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희망을 위한 찬가 - 은결 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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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아버지의 사설을 읽었다. 읽고 글을 내렸다. 프린트된 종이가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그는 종이를 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헤겔이 생각난다.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가치이면서 동시에 추구되고 그래서 미묘한 균형 위에 위태롭게 서 있듯, 주체와 평등이란 개념 역시 충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체적인 주체되기란 외부에 휩쓸리지 않는 정신이지만, 주체는 외부를 통해서만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차이만이 진정으로 자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는 극복되지 않고,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러나 욕망이 언제나 타자의 욕망이라면, 욕망되는 것은 차이이고, 차이가 욕망의 진실한 목표일 때, 평등은-
“...타자의, 욕망.”
-딩동.
종이 울렸다. 생각을 끊고 은결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인터폰을 확인하니, 수줍은 안색의 소녀가 서 있다. 어딘가 침착하지 못한 안색이지만 그와는 무관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소녀다. 은결은 놀란 얼굴을 했다. 아름다운 소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를 알기 때문이다. 세연이었다. 은결은 얼른 그녀를 맞이하러 나갔다. 양산을 쓰고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세연은 은결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아,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특별히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여길 지나게 되는 김에 찾아오게 되었는데, 안... 되나요?”
머뭇거리는 안색으로 세연은 말했다.
“그럴리가요. 올라오세요.”
은결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그러고 보니 세연을 보는 것도 일주일 만이다. 일주일 전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로 적지 않은 신세를 졌다.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감사의 뜻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빚이 많다. 불현듯 찾아와서 조금 당혹스런 부분도 있낀 했지만, 잘 된 일이다 싶었다.
“헤헤, 아, 그리고 여기-”
세연은 기쁜 얼굴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과자가 들어 있었다. 어딘가의 빵집에서라도 사온 모양이다. 은결은 “뭘 이런 걸 다-”라고 말하면서도 기꺼이 그녀의 선물을 받았다. 역시 ‘우연’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미리 전화를 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우연’을 가장하고 싶은 것이 세연의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싶었다. 곧 그녀는 은결의 방으로 안내 되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은결은 세연이 가져온 음식이 든 봉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간단히 다과상을 차려오겠다는 말이다.
“예.”
세연은 수줍게 답했다. 은결은 자신의 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세연은 신기한 것 처럼 은결의 방을 둘레둘레 살펴봤다. 처음 온 것은 아니지만 책으로 충만한 은결의 방은 오래된 시간이 응고된 고풍을 느끼게 한다. 고대의 가장 오래된 권위적 저술부터 현대 최신 담론에 대한 날카로운 저술까지, 그의 방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머물러 있다. 책은 마치 응고된 시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곧 은결이 돌아왔다. 그는 작은 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음료수 몇 가지가 세연이 사온 과자와 함께 보기 좋게 차려진 간단하지만 훌륭한 다과상이었다. 어색한 웃음을 떠올리며 은결은 말했다.
“제가 사 온 것도 아니라 이런 말 하는 것은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 드세요.”
“음, 그, 그럴께요.”
수줍은 듯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세연은 은결의 말을 받았고, 자신이 사온 과자에 손을 가져갔다. 은결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중하게 말을 시작했다.
“지난 바캉스 때는 감사했습니다.”
“에, 예?”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세연 양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라고.”
“아, 아니예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없는걸요. 그냥 멍하니 있었을 뿐인데, 눈뜨고 보니 모든 게 해결되어 있었는걸요. 그냥 좀 길고 긴 꿈을 꾸었던 것 같은, 그런 느낌 밖에는... 그러니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예요. 그리고-”
얼굴을 확 붉히며 시작했던 세연의 말은 쓸쓸한 웃음의 말머리 죽이기로 끝났다. 은결은 그녀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그렇게 너무 정중하게 감사받으면, 좀... 슬프잖아요.”
