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희망을 위한 찬가 -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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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할인마트의 과일코너에서 은결은 단위에 쌓여 있는 사과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같이 사과를 살피던 미래가 반가운 표정으로 사과를 하나 잡아 은결에게 보여줬다.
"이거 어때?"
알이 적당히 단단하고 크기도 너무 크지 않았다.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은결은 "좋은걸."하고 그 사과를 받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미 그 안에는 수육을 만들 돼지고기니 말린 생선이니 대추니 밤이니 해서 제수 용품으로 들어차 있었다. 미래는 은결에게 자신이 선택한 사과가 인정받으니 뿌듯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이제 뭐 남았어?"
"다 샀어. 떡만 사면 돼."
"아, 이왕 사 가는거 인절미도 사! 꿀에 찍어먹으면 맛있으니까."
"그럴까. 그러고보니 간식거리도 다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니."
"응! 후훗."
그리고 두 사람은 딱을 파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길에 스낵코너를 지나게 되었다. 한데 두 사람이 지나갈 때가 되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뭔가 하고 살펴보니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엄마에게 과자를 사 달라고 조르고 있는 장면이었다. 젊은 엄마는 그 장면에 많이 당혹해 하며 아이를 달래기도, 꾸짖기도 했지만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점차 모여드는데 부담을 느낀 그녀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다. 그러자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씩씩하게 일어나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는 조금 화난 표정으로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그곳에서 떠났다.
"나도 엄마가 있었다면 어릴 때 저렇게 했을까?"
그 모습을 시종 지켜보고 있던 미래가 불현듯 물었다.
"왜, 그리워?"
"에헤헤, 이것저것 해 주는 오빠가 있는 덕분에 그런건 없지만- 그래도 좀 감상적이 되는건 어쩌기 힘든걸. 그렇잖아도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잖아."
그리고 미래는 은결에게 찰싹 붙었다. 은결은 어색한 태도를 보였다. 역시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여동생이니 주변에서 보기엔 별로 좋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큼, 그런가."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땐데, 이번 시험 논술 주제도 무려 '낙태'잖아. 아무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미래가 말했다. 은결은 씁쓸한 감정이 연기처럼 희미하게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러고보니, 시험은 잘 쳤어?"
"응. 오빠 덕분에 괜찮게 넘어갔어. 오빠가 말한 것 처럼 낙태 논쟁을 통해 제도의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고, 그 파악을 내가 문제를 해석한 방식과 연결시킴으로서 법이라는 것 자체도 그러한 해석을 넘어서지 못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주제를 강화했지. 잘했지?"
"음. 잘했어."
은결이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은결의 칭찬에 미래는 "에헤헤-"하고 헤픈 웃음을 흘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고 여기면서, 은결은 흘리는 것 처럼 뒷말을 더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무엇이 '더 옳다.' 라고 정답을 말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말야..."
"그야 그렇지만 역시 오빠가 그때 말해 준 것 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없잖아. 정답 같은 건 무린거 같아."
"그래. 없지."
은결은 미래의 투덜거림을 긍정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태였다. 인간에 대해서도, 생명에 대해서도 인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낙태에 대한 일련의 논의는 정의되어야할 기초가 정의되지 못한 상태에서 정답을 이끌어내려 하는 것과 같다. 수학으로 비교하자면 아무런 공리체계를 세우지 않은채 수학을 성립시키겠다고 설레발치는 꼴과 같다. 확고한 반증도, 확고한 입증도 불가능한 어슴푸레한 새벽같은 문제.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
"없지만... 피할 순 없거든."
은결은 미래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쓸쓸하게 말했다. 그는 다시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미래는 의아한 눈동자를 은결에게 돌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은결은 언제나처럼 희미한 미소로 그 의혹어린 눈길을 막았다. 미래는 불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떡 코너 앞에 도착했다. 은결이 주문했다.
"아주머니-"
은결네 집에서 번잡한 과정을 거쳤던 제사가 끝났다. 그러고나니 달이 중천에 밤이 되었다. 특별히 유교의 제식에 철저하게 따른 것은 아니지만 어느 집안이든 제사라는 행사는 그것만으로 집안의 구성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큰 행사일 수밖에 없다. 은결은 한지 위에 제사음식들을 조금씩 잘라 담은 것을 들고 대문 앞으로 나왔다. 뒤따라 미래가 지방을 들고 나왔다.
