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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95화 (95/300)

#   95-희망을 위한 찬가 - 길가메시와 근친금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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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야미로 사념체를 베자마자, 어둠이 그녀를 잠식했다. 무언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녀의 정신은 그대로 그 어둠에 잡아먹혔다.

-사람들 사이에는 다리(橋)가 없다.

어둠 가운데서, 쿠로사카의 무의식은 그 말을 떠올렸다. 어디서 봤더라? 누구의 말이었더라? 사카구치 안도? 나쓰메 소세키? 아쿠가타와 류노스케? 오에 겐자부로? 다자이 오사무? 쓰쓰이 야스타카? 많은 이름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마음에 끓어오르는 거품과 더불어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결국 출처는 기억나지 않았다. 꿈의 한 장면처럼, 숨결의 단편처럼, 그것들은 쉽사리 흩어졌다.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본질적인 단절을 사이에 두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에 대해 닿을 수 없는 물자체였다. 어떤 정묘한 언어도 그 거리를 무화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고독하고 쓸쓸한 섬, 지나치게 익숙해서 새삼 꺼내는 것이 고루하고 지루한 이야기다. 개인이라는, 그 쓸쓸한 섬-

쓸쓸하다- 는 것은 곧장 어둠과 눈(眼)으로 바뀌었다.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을 배경으로 무수한 눈들이 떠올랐다. 눈과, 눈과, 눈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셀 수 없는 시선들 가운데서, 쿠로사카는 두려움과, 행복과, 공포와, 흥분과, 좌절과, 기쁨과- 그런 많은 감정들을 느꼈다.

오른손의 감촉이 이상하게 민감했다. 한 줄기 스침으로도 멈출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처럼 그녀의 오른손 피부는 빳빳하게 긴장해 있었다. 쿠로사카는 넘치는 감정 가운데서 자신의 오른 손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은 키리야미를 쥐고 있었다. 아름답고, 강력한, 물화된 신의 육체- 어둠 가운데서도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 그러하기에 어둠을 베는 ‘키리야미切り闇’이다.

“쿠로사카!”

멀리서 은결이 외쳤다. 쿠로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옥상에서 허덕이 듯 가슴을 쥐어 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 동작은 곧장 필요한 한 모금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절실했다. 은결은 그녀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녀가 이 아름답고 고결한 검의 정식 후계자로 결정된 것은 그녀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검을 손에 쥐기로 운명 지워졌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녀는 자신이 원해서 이 세상에 난 것이 아님을 명료하게 이해했다. 그럼으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세상이 돌아갈 것임도 명료하게 이해했다. 그녀가 키리야미를 쥐게 된 것은 그런 정도의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그녀에게 무수한 시선을 선사했다. 시선들, 시선들, 시선들. 그 시선들은 언제나 그녀를 평가했다. 키리야미를 쥘 자에게 당연히 집중될 그 시선들.

그녀는 그 시선이 무서웠다. 실수하면 혼났으니까. 아버지는, 어머니는 실망했으니까.

그녀는 그 시선이 즐거웠다. 잘 해내면 칭찬 받았으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기뻐했으니까.

그녀는 자신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정리하는 그 모든 시선들이 좋았고, 싫었다. 그녀는 자신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정리하는 그 모든 시선들을 버릴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타인의 시선을 자신을 우러러 보는 것으로만 만들고 싶었다.

그 소년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그녀의 그 심정은, 그 모든 시선을 노예로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소년? 노예? 뭐였지 그건?

은결은 가벼운 발동작으로 악상에 착지했다. 그리고 쿠로사카에게 다가갔다.

“쿠로사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그리고 빛이 날았다. 은결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그 빛을 피했다. 도심의 빛을 받으며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우러러 보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했다. 이겨야 했다. 그녀는 노력했고, 이겼다. 계속해서 이겼다. 아무도 그녀가 정당한 후계자임을 부정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겼다. 모두가 그녀를 칭찬했고 우러러 봤다.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해 경탄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름답고 현명한 여학생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무의미한 연출이었지만 모두가 그녀를 떠받들었다. 정말로 무의미했지만, 그들의 시선에 무감각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뭇 시선들의 주인이었다. 모든 시선이 그녀의 ‘노예’였다. 그녀는 즐거웠다. 시선만이 두려웠다.

그렇기에, 시선들의 찬탄을 위해 그녀는 자신을 맞췄다. 뛰어난 후계자. 훌륭한 학생. 시선을 노예로 묶어 두기 위해, 그녀는 노예가 되었다. 타인의 시선만이 그녀를 구성했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메슬로는 거짓말쟁이. 시선을 넘어서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은결은 베인 상처를 손으로 훑었다. 흥건한 피가 뜨겁게 만져진다. 그의 시선이 쿠로사카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공황에 빠진 모습으로 키리야미를 쥐고 있다. 은결은 얼굴을 굳혔다.

