 차장은 현재 하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방 법원에서 검사를 하고 있죠. 그는 반지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 할 겁니다.”
“그래, 정말 잘 되었어.” “원래 인생보다는 아주 조금 잘 풀린 셈이지. 검사에서 잘리지도 않았고, 어머니도 아프지 않고, 나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이 차장은 원래 검사에서 잘리지만 오재훈이 구제해 주었다. 그래서 지방 법원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평범하게 지냈다. 이 차장은 원래 아내가 될 사람과는 결혼하지 못했다. 이 차장의 원래 아내는 오재훈이 결혼하고 나서 결혼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쭉 오재훈을 짝사랑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형님의 반지도 중간에 사라졌어요. 회귀하시고 준희가 없애버렸다고 하던데요.”
준수는 조금 놀란 얼굴로 오재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준희도 따라 회귀한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닌가? 그가 그걸 안다면 자기를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던 준희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준희도 회귀한 것을 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준희가 땅 부자던데요?”
“오 그래?”
“흠흠, 나 좀 부자야.”
준수는 그때 반지가 사라졌으니 그 뒤로 회귀한 자들은 전부 없던 일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며, 재준, 노랑머리까지……
“흠, 뭔가 슬픈 일도 있을지 모르겠어.”
“뭐가요?”
“아니야.”
두 사람은 회귀해서 있던 일들을 몇 시간 동안 떠들었다. 준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몇 가지 걸리는 것이 있긴 하지만, 결과는 원하던 대로 되었다. 다행이다.
“재준은 해리랑 연인이던가? 아직도?”
“고재준 말씀이죠? 고재준은 원래 아내랑 헤어지고 3류 배우랑 결혼한 걸로 압니다.”
해리를 탑 여배우로 만들어 준 것은 이 차장의 입김이었다. 헌데 이 차장이 사라지고 없으니, 해리가 탑 여배우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3류 배우라고 하는 거겠지. 재준이 준수에게 미용 분야에서 밀렸고, 그 때문에 회사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재준도 회귀의 반지를 사용하면서 회사가 성장했는데, 그걸 하지 못했으니 그런 것이다. 자본이 크지 않은 재준이 해리를 많이 띄워주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구만. 둘이는 참 질긴 인연이야.”
“그 해리라는 여자가 오빠한테 한동안 치근덕댔잖아.”
“그랬나?”
“형님은 모르는 기억인가보네.”
“응, 뭔가 이상하게 바뀐 것도 많네.”
해리는 원래 바람 상대인 이 차장이 없는 상태에서 회귀의 기억이 났고, 그 기억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박준수에게 마음이 동했었다. 잠깐이었지만 준수에게 들이댄 것은 사실이었다. 그걸 안 재준이 준수를 때리려고 들었는데, 준수가 태권도로 한방에 날려버렸다는 후문이다. 준수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그때, 준수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형님! 오늘 뭐 해요? 나랑 놀아주기로 한거 안 잊었죠?”
노랑머리였다. 그도 회귀하지 않았을 테니, 지금은 박준수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준수에게 가장 아픈 일이었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가? 그래 지금 만나지 뭐.”
“오, 맨날 형수님 만나야한다고 그러더니 웬일입니까?”
“오늘은 온전히 너만을 위해 쓴다 내가.”
“좋습니다! 지금 당장 가죠.”
노랑머리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는 회귀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듯 했다. 감독이 되어 나름 성공했던 그 인생이 사라진 것이 매우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친구 만나러 가는 거야? 노랑머리라고 하는.”
준희는 노랑머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감독이 된 인생도 기억하고 있었다. 준희는 준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그의 인생을 안타까워했다. 자기가 바꾼 것이다 더 그러했다.
“그래, 일단 만나봐야겠어.”
“응, 알겠어. 잘 가.”
“술 드시는 겁니까? 너무 많이 드시진 마시고요.”
“걱정 마. 나 술 세.”
준수는 웃으며 약속장소로 갔다. 마음은 매우 무거운 상태로.
준희도 노랑머리가 잘 되기를 바랬다.
* * * * *
준수는 번화가 호프집에 들어섰다. 노랑머리와 가끔씩 술을 마시던 곳인데 감독이 되어서는 찾지 않았던 곳이다. 감독에서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이곳이 아지트가 되겠네.
“형님, 여기!”
“어.”
노랑머리가 벌써 자리를 잡고 준수가 좋아하는 안주까지 다 시켜놓고 있었다. 그는 준수의 옆에서 아주 좋은 친구로 남아 있었다.
“제주도는 재밌었어요?”
“어, 제주도 좋았지. 나중에 같이 가자고.”
“네? 거기는 여자친구랑 갈 겁니다. 형님이랑 거기 가서 뭔 재미로 있어요?”
“하하, 그런가?”
여자친구라…… 이은미와 결혼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은미 씨는 잘 있지?”
“그럼요. 이제 결혼만 하면 만사형통인데, 그걸 그렇게 싫어하니 원.”
노랑머리는 이은미와 아직도 결혼하지 못한 상태이다. 아버지가 도시락을 싸들고 말리는 중이다. 노랑머리가 전과자이고, 무식하다는 이유로. 그가 다니는 회사가 미용계에서 1등을 달리던 말던 상관없었다. 그 회사가 노랑머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많은 이유가 노랑머리와 이은미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둘이는 장기연애 중이다.
“니가 미용사 말고 다른 걸 하고 있다면 어땠을까?”
노랑머리는 준수의 말에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떼었다가 닫았다. 그가 미용사 말고 다른 걸 원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그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너 영화감독 하고 싶잖아. 안 그래?”
노랑머리는 준수가 자신의 진짜 속내를 알고 있는 것에 놀랐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 하고 싶지? 그렇지?”
“그렇긴 한데.”
“너 내가 이 사장님이랑 방송국 만든 거 잊었어?”
“아…….”
사실은 노랑머리도 그 방송국에 같이 참여하는 것인데, 준희와 오재훈의 회귀로 인생이 뒤바뀌는 바람에 그 자리에 다른 인물이 들어갔다.
“내가 도와줄게. 그니까 가자.”
“어딜?”
“이은미 씨 아버지 만나러!”
“엥?”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