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희망을 위한 찬가 - 아웃사이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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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역에서 멈췄다. 사람들이 내렸다. 디지털의 신호 소리와 건조한 예절로 포장된 안내원의 소리가 역을 길게 오간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은결 일행도 내렸다. 긴 기차시간은 아니었지만, 적적한 흔들림 가운데 몸을 싣자면 졸음이 쏟아지기 마련이니까.
“자, 그럼 다들 잘 놀았고, 여기서 헤어지자. 다들 잘 가봐.”
은결은 역 앞에서 말했다. 동물원 삼총사와 민성은 하품을 하며 은결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일행은 그간 폭발한 기력만큼 뒤이어 몰려온 피로에 햇볕에 쩔은 해파리처럼 비실거리며 옹기종기 짝을 이뤄 헤어졌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에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른 아지랑이는 빛을 굴절시키며 현상을 기묘하게 어그러뜨린다. 인식의 한계를 이야기 하듯, 현상의 한계를 이야기하듯.
일행과 헤어져 역 앞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있던 세연은 지루한 낮으로 시계를 바라봤다. 오빠가 데리러 오기로 약속한 시간에서 20분 정도가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들 함께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라도 가서 점심을 먹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은결의 눈물을 보고 난 뒤에는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은결은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곧 평소의 신색을 회복하며 웃음을 보여주었지만, 그 눈물과 그 웃음 사이의 벌어져 있었어야 할 간격이 너무 짧아서, 그의 웃음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사막처럼 퍼석퍼석하게 메말라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메마름은 은결의 표정 이면에 감춰진 덩어리들을 필연적으로 연상하게 했고, 그 연상의 연속에서 그녀는 은결에게 가벼운 얼굴로 그런 간단한 점심에 대한 유혹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역시 한 마디 건네 보았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 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쿠로사칸가 하는 그 여자아이는 자리를 바꾼 뒤로 줄곧 은결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했었고, 돌아가는 길에도 함께였는데. 아쉬움이 나무그늘 아래 바람을 타고 실려 오듯 파고든다.
역시 성격은 관성과 같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한 순간 힘을 내어서 힘차게 나가보아도, 그전까지 쭉 지속되어 오던 습관 같은 판단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런 습관들이 모이고모여서, 힘차게 일구어낸 성격의 한 돌출을 무마시킨다. 힘내고 힘내어, 그런 관성들을 하나하나 모두 깨뜨릴 때, 지금과 전혀 다른 자신이 가능하리라 여겨졌다. 그렇지만 문득, 사람의 본성은, 나아가서 세계의 본성은 그런게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던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어렴풋한 기억의 심해에서, 수면 아래 약간 밑에서 떠오를락 말락 부유하는 부표물 같은 기억이었다. 쑥스럽고, 약간은 무섭고, 두렵기도 한, 이상한 감정들이 달라붙어 형성되어 있었다. 살짝 웃으며 세연은 그런 생각을 했다가, 표정을 확 변화시켰다. 불쾌와 요염이 한 자리에 엉켜, 끈적한 점액의 덩어리가 되어 뭉쳐있는 듯한, 그런 분위기가,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세연은 타인의 몸을 살피는 것 처럼 자신의 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칫, 역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군. 씨불퉁할 게송 같으니."
그, 혹은 그녀, 혹은 무엇. 어쨌든 지금의 세연은 푸른 이빨이었다. 침잠하고 있던 그는 세연이 육조의 게송을 다시 떠올리려는데 자극받아 깨어났다. 막 깨어난 그의 심기는 무척 불편해 보였다. 그는 태양을 노려봤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동공이 심한 상처를 입었을 시간동안, 그는 눈썹을 좁히지도 않고 태양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들어 쫙 편 손으로 그 태양을 가렸다. 그 손에서 빛이 작열했다. 태양보다 밝은 빛이었다. 태양보다 무서운 소리였다. 다만 주변에서 그 소리와 빛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
“젠장. 이게 아냐... 예상한 것은 반의 반조차 되지 않는군. 그렇게 시시한 놈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이것 밖에 남지 않다니, 어째 서지?”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리며 푸른 이빨은 중얼거렸다. 분명히 이 계집의 몸안에 들어왔던 카미인지 나발인지를 잡아먹었는데, 깨어나보니 남아있는 힘은 기대한 것에 너무도 미치지 못했다. 대부분의 힘이 어디론가 소실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실의 징후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푸른 이빨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행이던가하는, 씹창꼬맹이의 아비라는, 그 괴물같은 인간이라면 어쩌면 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군. 다음에는 이걸로 간단하나마 그 튀겨죽일 꼬맹이의 몸을 빼앗는 시도라도 볼까...”
-빵빵.
소리가 현실을 엄습했다. 세연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스포츠가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운전석에는 그녀의 오빠가 타고 있었다. 세연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 차의 옆에 탔다. 스포츠카는 부드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도로 위로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하게 세연에게 물었다.
“찼냐?”
“무슨 오빠는...”
“아, 차야 된다니까! 네가 뭐가 부족해서 차여!”
진경을 버러버럭 화내며 동생을 채근했고, 세연은 뚱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별로 그럴 생각으로 이 바캉스에 참여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차는 역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세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찰칵찰칵 흘러간다.
