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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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높고 모래알은 반짝였다. 오늘 아침도 은결이 만들어준 밥을 맛있게 먹고-맛있게 먹은 주제에 표정이 좋지 않았던 사람이 둘-다들 해변에 나와 있었다. 여름 초장부터 놀러 온 고등학생만의 그룹이라는 것만 해도 충분히 주변의 눈길을 끌만한 요소였지만, 다른 무엇보다 일행은 눈에 띄게 만든 것은 그 구성원 가운데 포함된 경이적인 수준의 미소녀였고, 오늘 새로 포함 된 한 소녀 덕분에 해변가에 나온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부러움과 증오와, 행복감이 뒤섞인 경악을 느껴야 했다. 미래는 성장이 부족하고, 쿠로사카는 늘 윗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결 더 그러했다.
“어디서 만났냐?”
늑대가,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은결 곁으로 와서 추근거렸다. 그의 근처로 고릴라, 여우가 민성과 함께 흥미진진한 얼굴로 귀를 돋우고 있었다. 은결은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리어 늦은 심문이었다. 어제 별장으로 돌아온 쿠로사카가 저기압이 아니었다면 밤에 이미 치루었어야 할 신고식이다.
“만개산.”
“어쩌다가?”
“세연양이 산을 내려오다가 발이 삐어서 도와준게 계기가 됐지.”
“그걸로 끝이 아닐텐데.”
의심어린 눈초리로, 늑대가 물었다. 은결의 답은 간단했다.
“응.”
“!!!”
일동의 얼굴로 긴장이 스쳤다. 그들은 은결에게 한층 가가이 접근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은결은 잠깐 거북한 얼굴을 했다가 설명했다.
“알고 보니, 세연 양 집안이 우리집하고 친하더라고. 할아버지끼리는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아버지는 세연 오빠의 대학교 선배이고, 세연 양 아버님과 이럭저럭 면식도 있었다고 하니까. 그러니 자연히 알고 지내게 됐지.”
모두의 얼굴에서 김이 빠졌다. 민성이 버럭, 끼어들며 물었다.
“으음, 석연치 않은데, 겨우 그 정도로 세연양이 너한테 저렇게 친하게 굴 리가 없잖아! 진실을 밝혀라!”
“그게 다야.”
은결의 답은 방금 전 그러했던 것 처럼 짧고 담백했다. 일동은 납득할 수 없었다. 특히 민성과 여우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가운데서 아무래도 은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맞아죽어 싼)남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민성이 서늘한 목소리로 협박했다.
“-또 바닷물이 먹고 싶냐? 요즘은 오염이 심해서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다.”
“아, 진짜라니까 그러네.”
은결은 짜증스럽게 답을 반복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계속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은결을 심문하는 일동은 머리를 맞대고 잠깐 수근 거렸다. 이놈들이 무슨 간신배 역적모의를 하고 있나, 하는 얼굴로 그 꼴을 바라보던 은결은 이내 긴장한 얼굴의 고릴라를 맞이해야 했다. 그 얼굴에 걸맞게, 고릴라는 가장 핵심적이고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크흠, 그러면 마지막 질문. 너와 세연 양은, 어, 어떤 사이?!!!”
“친구사이.”
아무런 혐의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일체의 동요도 없는 모습으로, 은결은 답했다. 정말 동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전략적 대처였다. 고릴라가 의심스런 눈길로 답변을 확인했다.
“...진짜?”
“진짜.”
은결이 답을 확인했다. 민성이 냅다 해변가로 뛰쳐나가더니 "세연양!"하고 큰 목소리로 물렀다. 은결은 섬뜩함을 느꼈다. 곧 세연이 일동이 있는 쪽으로 왔다. "무슨 일이신가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꽃을 인쇄한 새해얀 수영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민성은 눈둘 곳을 못 찾아 얼굴을 붉힌 채 으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물었다.
“저기, 세연 양, 은결과는 어떤 사이입니까?”
“지금은 친구요.”
‘지금은’이 무척 강조되어 있는 답변이었다. 그 강조가 너무 지나쳐서, 현재가 그녀에게 바뀌어야 하는 불만스런 상태임을 드러냈고, 그 드러냄이 암시하는 사태는 명료해서, 은결의 얼굴이 거멓게 죽었다. 반대로, 그녀의 말을 듣던 남정네 일동은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마, 예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입술 끝으로 햇살을 마주 튕겨내는 것 처럼 웃으며, 세연은 답했다. 간략화 하자면, 확인 사살이었다. 심문하던 자도, 심문받던 자도 충격에 굳었다. 얼마 있지 않아 고릴라의 우렁찬 “돌격!”소리가, 남자애를 들어 맨 세 남자가 달리며 외치는 “우오오!”소리와 함께 위맹하게 울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세연은 혀를 베- 하고 내밀어 보였다. 어제도 차인 복수였다.
