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희망을 위한 찬가 - 아웃사이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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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단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마저 허락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은결은 눈을 떴다. 노을이 창가로 스며드는 시간이다. 집안일을 끝내고 나서 소파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곧장 시야로 들어서는 것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즉각적인 판단이 이어지다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미래였다. 하지만 미래인가? 은결의 시계 내에서 그녀를 미래로 만드는 판단들이 망설이듯 다가오지 못했다가 겨우 들어섰다. 의미로 조직되지 않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현실은 진실이 아니다. 그녀는 부채를 팔락팔락 부쳐 더위를 식히며 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결은 입을 열었다.
“...미래 왔어?”
“응. 좀 됐어. 방학숙제를 위해 시립미술관에 다녀왔지. 오빠야 말로 오후에 운동이라도 많이 했나봐? 이때까지 낮잠을 자게?”
오른쪽 손가락으로 V모양을 그려 보이며 미래는 자랑스레 말했다. 뭐 뻐길 만한 일이라고 그러는지 몰라도(미래는 방학초반에 숙제를 해결하는 자신의 부지런함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은결은 그녀의 하는 모양새가 귀여워서 빙그레 웃어줬다.
“음, 좀 피곤한 건 사실이야.”
“그럼 좀 쉬어!”
은결의 대답을 듣고 미래는 반사적으로 요구했다. 요 며칠 은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은결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의 오빠가 때때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요즘은 그것이 너무 잦다.
“우리 집 공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할까.”
은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밖에 나가서 설치다간 무시무시한 아가씨에게 많이 얻어맞게 될 것이다. 화난 쿠로사카는 무섭다. 사실, 화 안 나도 무섭다. 나중에 교신이나 시도해 볼까, 그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를 생각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어딘지 위태롭다는 것은 스스로도 느끼는 사항이기도 했다. 미래는 돌아온 대답에 눈을 반짝이며 이어서 요구했다.
“그리고 미래랑 놀아줘! 놀러 갔다 와서 좀 소원했잖아.”
“...음, 뭐 그것도 좋겠지.”
며칠 됐다고 무려 ‘소원’이란 단어를 꺼내는지 의문스럽긴 했지만 오늘 순찰을 쿠로사카가 전담하기로 한 이상 시간도 많이 비고, 오랜만에 미래랑 둘이서 놀아보는 것도 괜찮지 싶었다. 다행히 지금의 세계는 일그러져 보이지 않았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식사시간이다. 다른 반찬도 다 좋았지만 특히 은결이 직접 만든 오이냉채가 무척 시원하고 맛있었다. 장사에 나선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족들은 만족스럽게 저녁을 먹었고, 그 만족은 곧장 식탁 위의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수행이 웃으며 미래에게 물었다.
“...그래서, 미술관은 재밌었니?”
“뭐 신기한 그림은 많이 있었어요. 사실 뭔지 잘 모르겠다 싶은 그림들이 많긴 했지만, 그럭저럭 재밌었던 거 같아요.”
“하하, 현대 미술은 감상자에게 공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때때로 그들은 작품은 중요하지 않고 작품에 담겨야 하는 개념, 혹은 그것이 놓이는 위치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도 한단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나는 예술가다’라고 적힌 글을 몸에 붙이고 다니면서 그 자체가 예술행위라고 말하기도 한단다.”
“에- 그거 순 엉터리 아녜요? 그러면 순 꿈보다 해몽이잖아요.”
“유인원 데려다 마음대로 그리도록 한 그림이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는 넌센스가 연출되기도 하는 세계인 것을 보면 엉터리로 빠질 우려가 큰 방법이긴 하지. 그래도 기존의 근대적 예술이 지니고 있던 한계, 창작하는 예술가와 감상하는 감상자라는 주객의 엄격한 분리를 극복하는 효과를 지니기도 한단다. 그런 예술들은 감상자에게 ‘해석’이라는 작업을 요구하니까. 이때 예술은 직관적인 감상의 대상이 아닌, 고된 사유의 노동을 통해서만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지.”
잠간 은결의 손동작이 멈췄다. 노동. 노동. 은결은 아버지가 말하는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며 가슴이 시큰해졌다. 양손이 근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수행은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해석을 강조하는 것은 창작의 영역에 감상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일 수도 있는 것이지. 그래서 그때 작품 이해에 있어서의 ‘오해’는 저주라기보다 축복으로 전화할 가능성을 품게 되지. 어차피 점이 신뢰할 수 없는 ‘거짓말의 집합’인 이상, 차라리 해몽을 통해 삶을 풍요하게 한다는 것은 중요한 전회의 한 방식일 수도 있지 않겠니.”
그 말을 듣고 이어서 은결은 바캉스 때 받았던 수행의 메모를 떠올렸다. ‘폴 발레리를 기억하렴.’ 가슴 한 구석을 타오르게 하는 문장이었다. 해석. 그것은 불투명성 위에서 성립하는 작업. 예술은 불투명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아담의 언어가 우리의 운명일 때, 삶은 많은 것을 잃어버릴 공포도 함께 품고 있다. 의미와 의미가 즉각적으로 연결된다면, 그 곳에는 타자가 없다. 타자 없는 세상- 그것은... 입안에 들어서는 오이냉채의 맛이 혀 위에서 껄끄럽게 분리된다. 기름 층을 통해 분리된 두 물의 층위처럼, 혀 위의 건조함이 기묘한 공백을 사이로 두고 씻어지지 않는다.
