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76화 (176/300)

#   177-희망을 위한 찬가 - 은결 되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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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눈을 뜬다. 창가로 흘러들어오는 외부의 희미한 빛이 어둠을 한 꺼풀 벗겨내어 사물과 인식 사이에 옅은 선을 그린다. 은결은 한숨을 쉰다. 그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로 섰다. 그리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호흡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공기가 아니었고, 내받아 지는 것 역시 공기가 아니었다. 숨결마다 일상이 들어차고, 일상이 토해진다. 전신을 일상이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한 순간, 소름이 은결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파도처럼 끓던 소름이 포말처럼 사라지고, 은결은 고개를 내렸다. 일상은 공기처럼 느긋하게 주변으로 용해되어 원래의 무정형을 회복한다. 은결은 다시 침대에 누웠고, 눈을 감아 잠을 잤다. 그는 의무처럼 잠을 잤다. 의무처럼 삶을 살기에.

“후아아암.”

잠옷 차림의 미래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이미 요리하는 소리와 냄새로 충만해 있다. 미래는 눈을 비비며 부엌을 바라봤다. 부지런한 그녀의 오빠는 언제나처럼 새벽부터 일어나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침 운동도 벌써 끝마쳤을지도 모른다. 미래는 언제나 은결에 대해 감탄한다. 그녀의 오빠는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부지런했다. 역시 밖에서 보여주는 시시한 몇 가지 모습만 보고 오빠를 판단하는 것은 그저 어리석음일 뿐이라고, 미래는 확신했다.

“오빠, 좋은 아침.”

알콜을 섭취하면 비슷해질까 싶은 알딸딸한 정신으로 미래는 은결을 향해 아침 인사를 했다. 산만한 목소리 사이로 졸린 기운이 하품의 기색과 함께 완연하다. “좋은 아침.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은결은 웃는 얼굴로 동생의 인사에 답한다. 그러면서도 요리를 하는 손은 쉬지 않는다. 일 년 전과, 육 개월 전과, 한 달 전과, 어제와 비교해-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은결은 언제나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변화하지 않는다. 외부와 무관하다. 미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근처의 리모콘을 쥐고 텔레비전을 켰다. 경제가 어떠니, 주가가 어떠니 하는 그다지 재미는 없는 뉴스가 방송 중이었다. 무의미하게 그들 화면을 바라보며 미래는 물었다.

“오빠, 오늘 시간 있어? 여유 있으면 같이 영화나 보러 가자.”

“나 말고 친구들이랑 보러 가지?”

“어제 만났단 말야.”

미래는 뚱하니 답했다. 은결은 쓰게 웃었다.

“미안. 오늘은 가볼 곳이 있어서 무리야.”

“에? 어디에? 어제도 가더니.”

“친구 좀 만나러.”

미래는 긴장했다. ‘친구’라는 단어가 불길했다. 친구라는 단어는 언제나 부정확하다. 친구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정확히 잘 모른다. 친구는 그냥 아는 사람에서부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지인까지 그 분포가 너무 다양하다. 심지어 사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타인을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친구라는 단어는 언제나 부정확하다. 그러니까 그 수많은 의미를 품음으로서 명확한 의미를 품지 않는 그 단어는, 진의를 숨기기 위해서 최적인 단어가 될 수 있다. 사람을 숨기려면 시내에, 잎을 숨기려면 숲에, 소금을 숨기려면 눈밭 위에. 즉, ‘연인’도 친구라고 지칭하면 친구가 된다! 미래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추구하듯이 은결에게 물었다.

“음, 나 몰래 여자 친구 만들거나 한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냥, 확인 할 게 좀 있어서.”

피식, 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은결은 답했다. 그래. 그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윽한 진심이 느껴지는 답변을 듣고 미래는 크게 안심했다.