“...응?”
갑작스레 느껴진 강렬한 시선에 세연은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시선을 느낀다는 것은 흔히 착각이기 쉬웠지만, 그녀는 요즘 이런 종류의 감이 잘 맞아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스스로도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고 무서운 것을 봤다.
“...아, 안녕.”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든 미래의 시선이었다. 세연의 호의적이고 어설픈 미소에도 그 눈꼬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흥.”
한편, 멀지 않은 곳의 암석 위에 앉아 사건의 시종을 살펴보던 쿠로사카는, 은결이 물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쿠로사카는 별장을 빠져 나왔다. 밤의 바다는 적막이 파도소리를 강조했다. 리듬감을 가진 파도 소리는 아늑한 음악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소리만 듣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닮은 규칙적인 걸음을 걸어, 쿠로사카는 은결이 서 있는 곳 까지 다가갔다. 그는 언제나처럼 먼 곳을 바라보고, 슬픈 눈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유와 슬픔은 떨어진 개념일텐데, 은결에게 올 때, 사유와 슬픔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뒤엉켜 있었다. 쿠로사카는 심술궂게 말했다.
“표정이 이상하군. 좀 더 밝을 거라 생각했는데.”
“특별히 좋은 일은 없었는데.”
“그럴 리가. 일부러 그런 예쁜 사람이 여기까지 널 찾아와 주기까지 했는데.”
은결의 얼굴이 더 슬퍼졌다. 그의 표정을 보고 쿠로사카는 약간의 당혹감과, 약간의 기쁨을 함께 느꼈고, 다시 자신이 기뻐했다는데 상당한 당혹감을 느끼고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은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은결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그녀가 와준 덕분에 나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까.”
“돌아보다니?”
조금 입안이 건조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쿠로사카는 되물었다. 그녀는 자기 입안의 건조함을 일반적으로 ‘초조함’이라고 이름 붙인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은결은 여전히 슬픈 얼굴로 답했다.
“자기가 얼마나 찌질한지 알 수 있었다는 거야.”
“흥.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군. 이제야 그걸 알다니.”
피어올랐던 기쁨이 금세 노기로 전환되어, 쿠로사카는 다시 한 번 심술궂게 답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누어주었던 자신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뿐인 소녀와의 짧은 대면 가운데 ‘각성’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불쾌했다.
“그러게 말야...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같아...”
쏘아주고자 감정적으로 한 말에 은결이 진지하게 답해오자 쿠로사카는 되돌릴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도를 보아하니 꽤 심각한 일이었던 것 같았다. 말을 끝낸 은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단정한 옆얼굴의 선이 처연한 미소와 기묘하게 어우러져 파도소리의 리듬을 닮은 슬픔을 느끼게 했다. 쿠로사카는 목덜미까지 어떤 말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손을 들어올렸다. 은결에게, 무언가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체 언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은결이 외쳤다. 그의 시선은 당황하여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쿠로사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기 당혹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사이, 두 사람은 신의 손길에 들려 다른 세계로 날려 보내진 것처럼, 이질적인 공간 가운데 있었다. 거리의 한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색채의 농담이 사방을 채우고서는 알록달록 하게 펼쳐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대지 역시 그 기묘한 색채의 향연에 빨려들어 간 것 처럼 바닥을 알 수 없는 빛만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허수공간 따위의 전혀 새로운 차원은 아니었다. 발에 닿은 대지의 선명한 감촉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여전히 강릉시의 청해도의 해변일 것이다. 은결이 어두운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異)차원의 존재론적 특성을 결계로 구현해 현상계에 겹친 건가?”
비용과 수고의 문제로 이제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불가능한 작업은 아니다. 최면을 비롯해 보조 술법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지 않던 시절, 강력한 사념체나 괴물과 싸우기 위해 펼쳐지곤 했다고 한다. 민간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다. 구분하자면 초고도의 차단 결계술이었다. 일정 공간 내 운동에너의 확산을 억제하는 기술이 성립한 이후로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 대규모 작업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우리 곁에서 한다는 것은, 더구나 그 발동이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신속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아무론 전조(前兆)도 없었단 말야!”
쿠로사카는 비명처럼 반박했다. 은결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한국에서는 한 번 있었어. 같은건 아니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한 것으로 말야. 더구나 이미 우리는 그런 터무니없는 현상 가운데 있어. 그러니 작업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은 무의미해. 중요한 것은 이런 복잡한 작업으로 우리를 격리하는 목적이지.”
“-그건, 간단합니다. 불쾌하고 천한 귀신을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서이죠. 미스터 박.”
어색한 음악을 노래하는 것 같은 특이한 억양의 한국어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석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아직 찌질대며 공부하는 학생을 너무 띄워주면 공부를 안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장래 그렇게 되라는 말로만 알아듣도록 하겠습니다. ㅋ~
*응원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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