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희망을 위한 찬가 - 그 꿈의 이름은 무엇인가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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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빠 한 이틀 전부터 얼굴이 안 좋다?”
저녁 식사 시간 중에, 미래가 갑자기 물었다.
“그, 그러냐?”
은결은 당황스레 답했다. 요 며칠간 말 못할 고민을 가슴에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래에게 이렇게 쉽게 간파당할 만큼 얼굴에 들어나 있었다니! 그 고민이란 물론 세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정황상 자신이 먼저 고백한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자신이 다시 찬다는 것은 너무 뻔뻔한 것 같았다. 그 경우 그녀와의 접점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그녀의 마음에 씻기 힘든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푸른 이빨이 그녀의 몸에 있지 않다면 최면으로 기억 조작을 시도라도 해 보겠는데, 막대한 힘까지 얻은 푸른 이빨이 그녀 속에 들어않은 채 이 상황을 즐기고 있으니 그것도 용이치 않았다.
“응. 얼굴에 걱정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랄까? 아 뭐, 오빠가 꿀꿀한 얼굴 하는거야 일상 같은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한숨까지 푹푹 쉬는 게 심상치 않아 보이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 동생한테 상담해봐. 영화티켓 두 장과 평일 여유시간 할애라는 염가에 봉사할게.”
미래가 가슴을 탁탁 치며 말했다. 빙 굴러 말하지만 결론은 같이 놀러 가자는 소리다. 그것도 비용은 은결이 모두 부담하고. 은결이 생각하기에 결코 염가가 아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여동생에게는 도무지 상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으음, 호의는 고맙지만 상담할 정도의 일은 아냐.”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전혀 다행이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미래가 꿀쩍하게 말했다. 수행은 남매의 대화를 미소 지은 얼굴로 듣고 있다가, 은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은결아, 조금 있다가 내 방에서 보자꾸나.”
“예.”
은결은 답했다. 아버지의 방에 불려가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지만, 자상하고 푸근한 얼굴을 보자니 별로 대단한 일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은결은 미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저녁 식사를 계속했다. 오늘 만든 된장찌개는 약간 짠 것 같았다. 간을 보면서 세연의 생각을 했던 때문이리라. 다시 한 숨이 인다.
탕. 가볍게 문이 닫히고, 은결은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 좁지 않은 방은 책으로 충만해 있다. 이 방과 다른 세계를 격리하고 구분하는 것 처럼 많은 책들이었다. 대기 가운데 삭아 가는 책의 오래된 냄새가 하품하는 구름처럼 느껴졌다. 은결은 그리운 아늑함을 느끼며 그 내음을 폐 깊숙이 넣었다. 은결의 과거는 무엇보다 이 책들과, 이 분위기를 통해 구성되어 있었다.
수행은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책상의 한쪽 옆에는 두꺼운 책과 스크랩된 잡지들, 그리고 따로 인쇄된 출력용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그렇게 쌓여진 텍스트는 무수한 포스트잇으로 이리저리 표식이 되어 있었다. 저렇게 표식된 부분의 텍스트들이 모여 다시금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를 이룰 것이다. 텍스트로 직조되고, 텍스트로 해체되는 세계. 완전한 자기 순환. 그 순환 가운데 세계는 어떻게 끼어들면 좋을까? -갈증이 일어났다.
은결의 세계가 일그러지기 직전, 수행은 은결이 들어온 것을 알고, 읽던 책을 덮고 의자를 돌렸다.
“어서 오너라.”
“아버지가 따로 부르시다니, 오랜만인데, 무슨 일인가요?”
의식을 회복하며 서둘러 은결이 물었다. 수행은 그윽하게 은결을 바라봤다. 뿌듯해 하는 눈길 같았다. 은결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특별히 저런 눈빛을 받을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수행은 차분하게 두 손을 모아 겹쳐진 검지의 끝을 턱에 가져다 대었다.
“오늘 말이다, 사설 문제로 진경과 만났단다.”
“문제요?”
“아아, 문제랄건 없단다. 맥락을 가진 글이니 완결되면 따로 작은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사워들 사이에 있어서 그 문제로 이야기를 좀 했던 것뿐이지. 그 외에는 너와도 무관하지 않은 사념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었구나.”
“그렇군요.”
