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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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은결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희미한, 이제는 익숙한 자동차 배기가스의 내음이 느껴졌다. 그는 역장을 한 번 더 박차고 한층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강렬한 바람이 불며 은결의 옷깃을 펄럭였다. 그곳에서는 배기가스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발아래의 도시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도천시를 모두 담았다. 빛의 일렁임을 동공에 담고 한 동안 침묵하던 은결이 곤혹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도...”
이미 자정은 넘겼다. 이 시간까지 사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철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은결은 철수하지 않았다. 월요일부터 따지면 이제 나흘째 사념체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틀 정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고, 사흘간 사념체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극히 드물지만 없지는 않았다. 은결이 이 일을 시작한 이후, 손에 꼽을 정도로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흘은 이야기가 다르다. 적어도 도천시의 성립 이후, 그런 일은 이번을 합쳐 두 번 있었을 뿐이고, 먼저 번의 경우는 인위적인 것이었다. 요근래 사념체가 평소보다 강했던 것도 어딘지 마음에 걸렸다.
“우연이면 좋을 텐데...”
은결이 중얼거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은결의 마음 한 구석에서, ‘그럴 리가 없다.’ 하고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결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우울한 마음을 달랠 겸 도천시를 한 번 더 순찰하기로 마음먹고 역장을 박찼다. 멀리 나는 새의 유영처럼 그의 몸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도천시의 1/3 정도를 돌았을 때, 그의 뇌리로 일본어가 들려왔다.
-들려?
쿠로사카였다. 은결은 몸을 멈추고 생각을 집중하며 기를 운행했다. 그 힘은 팔목에 채워진 팔찌로 흘러들어가며 정보로 전환되어 쿠로사카에게로 날아갔다.
-아아, 잘 들려.
-나는 지금 이 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있어.
난데 없는 말이었지만 알아듣기는 힘들지 않았다. 찾아오라는 소리였다. 은결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그녀의 의도에 따랐다. 도천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면 한국에는 단지 본사를 두고 있을 뿐인 글로벌 기업 S의 것이고, 어딘지는 은결도 잘 알고 있다. 지금 눈 아래 펼쳐진 이 높은 콘크리트의 정글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을 찾아가면 되니까. 곧 은결은 그 건물의 옥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을 헬리콥터의 안착장 가운데 쿠로사카가 키리야미를 들고 오연하게 서 있었다.
“여.”
은결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쿠로사카에게 먼저 인사했다. 그녀는 그 인사를 받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했다.
“팔찌는 제대로 작동하는군. 감도도 매우 좋아.”
“다행이군.”
“그리고 오늘 저녁에 도천시를 한 바퀴 돌아봤어. 사념체는 느껴지지 않더군. 내 감각이 옳다면 오늘로서 이 시에 나흘째 사념체가 나타나지 않은거지?”
“응.”
“...그럼 슬슬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지난번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면 말야. 이 정도 규모의 도시에 나흘간 사념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일본에서는 버블시대에도 없었던 일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은결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긍정했고,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고마워.”
“뜬금없이 무슨.”
쿠로사카는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은결의 말은 받았다. 그에 은결은 그냥 웃었다. 그녀가 지난번과 같은 일을 생각해 일부러 이렇게 나온 것이란 사실은 명백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틀림없이 그녀의 역정을 돋울 것이다. 그렇게 웃은 다음 은결을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의 모습이 아름다웠고, 무수한 사람이 어울려 빚어내는 도시의 빛은 뚜렷하게 고독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와 쿠로사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독과 어둠이 강조하는 상대방의 존재감을 느끼며,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쿠로사카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애하고는 잘 지내?”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고, 잠깐 멈칫거림은 보였지만, 이내 그것이 놀이터에서 만나던 소년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쿠로사카는 은결에게 건조하게 답했다.
“가끔 만나서 한국어 연습을 하는 정도일 뿐이야.”