은결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했다?’ 그럴 리가. ‘했다’라는 말은 주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불현듯 떠올랐다. 자신의 어떤 의지도 거기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주체없는 생각이었다. 현상을 부정하는 무의식 같은 것이었다. 은결은 불쾌하게 미간을 짓누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놓여진 것은 아스팔트이고, 횡단보도다. 지금 자기는 신호등의 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는 습기로 충만했다. 방금 전 소나기가 내렸기 때문이다. 소나기가 그친 지금, 달아올랐던 아스팔트의 열기가 그 쏟아져내린 물줄기를 다시 하늘로 올려보내며, 불쾌한 뜨거움을 피워 올리고 있다.
“......”
은결은 소나기를 싫어했다. 소나기의 시원함이 소나기의 불쾌함으로 곧장 이어지는 까닭이다. 소나기가 그친 도시는 다른 때보다 한결 추악했다. 평소의 마른 대지에서 느낄 수 없는 아스팔트의 냄새가 기화되는 수증기를 타고 오르며 흡입되는 감촉이 싫었다. 오밀조밀한 바닥의 한 틈새 틈새에 숨겨져 있던 그들 냄새가 망둥이가 바닥을 치듯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불쾌한 전모를 드러내는 것이 싫었다. 다음 순간, 은결은 자기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당혹감을 느꼈다.
‘확실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한... 건 아니었는데.’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 변해버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요즘 주변의 사물들이 한층 민감하게 느껴졌다. 사물을 민감하게 느낀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교감은 성장으로 바뀌기 쉽다. 기호는 의미이고, 의미는 의지로 이루어지기에, 의지와 연결되는 민감함은 나쁜 것이라 잘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민감함이 지금처럼 새로운 어둠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캉스- 때문인가.’
떠오르는 원인이라면 그 외에 달리 없었다. 어제 끝내고 돌아온 바캉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현자의 돌의 기본 술식과 동화함으로서 아담의 언어를 극복해냈다는 정도는 들었다. 물론 그 단순한 설명에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몇 가지 난점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설명이 불가능한 이상 그 설명을 긍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후, 모르겠군. 내가 무슨 로깡탱도 아니고.’
씁쓰름한 생각의 뒷말을 훑어 내 버리기 위해, 은결은 입안에서 혀를 차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로깡탱은 사르트르의 문학작품 ‘구토’의 주인공이다. 문득, 입안의 감촉이 새로웠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부서졌던 어금니는 모두 나 있었다. 은결은 다시 당혹감을 느꼈다.
사념체가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그 뒤를 한 그림자가 여유롭게 쫒는다. 높고 낮은 포물선 운동을 지속하며 사념체를 뒤를 쫒는 그림자의 선은 날렵하고 아름다웠다. 출렁이는 검은 머리칼은 밤에 녹아들며, 간간히 불빛을 반사해 그 아름다움을 한결 더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검면에 반사되는 도시의 불빛이 때때로 반짝이며 발하는 빛의 율동이 거기 조화되며 한결 아름답다. 그녀는 쿠로사카다.
-은결! 몰았어!
-고마워!
염으로 대화를 전하자 마다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반대 측면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하늘 위를 달리는 것 처럼, 그리고 총일이 뛰쳐나가는 것 처럼 빨리 등장했다. 사념체는 정지했고, 하늘로 올라 피하려고 했지만, 그 검은색 무정형의 덩어리가 피하기에 갑자기 등장한 그림자는 너무 빠르고 강했다.
은결의 운동에너지를 감당할 축이 되어준 역장으로 인해 허공의 한 부분이 희게 빛났고, 다음 순간, 공간 전체로 꿍! 하는 떨림 비슷한 소리가 나며 사념체가 뒤로 떨어져 나갔다. 그것을 보고 쿠로사카는 불쾌한 얼굴을 했다. 은결의 실력을 볼 때, 이러한 반응은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결의 실력을 생각할 때, 정상적이라면 이런 정도의 사념체는 그대로 해체되어버렸어야 한다.
-어떻게 된 거야?
-미, 미안.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고, 은결은 실수를 만회하는 듯, 한층 힘차게 역장을 밟으며 사념체를 쫒았다. 위맹한 모습이지만 쿠로사카는 단지 위맹하게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썹은 여전히 불편하게 꺽여진 상태였고, 키리야미를 잡은 손은 만일을 대비해 굳건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은결의 빠른 달리기에는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불안정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기우였다. 은결은 한 번 실수를 두 번으로 이어가지 않고 허공에 역장을 형성시켜 그것을 축으로 막대한 운동에너지를 모아 확실하게 일격을 먹여 사념체를 소멸시켰다. 진동같은 떨림이 공간을 넘어 파장처럼 퍼졌고, 사념체는 연기가 흩어지는 것 처럼 흩어졌다. 쿠로사카는 간단히 불평 한 마디 던지면서 수고했다고 말해줄 겸 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은결은 그녀의 접근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대지에 섰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처럼 위태로운 기색으로 근처의 전신주를 잡고 밤중의 수많은 취객들이 그러하듯 토악질을 시작했다.
*추천해 주신 silverlion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추천 내용에 살짝 오류가 있는데, 수행은 시기와 질투로 지금처럼 된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가 문제였다면 주체와 진리와 해석과 언어와 권력에 대한 은결의 고민은 훨씬 간단한 것이 되었겠지요.
*서브라임은 내주 경 발매될 예정입니다. 그간 열심히 적었으니 출판하고 나면 좀 여유가 생길까요? 성원을 합시다. 그나마라도 있어야 힘을 내지요. 흑흑.
*남겨진 아이 2부는 쓰지 않을 건 아니지만, 출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글을 둘이나 벌여놓을 수 있을 만큼 제 형편이 좋은 게 아닙니다. 공부할 것도 산처럼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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