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희망을 위한 찬가 - 현자의 돌(3)
#
정류장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었을 때, 은결은 거대한 아파트 군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아파트 단지가 모여 이루어진 군락이었다. 은결은 쿠로사카가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를 찾기 위해 근처 안내판을 찾아 위치를 살폈다.
그녀는 백천 아파트 113동에 거주하는데, 안내판을 기준으로 상당히 위쪽에 있었다. 은결은 화살표의 방향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한동안 발을 부지런히 놀리던 은결은 북쪽으로 갈수록 아파트의 질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석양빛을 받으며 선명한 음영을 드러내는 콘크리트의 구조물은 위로 갈수록 곧은 선과 깨끗한 채색으로 그 아래를 걷고 있는 사람을 위압했다. 마치 사람의 표정 같은 분위기였다.
‘응?’
아파트의 표정을 살피며 길을 걷던 은결이 걸음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 어린 소년 세 명이 다른 한 소년을 중심에 두고 포위하듯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위압적인 분위기였다. 은결은 혀를 차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며, 소년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대화의 내용이 들려왔다. 분위기에 걸맞게 험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포위당한 소년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으로 번질 것 같았다.
“너희들, 그럼 못쓰지.”
“에, 형은 누구예요?”
세 아이 가운데 리더 격으로 보이는 아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은결을 돌아봤다. 그는 짐짓 진중한 얼굴을 하고 소년을 타일렀다.
“친구 만나러 가던 길인데, 너희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아서 말리러 왔지. 친구들끼리 싸우면 안 돼. 더구나 삼대 일이라니, 남자답지 못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 거짓말쟁이가 또 뻔뻔하게 우리 아파트에 오잖아요.”
우물쭈물 변명하던 소년의 목소리가 뒤로 가며 거칠어졌다. 자신에게 명백한 ‘명분’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포위당해 있던 소년이 목소리를 버럭 높였다.
“너희들 만나러 온 거 아냐! 아는 누나 만나러 온 거야!”
“구라치고 있네! 너 저번에도 이 동네 아파트에 산다고 거짓말하고 우리 노는데 끼어들었잖아. 거지들 사는 아파트에 사는 주제에!”
“이, 이번엔 진짜야!”
“흥, 너 같은 거지새끼랑 누가-”
더 이상 못들어 주겠다 싶었던 은결이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그럼 못써. 선생님이 그런 걸로 친구를 놀리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지 않던?”
“그렇지만 우리 엄마가 아랫동네 아파트에는 나쁜 애들이 많다고 놀지 말랬어요. 그리고 저 새끼 지난번에 거짓말했다가 들통난거 보면 엄마 말이 맞잖아요.”
그러나 은결의 말에 소년은 거침없이 반론하며 포위하고 있던 소년을 비난했다. 그것을 듣고 은결은 말로 환원되기 힘든 질척한 감정의 혼합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계급적 편견을 서슴없이 아이에게 가르치는 부모, 그것을 쉽사리 받아들이는 아이. 편견의 고착. 실현. 현실의 지배-
“씨이-”
듣고 있던 소년이 그 모욕적인 말을 견디기 힘들었던 듯 줄달음질을 치며 이 장소를 빠져나갔다. 붉은 소년의 볼이 석양에 묻어 한결 붉었다.
“또 도망치는 거 봐. 아랫동네 애들하고는 같이 놀면 안 돼.”
그렇지만 그것은 놀리던 소년에게 승리의 표식이었던 모양이다. 소년은 득의만만한 목소리로 확인하듯 말하고는 친구들과 함께 떠나갔다. 멀어지는 작은 소년들의 등을 바라보며, 은결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다.
어쩌면 참견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 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인원도 동료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심지어 죽인다. 아이들의 저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지만 저 어린 아이들이 벌써부터 편을 가르고, 거기에 따라 서로를 구분지어 싸우고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이, 은결은 역시 우울했다.
“...가던 길이나 가자.”
은결은 자기를 달래듯 말하며 백천 아파트를 향해 다시 걸었다. 은결은 과거에 절망하지 않는다. 미래에 한숨 쉴 뿐이다.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있는 덕분에 쿠로사카의 아파트를 발견하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은결은 얼마 있지 않아 14층에 있는 그녀의 집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벨을 눌렀지만 한참동안 반응이 없었다. 은결은 약한 위기감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문고리를 잡아가던 은결이 흠칫, 손을 뒤로 뺐다. 결계의 기운이 느껴졌다.
“쓸데없이 엄중하긴...”
그는 투덜대며 결계를 해제했다. 수행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은결도 어지간한 결계나 진의 역산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금세 문을 보호하던 결계가 해제됐다. 은결은 문을 열었다. 끼익- 긴 철소리가 나며 집안으로 석양의 햇빛이 쏟아지며 어둠을 몰아냈다.
내부의 정경이 드러났다. 방은 그저 방이었다. 너무 단조로워서 100평은 될 것 같이 과장되어 보이는 방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을 대변하듯 아무 것도 없었다. 부엌에 있는 가스 버너하나가 다였다. 아무런 생활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살 생각이 없다는 집주인의 뜻을 이 풍경보다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아마 결코 존재하지 않으리라 싶었다. 그 쓸쓸함과 거절의 분위기는 거실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의 모습과 묘하게 잘 어울려 있었다.
“이런!”