은결은 한 손에 과일바구니를 든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도심을 적시는 매미 소리가 울창하고 정겨웠다. 높은 담장 너머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들이 푸른 생명력으로 흠뻑 빛을 빨아들였고, 그 아래로는 짙은 그늘이 고여 있었다. 은결은 그 웅덩이진 그림자를 하나하나 밟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리된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내리는 여름의 빛은 자글자글 튀어오르고 있었다. 시내의 소란과는 한 발짝 거리를 둔 고급 주택이 많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몸을 휘도는 막대한 힘을 느끼고 있다. 왜소한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언제든지 확장해 세계를 자의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다. 어떤 장애도 이 힘 앞에서는 무의미할 것 같았다. 원한다면, 일격에 산을 분쇄하고, 지진을 일으키고, 해일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사가 아니었다. 지금 은결이 느끼는 자신의 힘이라면, 정말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푸른 이빨이 그의 몸에 주입했던 힘의 반 이상이 용해되어 은결 그 자신의 힘이 되어 있었다. 카미의 힘 가운데 절반. 세계를 다 뒤져도 이만한 힘을 사역하는 이는 과연 몇이나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키리야미를 해방한 쿠로사카에게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힘을 가늠해 보며 은결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란다. 키리야미를 해방한 쿠로사카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과거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그 힘을 상대해 우세를 점할 수 있는 힘의 소유자를 은결은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 힘으로, 만월에 힘입은 임모탈리티의 괴물과도 싸워 거의 승기를 잡았다. 그 섬연한 검 끝에 모여드는 에너지는 세상과 세상의 경계조차 잘라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 힘 역시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힘으로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도천시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진각을 잘못 밟는 것만으로도 주변 일대는 괴멸될 것이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제 새벽에 깨어났을 때는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꿈일 리는 없었다. 은결은 일어나기 전의 마지막 장면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자신은 담담하게 종말을 받아들였다. 한데 이렇게 깨어났다. 날짜도 길지 않지만 변해 있었다. 더구나 전신에는 믿기 힘들 정도의 방대한 힘이 흐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당사자에게 직접 알아내는 것. 내키지 않지만 그것이 최선이다. 그러고 보면 방문해도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세연의 당황하면서도 어딘지 젖어드는 목소리 역시 신경 쓰였다. 마치 연인을 맞이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음.”

은결은 생각을 끊고 그저 걸었다. 그의 걸음은 꾸준했다. 땀은 흐르지 않았다. 이전부터 은결의 육체는 초고온에도, 초저온에도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기의 총량이 폭증한 지금이라면 끓는 쇳물이나 액화산소 가운데 수영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는 세연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벨을 눌러 방문을 알렸다. 곧 “아, 은결 씨.”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다.

“예. 음, 연락드린 대로 찾아 왔습니다.”

문에서 덜컹 소리가 나며 대문이 열렸다. 은결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곧 세연이 그를 맞이하러 문을 열고 나섰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은결은 조금 놀랐다. 세연은 평소에도 아름다운 소녀이지만, 지금은 한층 아름다웠다. 깨끗하고 정갈하면서도 기품 있는 옷이, 옅은 화장이 잘 어울리는 얼굴과 보조받고 보조하면서, 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어디 외출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세연은 은결의 손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럼.”

그리고 두 사람은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은결은 과일 바구니를 세연에게 넘겼다. 세연은 조금 창피해 하며 그것을 받았고, 이것저것 챙겨서 올라갈테니 먼저 자기 방에 가 있으라고 말했다. 은결은 손님으로서 순순히 그녀의 호의에 따랐다. 세연의 방은 이전과 별 다르지 않았다. 소녀다운 취향으로 가득 했지만, 그 이면에는 영적으로 완벽한 방어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고의 요새이기도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곧 세연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쟁반에 음료수와 과일, 과자를 들고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로 엉거주춤 움직이는 모습이 어딘가 우스우면서도 귀여웠다. 세연은 그 쟁반을 근처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은결에게 권했다.

“드, 드세요.”

“그럼 감사히.”

은결은 쿠키를 한 개 집어 입안에서 반으로 쪼개어 먹었다. 세연은 음식을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담한 몸가짐으로 방문을 닫았다. 밀폐된 공간 가운데, 젊은 남녀 두 사람만 남아 있게 됐다. 하지만 은결은 얼굴을 굳힌다. 낭만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다. 방안의 공기 역시, 그렇게 굳는다. 달콤한 낭만과는 무관한, 싸늘한 살기로 직조된 그물을 천만 겹으로 쌓아올린 듯한 분위기다. 은결은 말한다.

“푸른 이빨.”

세연은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 평소처럼 청순하면서 아름답지도, 요염하면서 아름답지도, 천박하면서 아름답지도 않았다. 지금 세연의 얼굴은 불꽃처럼 순결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역시 찾아왔군. 정신병자 새끼.”

푸른 이빨은 뜨겁게 말한다.

*추천해 주신 목적의 왕국님께 감사! 감상 남겨주신 긴 길 님께도!

*설정 비화 공개! 사실 초기 설정에서 푸른 이빨은 여성 캐릭터로 등장할 예정이었습니다!(꽈광!) 그것도 세연이 아니라 은결에게 들러붙어 다니는!(...)

*몇몇 분이 예상하신대로 은결이 파워 업을 하긴 했는데 어차피 이런 종류의 파워 업이 별로 의미가 없는 글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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