“음, 잘 모르겠어요.”
상큼한 표정으로 미래는 말했다. 수행은 딸의 대답에 자상하게 웃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그런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단다. 나머지는 천천히 채워나가도 늦지 않는 법이지. 의외로 세상에는 조급해야 할 일은 얼마 없단다.”
“그럼 그렇게 할께요. 후훗.”
미래는 보기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그녀는 미술 감상문 쓸 ‘꺼리’를 얻었다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독서가를 가족으로 두면 이런 데서 의외의 소득이 있는 법이다.
저녁을 먹고, 은결은 미래와 게임을 했다. 그녀는 친구네서 게임기를 빌려온 터였다. 그녀는 은결과는 달리 인맥이 다양해서 이런 물건을 빌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소프트도 몇 가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슈팅이나 격투게임 등이었다. 협력, 대전 등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포진이었다.
“아, 나 오빠랑 안 해!”
미래는 빌려온(!) 패드를 위험하게 바닥으로 내던지면서 신경질적으로 등을 뒤로 물렸다. 적당한 크기의 텔레비전 브라운관에는 폴리곤으로 정밀하게 구성된 캐릭터 하나가 자세를 잡으며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바닥에 쓰러진 캐릭터가 있었다. 패배한 캐릭터가 바로 미래의 것이었다. 이번으로 10연패였다. 미래로서는 짜증이 날 밖에. 은결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 공격이 단순하니까 계속 지는 거야. 뻔히 읽혀서야 이길 게임도 못 이기는 법이지.”
“에, 뻔히 읽혀?”
“그럼.”
그리고 은결은 그간 게임을 하며 발견한 미래의 버릇을 자세하게 가르쳐줬다. 은결의 이야기가 이어 질수록 미래의 표정이 점차 변했고, 이야기가 종극에 달했을 때, 그녀는 감탄한 표정으로 은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을 받으면서 은결은 쑥스럽게 말했다.
“게임의 논리와 상대의 논리를 조금만 숙지해도 이런 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법이야. 규칙을 이해하면 표면의 현상에서 이면의 정답을 해석해 낼 수 있는 법이니까.”
“쳇, 말이야 쉽다.”
“하긴. 말이 쉽지.”
“아아- 아빠는 저녁 식사 때 해석에 정답이 어딨냐고 했는데.”
오빠의 능력에 감탄은 했지만, 그래도 진건 진 것인지라 미래는 불평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은결은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나는 아버지의 메모에 대해 어떻게 대답했더라? 은결은 자신의 답을 떠올렸다. 은결은 수행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해석이 일률적으로 열려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아버지는 예술의 영역에서 해석을 이야기한 것일 뿐이야. 가령... 고통, 좀 더 추상화해서 ‘오류’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열린 해석이란, 기만이기 쉽겠지. 그곳에서 필요한 것은 고통, 오류를 없애기 위한 정답일 뿐이야.”
약간은 느릿하게, 주문을 외는 듯한 기분으로, 은결은 말했다. 고통. 고통이 문제였다. 해석의 풍요와 거기서 비롯되는 삶의 풍요를 말하기에, 세상은 욕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너무 많다... 욕망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 많고 진득한 사념체들... 하지만- 생각은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금 숨이- 막혀 왔다. 시야가 어그러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딴 거 몰라! 어떻게 부자지간이 재미없는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어나가는데 이렇게 재주가 좋은지 모르겠다니까. 나는 그런 유전자 전혀 못 받은 거 같은데.”
미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은결을 침잠에서 건져 올렸다. 그는 얼른 평정을 회복하고 놀리듯이 웃는 얼굴로 미래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사실은 나름 즐기고 있으면서. 아버지나 내가 이런 이야기 하면 말꼬리 안 자르고 잘 듣잖아. 누가 모를 줄 알고.”
“이, 이건 즐기는 게 아니라 장시간을 거치면서 훈육된 거야. ‘훈육’! 그리고 어른 말하는데 끼어들고 그러는 거 아닌 법이잖아. 물론 오빠는 어른은 아니지만 일단 존중을 해야지!”
“그러세요.”
돌아온 은결의 답에 미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쳇! 솔직하게 말해. 이 게임 해 본적 있지?”
“어허, 아니라니까.”
“하여간 계속 지니까 김만 팍 새내. 다른 걸로 하자. 다른 걸로.”
그리고 미래는 재빨리 소프트를 꺼내 협력 플레이가 가능한 슈팅 게임으로 교체했다. 화면을 적탄으로 다 채우고 있는 듯한, 무척 어려운 슈팅 게임이었다. 당연히 미래는 첫 스테이지에서 전기를 격추당했고, 4번째 스테이지에 도착하기 전에 컨티뉴를 거의 독식했으면서 그마저도 못하게 되자 그제 껏 살아남은 은결에게 얼른 죽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지난 화는 다루었던 내용의 문제로 좀 난이도가 있었습니다. 현상학이라는 게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게 힘든 학문이고 해서 그 이하로 낮추기는 사실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행간 읽기가 목표가 아니신 분들은 부담 없이 읽으시면 됩니다.
*소울언더님께서 쿠로사카 유리에 양의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그림은 표지 삽화란에 있습니다. 참고로 위쪽 그림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캄사~
*작자에게 성원(reward)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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