“흐음-”
그런 것 치고는 그 아이와 대화하고 있을 때, 쿠로사카의 표정은 무척 부드러웠다. 고, 은결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의미심장한 비음에, 쿠로사카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은결을 노려봤다.
“불쾌한 감상이군.”
“아니,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핫핫.”
“흥.”
그리고 다시 말이 끊어졌다. 그 침묵이 들어섰다. 오연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침묵과 잘 어울리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강철로 만든 상 처럼 그녀는 굳건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강철이 아니다. 그녀는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은결은 처음 그 소년과 그녀의 관계를 알게 되고 엘리베이터 안에 두 사람만 있게 되었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 그녀는 무어라고 했더라? 그녀는 그 소년과 자신이 비슷하다고 했었다.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다. 당시는 그녀의 반응이 워낙 격정적이라 묻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은결이 그녀를 옆 눈으로 흘깃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쿠로사카, 너 그 아이랑 너랑 비슷하다고 했잖아. 그거, 무슨 뜻이었던거야? 혹시...”
주저주저하며 은결이 물었다. 쿠로사카는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아채고 칼로 베듯 잘라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은결은 다소 안도했다. 하기야 사실은 이렇게 냉랭하지만 평소에 그녀는 붙임성 좋은 미소녀로 주변의 평판이 높다. 어디서라도 그녀가 소외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쿠로사카의 말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처음 이곳에 자취하게 되면서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을 때, 주변에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더군. 음식의 양도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았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도 베란다에 나서면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해서 특별히 목욕이 하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지. 그런 것들이 참 많이 느껴졌지. 그리고 그 아이는 다른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공통점이란, 단지 그 정도 공통점일 뿐이야.”
그녀의 말은 쓸쓸했고, 그 쓸쓸한 말을 들으며 은결은 가슴 한 구먹이 먹먹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 먹먹함이 그녀에 대한 공감이라기 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공감이라는 것은 명백했지만, 그래도 그 먹먹함은 애절하니 그의 가슴에 긴 파장을 남기며 울었다. 그 파장을 따라 은결은 입을 열었다.
“오늘, 아니 이제는 어젠가. 하여간 민성이 점심시간에 펜을 돌리는 걸 나한테 보여주더라. 정말 잘 돌리더라구. 다소 과장을 더하자면 초절기교연습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에 비견 할만 하달까. 그걸 보고, 이 손이 45억 년 만에 만들어진 걸작이라는 걸 오랜만에 다시 느꼈어.”
"흐응. 45억년이 걸린 걸작이라..."
쿠로사카는 다소 조소 섞인 콧소리를 내며 그 말을 받았다. 은결과 마찬가지로 초음속의 세계에 사는 그녀에게 그런 손놀림은 하찮은 잡기이고, 그래서 감탄을 느낄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일반적인 시각이다.
은결은 허공에 발을 대고 올라섰다. 자연스럽게 역장에 형성되어 그의 몸을 받쳤다. 그리고 은결은 달을 향해 길게 손을 뻗어, 그 차가운 광구 안에 자신의 손을 펼쳐 담았다. 달은 차갑게 빛나고, 빛을 받지 못하는 손등은 어두웠다. 푸른 차가움과 먹먹한 어둠의 대비가 선명한 다섯 손가락의 손 모양을 드러냈다. 그것은 수행의 연금체계의 모든 기호가 최종적으로 수렴하는 궁극기호이기도 하다. 은결은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이야. 그건 과장이 아냐. 이 손을 얻기 위해 45억년이 걸렸어. 날카로운 부리. 억센 손톱. 무시무시한 이빨. 두터운 가죽. 굳건한 날개. 빠른 다리. 그렇지만 어떤 종도 인간과 같은 손을 얻을 수 없었어. 그래서 그들은 이성을 얻을 수 없었고, 언어를 얻을 수 없었고, 자유를 얻을 수 없었어. 오직 인간만이, 이성과 언어와 자유를, 이 손을 통해 이룩할 수 있었지."