은결이 대문 옆에 그 음식이 담긴 한지를 놓아두고는 미래에게서 지방을 받았다. 그리고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지방에 불을 붙였다. 얇은 지방은 금세 타들어가며 그 안에 적힌 한자와 함께 삭아들어갔다. 희미한 연기가 밤의 대기 가운데로 흘어져갔다.
"오빠."
그 모습을 맑은 눈동자에 담으며 그녀가 은결을 불렀다. 은결은 가볍게 '응?'하며 미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 안에서 이미 지방은 모두 타 부서진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엄마는 우리를 지켜봐주고 계시겠지?"
"---"
잠시간 은결은 말문이 막혔다. 은결은 신을 믿지 않는다. 물론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영혼을 믿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는 영혼에 대해 다만 침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할 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하니까. 그것이 인간이 인간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자기 인식일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제사 같은거 안 지낼 꺼 아냐."
미래가 어딘지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은결이 빨른 대답을 돌려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은결은 이러한 제사가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죽은 자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많은 다른 것들 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침묵할 뿐이고, 침묵은 판단해선 안 될 문제다.
은결에게 모든 종류의 제례는 그저 산자를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할 때, 산자를 위해서라는 관점으로 파악할 때도 그러한 죽은자를 위한 모든 제례는 충분히 풍요한 의미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일부러 죽은 자의 세계를, 영혼을, 신을 설정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분열되고, 개개인이 원자화되는 시대에서 제례는 찢어진 이들을 모으고, 잊혀진 것들을 되새기게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돌아올 수 없는 타자를 통해 되돌아보게 한다. 은결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은결은 그 대답을 미래에게 돌릴 수 없었다.
"그래. 지켜보고 계시겠지. 우리 미래가 건강하고 착하게 잘 자라도록. 우리 집이 큰 문제가 없도록 지켜보고 계시겠지."
그래서 은결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미래는 그제서야 불안해 보였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포옥, 작게 한숨을 쉬고 은결에게 말했다.
"있잖아, 오빠. 이번에 낙태에 대해 알아보면서, 비디오를 몇개 봤거든. 그 중에 낙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나와 있던게 있었어. 굉장히, 굉장히-"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듯이 미래는 단어를 반복해 말해 숨결을 고르고서는 겨우 뒷말을 이었다.
"-잔인했어. 분명히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사지가 찢어지고 부서져서, 억지로 죽어서, 하나의 쓰레기처럼 하찮게 취급되잖아. 그거 보면서 막, 울고 싶어지더라."
한국의 한해 낙태 건수는 200만에서 250만에 달한다고 한다. 인구대비 비율로 따질 때 미국의 6배로, 세계 1위다.
"그러냐..."
은결은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눈이 좋은 은결은 어둠 가운데서도 이미 그녀의 눈이 그렁그렁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 읽고 있었다. 미래는 서둘러 소매로 눈가를 훔쳐 다시 평소처럼 발랄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에헤헤, 그거 보면서 나는, 낙태에 대한 규정이어떻게 되어야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세상에 태어난데 대해 어머니에 대해 굉장히 감사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저렇게 슬프게 사라지는 아이들이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데,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는 당신의 건강에도 불구하고 나를 낳아 주셨으니까 말야."
"그래."
"-그런걸 생각하니까, 괜히 엄마가 그리워지더라..."
"녀석."
다시 미래의 머리를 쓰다듬고, 은결은 미래와 함께 잠시간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먼 곳에서 컹컹 짓는 개소리가 들려올때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문에서 집으로 향하는 걸음 가운데, 은결은 미래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메꾸기 힘든 공허가, 스스로에 대한 어떤 의혹과 함께 깊은 슬픔으로 이어졌다.
*한동안 희망을 위한 찬가 연재는 날자에 연연하기 보다 마음이 가는대로 적고자 합니다. 억지로 적으면 글과 논리가 기계적으로 나열될 우려가 있는지라. 즉, 연재가 좀 느려질거란 소리죠...
*서브라임이 이 글의 선작을 넘기는게 빠를지, 이 글의 선작 5000을 넘기는게 빠를지, 개인적으로 꽤 흥미거리입니다. 현 추세라면 서브라임이 이 글의 선작을 넘기는 쪽이 더 빠를 듯 합니다만.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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