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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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과 세연, 두 사람은 슈퍼에 들러 물건을 사고 돌아오고 있었다. 때때로 조용한 도로에서 차들이 지나갔고, 주변의 건물들은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빛살로 사람의 흔적을 어둠 가운데 드러냈다. 두 사람은 주변에 어울리는 안정된 분위기 가운데 간간히 대화를 나누었다. 드문드문 교환되는 대화와 거기 수반되는 미소의 교환이 쑥스러웠다. 은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세연양, 성격이 좀 변한 것 같은 걸요.”
“후후, 변한 같은 게 아니고 변했죠. 누구 덕분에요.”
세연이 은결을 바라보며 선명하게 말했다. ‘누구’를 말할 때, 그녀의 말은 높고 강해서, 그 단어가 담지하기로 약속된 불특정의 개인을 지워버리고, 명료한 화살표를 담아 듣는 이에게 날렸다. 은결은 대답이 궁했다. 말만 궁한 게 아니라 시선도 궁했다. 그는 눈길을 바다 쪽으로 돌렸다.
“으음...”
“여전히, 저 좋아하지 않으시죠?”
돌연, 세연이 물었다. 말은 궁하지 않았다. 하나, 참혹한 답변이 예고되어 있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할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은결은 어렵사리 답했다.
“...예.”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혹한 답에 대처하는 그녀의 태도는 밝았다.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한 것일까?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이 장소에 그녀가 올 리 없었을 테니까. 세연을 다시,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저를 싫어하시지도 않지요?”
“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같은 지점에 향하는 말이지만, 접근의 방향을 바꾸는 것 만으로도 이토록 달라졌다. 은결은 쉽게 답했다. 세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은결을 향해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밖에요. 접근해 주길 기다려서 안 되면, 접근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주인이 있는 우물도 이제는 기꺼이 탈취하고자 나서는 이들로 충만한 세상인데, 주인 없는 땅에서 우물 좀 파다가 삽에 암석 좀 걸렸다고 포기하면 한심하겠죠. 그러려니 제가 변하는 수밖에는 없더라 싶던걸요. 그래서 이를 악 물고, 바꿔봤죠.”
“...그렇습니까.”
은결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은 실망한 얼굴로 은결을 쏘아붙였다.
“아- 재미없는 대답.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용기를 내서 한 말인지 모르겠지요?”
“으음, 죄송합니다.”
“그럼요. 죄송해야지요. 많이많이 죄송하도록 만들어서, 미안해서라도 돌아보도록 할 생각이니까 말이지요.”
장난스럽게 세연이 말했다.
“으음.”
은결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 졌다. 자신의 성격을 생각할 때, 어쩌면 그녀의 계획은 상당히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런 은결의 반응은 모른 채, 세연은 태도를 바꾸고 조신하게 말했다.
“사실은, 지금도 떨려요. 아니, 기차에 탔을 때부터 쭉 떨렸어요. 처음에는 은결 씨 얼굴 보기도 무서웠는걸요. 보자마자 돌아가라고 화부터 내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했었고. 아마 수행 아저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태어나서 가장 용기를 냈었던 일이지 싶어요.”
세연의 말은 절절했다. 푸른 이빨의 말처럼 그녀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지금과 같이 행동하고 있을 뿐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말을 하기 위해 필요했을 결단과 용기와, 그 말을 할 수 있는 이 장소에 이르기까지 그녀에게 필요했던 결단과 용기를 함께 묶어 생각하는 일은 참혹했다. 은결은 가슴 한 구석에 쓰림을 느꼈다. 그는 세연에게 마른 목소리로 조언했다.
“...저는 아마 그럴 만한 가치가 없을 겁니다. 일찍이 말씀드렸듯, 저는 지독하게 재미없는 종류의 인간입니다. 하물며 원하는 대답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세연양은 아름답고 선량합니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이고, 세연양이라면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을 테지요. 생각을 달리 하시길 권합니다.”
진심어린 충고였다. 은결은 자신에 대해 아무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그가 세연에 대해 말하는 것 만큼 정직하다. 세연은 쓸쓸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괜찮아요. 그리고 은결 씨가 재미가 있든 없든, 가치가 있든 없든,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드느냐, 그래서 든다면 이런 수고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이고, 저는 둘 모두에 그렇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은결은 잠깐 멍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허리를 꺾으며 웃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으려는 듯, 은결은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쿠, 쿠쿠쿡.”
“에, 에- 왜, 그러세요?”
세연은 당황하여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다. 방금 자신이 한 이야기가 그렇게나 우스웠던 것일까. 은결은 서둘러 손을 흔들어 그녀의 오해를 막았다.
“아, 아닙니다. 그렇지요. 세연 양의 말 대로입니다. 제 가치는 결국 저 자신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 가치는, 언제나 타자가 담보하는 것일 뿐이었지요. 예.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아는 타자의 찌꺼기 같은 것입니다...”