"언어에, 이성에, 자유라... 다소 비약인걸."
은결은 강하게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 가령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진화사적으로 3만년 밖에 되지 않는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해. 하지만 그 이전에도 200만년 이상 인간은 언어를 사용했지. 당연하잖아.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시작했을 리는 없으니까. 그 전부터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거야. 바로 손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체계 말야.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수화를 본적이 있어? 그들의 손놀림은 놀랍지.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더니 300단어 이상 외울 수 있었다고 해! 그러니까 언어의 시작은 손인거야. 기호란 별게 아냐. 그런 차이를 통해 의미를 담지한 보편적 상징이 이루어진다면 그게 곧 기호야. 그리고 언어란 거대한 기호의 체계이고. 이성이란 그러한 개념의 체계를 통해서만 가능해지지.”
“흐응. 그럴 법 하군. 하지만 거기서 자유까지 이어진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걸.”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솔직히 그녀에게는 은결의 이야기가 그냥 손이라는 기호에 대한 수행의 연금술 체계의 단순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은결은 해맑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을 아니?”
“몰라.”
교양 수준으로 익혀두곤 있지만 그녀는 이세출신이고 본질적으로 서양 철학과 친하지 않다. 관심도 없고. 하지만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인지 은결은 헤헤, 하고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쿠로사카는 은결의 지금 분위기가 어딘가 평소와 다른 것 같다고 느꼈다.
“나도 이게 헤겔 철학에 나오는 이야기란 걸 알게 된 것은 10살이 넘어서의 일이었지. 하지만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훨씬 어렸을 때였어. 그때 아버지는 내게 칸트를 가르쳐 주셨지만 나는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우하고 수단으로서 대하지 말라는 칸트의 말 뜻을 알 수가 없었지. 그러면서 그것이 ‘손바닥’이라는 기호 하나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야. 그것은 터무니없는 말인 것만 같았어. 나는 그 점을 아버지에게 여쭈었지. 그리고 아버지는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줬어. 그건---- 가장 감동적이고 놀라운 동화였지.”
그 말을 들으면서, 쿠로사카는 왜 지금의 은결이 평소와 달리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은결은 뜨겁게 웃고 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어떤 열망을 품고, 그것을 토해내는 것 처럼, 희열을 가슴 속으로 느끼면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은결이 그렇게 웃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닿아 이루어진 은결의 모든 미소는 그녀에게 엷은 상흔을 남겼으니까. 그의 미소는 언제나 아득한 어둠과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충격적이었지만, 진심으로 웃는 은결의 미소가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고, 쿠로사카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은결은 말을 계속했다.
*웃는 게 예쁜 것은 미소녀만이 아닙니다!(다소 위험?)
*모니터로 보던 텍스트를 책으로 옮기면 읽기 훨씬 수월해지는 게 보통입니다. 이 글도 예외는 아니겠죠. 원래 독서는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면서(데카르트 독서법) 해야 제 맛이고. 그런 점에서 유감이긴 합니다만, 출판이 아니 된다면 아니 되는대로 장점이 있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껄껄.
*특별히 특정한 독자층은 고려하고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플롯만 따라 읽어도 좋고, 짜투리 지식을 얻을 목적으로 언급의 일부에만 주목해도 좋고, 전체를 이해해 하나의 체계를 잡아 이해하는 것도 좋고, 그 체계적 이해를 비판적으로 극복, 혹은 발전시키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는 읽는 이가 즐겁게 읽을 수 있다면 읽기의 방법론,(혹은 수준)은 별로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이게 다양한 독자를 끌어들이기보다 모든 독자에게서 외면 받을 수 있는 위험한 방법론이란 건 알지만, 출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해볼만한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수천 명이나 되는 분이 읽어주는걸 보면 실패한 것 같진 않네요.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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