쿠로사카였다. 집에 들어와 쓰러진 이후, 그녀는 쭉 저런 상태였던 모양이다. 은결은 표정을 바꾸고 그녀에게로 다가가 얼른 팔목을 잡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얼굴 표정만큼 기맥이 불안정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상당히 아파보였다.
아무래도 어제 신기를 너무 많이 수용한 탓이리라 싶었다. 그런 막대한 힘을 발휘한 것은 물론 열 번은 죽고도 남았을 상처로부터 회복했다. 아무리 키리야미의 무녀라도 고2의 소녀에게는 지나친 힘임에 틀림없다.
은결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기를 불어넣어 그녀의 기를 다스렸다. 은결은 그녀와는 기의 운용방법이나 질이 현격히 틀리지만 그가 기를 운용하는 방식은 좀 더 기라는 힘의 원리에 가깝기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기를 포용할 수 있다. 그 역은 힘들거나 불가능하다.
“후우-”
겨우 그녀의 기가 잔잔해지고, 은결은 잡고 있던 쿠로사카의 손을 놓았다. 고통에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평안했다. 그는 평안해진 기색의 그녀를 안고, 요와 이불이 개여져 한쪽에 쌓여있는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깔고 그녀를 누였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키리야미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은결은 방을 나서서 휴대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했다. 곧 전화가 연결됐다. 받은 사람은 미래였다.
“아, 미래야. 오늘 아마 늦을 거 같으니까 식사는 시켜 먹도록 해. 미안. 응? 아냐. 친구들 하고 오랜만에 시간 좀 보내려고. 아버지하고 할아버지께도 그렇게 전해줘. 그래. 그럼 밤에 보자.”
그리고 은결은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향했다. 죽이라도 만들어 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싱크대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라면 밖에 나오는 게 없었다. 하기야 밥을 해 먹을 생각이 있었다면 냉장고도 들여놓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은결은 혀를 차고 간단한 음식 재료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단지는 좋은 소비시장이라 가게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은결은 먼 걸음을 하지 않고서도 음식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닭 한 마리, 쌀 약간, 파, 대추, 인삼 약간, 소금, 후추 약간- 은결은 닭죽을 요리할 생각이었다.
재료를 모두 사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은결은 내 죽이려던 애를 뭐가 좋다고 이 짓을 해 가며 보살피는가- 하고 잠깐 회의에 빠져봤다. 그러나 앞으로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으니 은혜를 팔아두는 것은 두고두고 도움이 될 일이었고, 무엇보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은 은결의 성격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미소녀라서 그런 건 아냐.”
은결은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곧 엘리베이터는 14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나선 은결은 쿠로사카의 집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싱크대 앞에서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그의 손길은 유쾌해 보였다.
“흥~ 흥~”
이내 은결은 가볍게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흘러, 은결이 먼저 삶은 닭을 꺼내 잘게 찢어 닭죽에 넣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줄기 은빛 선이 소리도 없이 쭈욱, 은결의 목덜미를 스쳐가며 뻗었다.
"動くな。"
(움직이지 마.)
그리고, 쿠로사카가 말했다. 하지만 은결은 아무런 긴장감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그 은밀한 위협에 대답했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지금의 네게 나를 이길 가능성은 없어.”
닭의 살결을 찢어가는 그의 손놀림에는 아무런 긴장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정말로 ‘자신’하고 있었다. 평소 때의 그녀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가 자신을 상대해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점은 쿠로사카의 상세를 보살피며 명백히 파악했다. 애당초 기술적인 면에서는 은결이 그녀보다 훨씬 우위였다. 단지 기의 총량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 운용 가능한 기의 양이 두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없게 된 지금 쿠로사카에게 승기는 없다. 키리야미를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또 별개겠지만, 현재 쿠로사카의 상태로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리고-
“더구나 이제 너는 나를 적대시할 아무런 이유도 없잖아.”
은결이 말했다. 그 역시 사실이다. 은결이 품고 있는 것은 신의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신이 없는 한,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 지난번 보았듯, 은결은 도리어 그 힘을 신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말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다. 그녀로서는 설령 이길 수 있어도 이겨서는 안 된다.
“그보다, 조금만 기다리면 지금 만들고 있는 음식이 완성되니 그때 이야기하자.”
은결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런 긴장도 없이 차분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쿠로사카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은결은, 자신에게 일본어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를 배려할 생각이 없다는 은결의 선언과 같은 것임을, 동시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배려에 한 번도 의미를 둔 적이 없었는데, 잃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 허전한 방의 공간이 한결 넓어진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쓸모없는 감상이었다. 쿠로사카는 이래서 대화 따위는, 눈빛 따위는, 웃음 따위는 교환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놓친 것은, 없는 것 보다 넓고 슬펐다.
*지난 화 사설은 최장집 선생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적힌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패러디였죠. 한 화만에 간파 당하리라곤!(덜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통사적 분석은 이 책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글이 확장되어 나가면서 다른 많은 책들에 기대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퀴즈 맞추듯 그런 책들 맞춰보는 것도 재밌을지도 모르죠.
*해반전후사의 재인식은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허수열 교수의 개발 없는 개발부터 제대로 정리하고 나서 읽을 생각인데, 미뤄둔 책이 한 두 권이 아닌지라.
*가끔, 별 보람도 없이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사실 잘 팔릴 만한 글이 적고 싶었는데. 음; 이런 때는 힘내는 수밖에 없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