웃으며 말을 끝맺었지만, 세연은 그의 말이 쓸쓸하다고 느꼈다. 웃고 있지만, 슬퍼하는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그 쓸쓸함을 은결에게 물어볼 수는 없어서, 그녀는 은결에게 마주 웃어 보임으로서 응대했다. 이어 두 사람은 다시 귀로에 올랐다. 한동안 침묵한 걸음이 이어졌고, 멀지 않은 곳,별빛이 보이는 데서, 머쓱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걷던 세연이 주저주저하다가 말했다.
“역시, 여전히 먼 것 같네요.”
“예?”
갑작스럽고 섬뜩한 말이었다. 은결은 놀란 표정으로 세연을 돌아봤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 이면에 정제된 슬픔을 담고 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갑자기 안 좋은 표정 지을 때도 그랬고, 지금 웃는 것도 그렇고... 저로서는 아직 은결 씨와 화제를 공유할 수 없구나 싶어서요.”
“아, 딱히 그럴 생각은...”
은결은 곤혹스런 얼굴로 변명했다. 세연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괜찮아요. 용기를 내어 접근한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니까요. 겨우 출발선에 있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제게 있어 방금 한 말의 강조점은 ‘아직’에 있지 ‘없구나’에 있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 말을 듣고, 아아, 그녀는 정말로 용감하구나. 라고, 은결은 감탄했다. 틀림없이 아직도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내는 것이 무서울 텐데, 세연은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언어로 씩씩하게 말하고 있다. 은결의 얼굴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은결 자신은, 그녀처럼 맑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며, ‘아직’이라고 뚜렷한 목소리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겨우 무정형의 슬픔만이 까마득한 암흑을 배회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별장 앞에 도착했다. 세연은 벨을 눌렀다. 곧 삑- 소리가 나며 철문이 철커덩 열렸다. 세연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은결은 뒤따르지 않았다.
“안 들어가세요?”
세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은결은 평화롭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잠깐, 할 일이 있어서 처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아, 그럼 장 본건 제가 들여다 놓을께요.”
“부탁합니다.”
그리고 세연은 은결의 봉투를 받아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은결은 곧 하늘을 올려다 봤다. 도천시 밤하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별은 드문드문 보일 뿐 보이지 않았다. 절명된 별빛 가운데, 암흑의 존재감은 완강했다. 푸른 이빨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크크큭, 웃기는 새끼. 인간의 게슈탈트적 인식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마는 인식의 특징이 인정투쟁의 욕망과 연결되는 것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것을 자신만은 반성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지껄이면서, 너는 벌써 세연이라는 계집이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정하고 있군. 네 편한 대로, 그녀를 재단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있지.
가슴이 저렸다. 만질 때마다 쓰린 상처처럼, 아팠다. 은결은 눈을 감았다. 그랬다. 결국 은결 자신은 그녀를 자신의 해석의 틀에 맞춰 그녀를 재단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를 타자로 만들었다. 돌아오는 오는 길에 나눈 그녀와의 대화에서 은결은 이 사실을 더욱 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단으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전해오고 있었다. 그녀는 은결의 재단이 포섭하지 못한 아주 중요하고 강력한 개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라는 말이 가슴 속에서는 끓어올랐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수한 ‘그렇지만’이,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튀어 올랐다. 많은 논리와 많은 이야기들이 완고한 필연의 성을 구축해 그것을 정당화 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았다. 인간은 본질적인 해석자임으로. 그러나 마지막으로 은결의 마음에서 일어난 ‘그렇지만’은 다른 모든 ‘그렇지만’을 부정했다. 은결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무수한 변명과 필연적 자기합리화의 선택지를 ‘그렇지만’이라는 접속사로 거절하고, 단지 침묵했다.
자신은 잘못했다. 반성해야 하고, 고쳐야 한다. 남은 것은 그토록 명료한 것이었다. 이 상처가 나을 수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일은 이제 무의미했다. 나을 수 없는 상처라면, 상처를 헤집고 헤집어, 헤집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통을 자각하는 것이, 고통이 없더라도 어설픈 딱지 아래 생살이 썩어들어 만들어진 고름을 채워 넣는 것 보다 낫다고, 은결은 생각했다. 고로 변명하지 않는다. 고로 긍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은결은 폴 발레리의 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뒤샹의 샘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투명성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 불투명성이 풍요히 할 의미의 가지치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별빛을 잃은 세상에서, 삶은 언제나 예술이기보다 비극이었고, 비극이기에 삶은 예술이기를 추구하기보다 비극이기를 극복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그 불투명성을 긍정하게 될 때, 결국 맞이해야 하는 것은 불투명성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몰락해야만 했던 위대한 아버지라는 것을 은결은 잘 알고 있었다.
“......”
은결은 눈을 뜨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푸른 이빨 좋아하는 분들이 많군요. 지석님의 추천에 감사를~
*성원 하니 원성이 나오고, 댓글 하니, 댓글이 나오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그래도 응원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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