다시 사람들 사이에는 다리가 없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상한 말이다. 다리의 부재. 간극의 절대성. 그럼에도 타인의 시선만이 두려웠다. 타인의 시선만이 즐거웠다. 넘어설 수 없는 고독에도,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내칠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다.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시지푸스의 신화.

그러니까 메슬로는 거짓말쟁이. 언어는 인간의 본능. 언어는 타인에 대한 예고. 언어만이 이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성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면, 모든 인간에게 타인은 절대적인 조건. 그러므로, 타인의 시선을 넘어선 곳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 유혹은 달콤하다.

은결은 자신의 몸 앞에 강력한 역장 일곱 겹을 겹쳐 복합적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양 손으로 복합 역장을 덧씌웠다. 기회는 한 번이다. 그는 마법진이 떠오른 발을 바닥에 박찼다. 은결의 몸이 쿠로사카를 향해 날았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노예가 주인이, 주인이 노예가 되는 이야기. 타인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언제나 노예이거나, 주인이거나, 어쩔 수 없는 인정투쟁의 굴레 속에 속박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근본조건.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욕망.

그렇지? 다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쿠로사카는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콰앙!

마하를 넘어선 속도로 날아간 은결의 몸이 쿠로사카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커억!”하고 그녀는 입으로 피를 토했다. 은결의 얼굴과 가슴으로 그녀의 피가 묻었다. 은결은 걱정하지 않았다. 키리야미를 들고 있는 그녀라면 몸이 두 동강 나지 않는 한 죽을 리 없다. 그 검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은결은 양손으로 그녀를 꽉 묶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역장으로 그 둘레는 강력하게 봉했다. 쿠로사카가 일본어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움직이기 위해 애썼다. 역장이 삐꺾였다. 키리야미를 해방한 그녀를 봉쇄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은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점차 팔이 벌려 지고 역장이 벌려졌다. 은결이 외쳤다.

“크윽...! 쿠로사카! 정신차려!”

다시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누구나 노예이거나 주인일 수 밖에 없다. 쿠로사카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년은, 그는 다른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무어라고 했더라?

은결이 외쳤지만 쿠로사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자신을 묶는 은결의 팔을 떨쳐내려 했다. 자세히 들었다면 ‘만지지마!’라는 외침인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은결은 다시 악을 쓰며 그녀에게 진정하라고 했다. 쿠로사카는 물론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키리야미를 든 손의 손목을 움직여 은결의 허벅지를 베었다.

“크윽...!”

키리야미의 예리한 날은 은결의 허벅지 피부와 근육을 간단히 자르며 뼈 가까이까지 도달했다. 쿠로사카를 봉쇄하느라 힘을 전면에 집중한 덕에 그 공격을 막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은결은 힘의 일부를 배분해 검을 튕겨내고 상처를 지혈했다. 그러나 이제 당분간 왼쪽 다리는 사용할 수 없다.

“쿠로사카! 진정해!”

은결은 다시 외쳤다. 그러나 쿠로사카는 계속해서 괴로운 듯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햇을 뿐이다. 그러나 놓아줄 수는 없었다. 키리야미를 든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을까? 키리야미를 해방한 그녀의 힘은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은결을 간단히 넘어선다. 쿠로사카는 다시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은결의 어깨를 물었다. 그녀의 이빨이 그의 피부와 살점을 파고 들어갔다. 종래, 와그작, 소리가 나며 쇄골이 박살났다. 은결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 고통을 견뎠다.

그 소년은 뭐라고 했더라? 믿을 수 없이 해맑은 얼굴로 무어라 했더라? 그는 손을 보여 줬다. 다른 무엇도 아닌, 손을 보여 줬다. 그로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라고 쿠로사카는 생각했다.

쿠로사카의 오른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의 손에서 키리야미가 찰캉, 소리는 내며 떨어졌다. 역장을 당장이라도 부술듯 요동치던 힘이 일시에 진정됐다. 쿠로사카가 정신을 차리거나 기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은결의 구속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은결은 키리야미와 떨어진 그녀를 어렵지 않게 구속할 수 있었다. 은결은 기회다 싶어 당장 팔찌를 통해 회선을 열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지금 당장 백천 아파트 113동 1401호로 와 주세요!”

그는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대답을 듣지 않은 채 회선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 발끝으로 키리야미를 차올려 입으로 그 손잡이를 꽉 물고는, 재삼 쿠로사카를 확실하게 구속하고 바닥을 박찼다. 그의 동체가 멀리까지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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