“...그렇군요.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은결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은 그 대답을 들으며 가슴이 다시금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이 모자랐기에 이런 정중함을 취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이 충분했다면, 그럼 정중함을 결여한 태도를, 좀 더 부드럽고 친밀한 태도를 취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예절’ 혹은 ‘벽’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침묵이 흐른다.
“나 왔어~”
침묵을 깨뜨린 것은 삼자였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벽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었음에도.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빠-! 시원한 물 한잔 부탁해. 밖에 무지 덥네. 아, 더워라. 선풍기, 선풍기. 선풍-”
콧노래로 선풍기를 부르며 방으로 돌아가려던 목소리의 주인은 은결의 열린 방문 앞에서 경직 상태에 돌입했다. 유별한 남녀가 한 방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래와 세연의 눈길이 충돌했다. 세연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안녕.”
“미래야. 세연 양이 사온 과자 부엌에 있으니까 음료수 하고 같이 꺼내 먹어. 지금은 손님도 있고 해서 일어날 수는 없고.”
은결도 어색한 얼굴로 경직상태에 있는 미래에게 그렇게 말했다. 미래는 답 없이 굳어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흥!”하고 매우 거칠게 콧소리를 내고는 사나운 동작으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작열하는 여름 태양보다 뜨거운 아우라가 등 뒤로 보였던 것 같았다. 이어서 쾅! 하는 신경질적인 문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어깨를 좁혔다.
“죄송합니다. 낯을 가리는 녀석이라서.”
“예에...”
‘낯을 가린다’라는 은결의 설명이 사실과 꽤 거리가 있다는 것은 말한 본인도, 듣는 세연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일부러 지적하면 일만 골치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은결은 어색한 분위기를 일소할 겸 일어서서 문을 닫았다. 은결이 다시 앉자, 세연이 결심한 얼굴로 물었다.
“저기, 내일 시간 비어 있으세요?”
“그, 그야 방학이니.”
“그럼, 같이 어디 놀러라도 가지 않으실래요?”
“...음.”
분위기와 질문의 흐름이 일치했다. 직접적으로 단어야 나오지 않았다지만 이건 틀림없는 ‘데이트’ 신청이다. 여름조차 비웃듯이 달아오른 세연의 얼굴이 그를 증명했다. 하지만 은결은 시선을 돌리며 주저했다. 그의 세연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런 이상 그녀와 무의미하게 그런 만남을 지속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시 그녀를 상처 입히는 것은 싫었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강고(强固)하게 지속하는 편견을 지니고 싶지도 않았다. 푸른 이빨의 비웃음은 아직도 머릿속 한 구석에서 킬킬거림을 남기고 있다. 생각은 뒤엉켰고, 은결은 그것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원래 위치로 돌렸다. 이어 입을 열었다.
“제안 감ㅅ-”
은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맞이한 것은 수줍음과 강한 의지가 한 곳에 모여 있는 세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요염하면서도 강렬하고 파괴적인 저열함을 한 곳에 갖춘 일그러진 미인이었고, 그녀의 욕망에 물든 눈빛은 한 줄기 섬전 같은 손길이 되어 은결의 목을 노렸다.
“컥!”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것은 완벽한 기습이었다. 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세연은, 아니 푸른 이빨은 한 손으로 은결의 목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결은 양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결의 악력은 철괴조차 버터를 주무르듯 뜯어낼 수 있음에도! 터무니없는 힘과 강도였다. 카미의 힘은 모두 자기 속에 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드디어 지겹던 인연도 끝낼 때가 왔다, 꼬맹이!”
푸른 이빨이 킬킬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은결은 번개 맞아 죽는다니까요.
*아, 힘이 안 난다. 풀썩.
*채찍 고행자라거나 하는 종말론에 기초한 과격한 집단의 술자 탄생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서브라임을 구매해 주신 분들에게는 감읍~ 다른 분들도 홍보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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