그렇다면 평이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은결이 이 자리에 불려온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수행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진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거기서 수행은 은결을 향해 뿌듯한 눈길을 보냈다. 은결은 그 눈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작자가 뭐 도천시를 훌륭하게 지켜내고 있다고 칭찬이라도 한 마디 했단 말인가? 하지만 진경이 자신을 칭찬한 정도로 수행이 기뻐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런 종류의 의견이 기쁨이 되는 것은 의견을 말하는 자에게 그만한 권위가 있다는 것을 듣는 자가 인정하기 때문인데, 수행의 경우는 그 자신의 권위와 판단력이 진경을 훨씬 뛰어넘는다. 남들이 비판한다고 수행의 은결에 대한 의견이 바뀔 리도 없고, 남들이 칭찬한다고 수행의 은결에 대한 비판이 바뀌리라 생각하기도 힘들다.
“-너와 세연이라는 아이가 사귄다는 걸 알게 됐지.”
수수께끼는 폭탄처럼 터졌다.
“에, 그, 그- 그게-”
은결은 말문이 막혀 허둥지둥했다. 사랑하는 아들의 당황하는 모양새를 쿡쿡거리며 즐겁게 지켜보다가 수행은 이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숨길 필요 없다. 나는 처음부터 그 아이와 네가 사귀게 되는 것을 한 번도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도리어 연애를 권하고 싶었지. 그것은... 세상을 슬픔으로 해석하는 네게 어쩌면 슬픔을 넘어선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은결은 침을 삼켰다. ‘그러나 사랑은 아버지를 몰락시켰습니다.’ 그런 대답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가, 겨우 들어갔다. 두터운 철봉이 식도에 꿰인 상태로 들썩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은결은 그런 감정의 동요를 철저하게 숨겼고, 수행은 푸근한 시선으로 은결을 바라보다가 험, 하고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쓸데없는 서론이 길었구나. 젊은 아이들의 일은 젊은 아이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법이지. 늙은이가 끼여들어선 판만 버리는 법이고-”
그러면서 수행은 책상 서랍을 하나 열었다. 안에는 잡다한 물건이 여럿 들어가 있었다. 그는 한동안 물건을 뒤지다가 이내 무언가를 꺼내 은결에게로 넘겼다. 은결이 보니 어딘가의 티켓 같았다. 은결은 다소 당혹한 표정으로 그 티켓을 받았다. 살펴보니 서울시 동물원의 입장 티켓이다. 은결은 물었다.
“...뭔가요?”
“뭘 거 같으냐?”
수행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채근하듯 되물었다. 묻는 사람도, 되묻는 사람도 사실 티켓의 의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은결은 확신을 확인하는 지루한 목소리로 수행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세연 양과 함께 가라는?”
“그래. 그것도 얼마 전 진경에게서 사원들에게 돌리고 남은 거라면서 받은 거였지. 영화야 함께 많이 보았을테니, 이렇게 활동적인 걸로 바꾸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유원지 같은 것도 좋겠지만, 세연이라는 아가씨는 몰라도 네게 유원지의 놀이기구가 자극이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으니까. 원래라면 너와 미래에게 주려고 생각했는데 네게 연인이 생긴 이상 여동생에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니? 더구나 그 녀석이 이런 일에는 좀 시끄럽고 말이다.”
확신을 확인하는 끄덕임과 더불어 수행은 말했다. 굳이 표를 주려고 여기까지 불러들인 것은 미래를 의식한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본인 있는데서 이런 대화를 했다가는 평화로운 가정에 재난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은결은 아직 충격이 남아있는 것 같은 얼굴로 수행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아버지-”
하지만 그의 말은 수행의 이어진 말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충분히 안다. 군자금은 내일 오전 중에 네 계좌에 넣어 두마.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해라.”
“......”
은결은 침묵했다. 새삼 진리만이 확인됐다. 아아. 소통은 이토록 불모하다. 오해는 극복되지 않는다. 고로 염원하는 것은 아담의 언어. 생각을 거기까지 하고 은결은 미간을 주물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은 아담의 언어도 좀 곤란하다.
*개그개그개그.
*저는 한국에 노벨상을 탄 작가가 있다 던가 없다던가 하는 것은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한국에 박상륭이란 작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 제가 생각하기에 그는 노벨상보다 훨씬 거대합니다. 제게 박상륭이란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이름입니다.
*우리 모두 성원을 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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