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85화 (185/300)

#   186-희망을 위한 찬가 - 그 꿈의 이름은 무엇인가_(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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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알았네.”

수행은 찌푸린 얼굴로 전화를 내렸다. 그가 방금 전화를 했던 상대는 진경이었다. 전화 내용은 은결에 관한 것이었다. 혹시 은결이 어디 있는지 모르냐는 전화였다. 드물게 은결의 귀가시간이 늦기에 전화를 하던 차였다. 평소 같으면 두 시간은 일찍 집에 귀가했어야 한다. 즉, 지금 시간은 새벽이다.

“역시, 아닌가.”

찌푸린 얼굴을 채색하는 감정은 아무래도 아쉬움 같은 것으로 보였다. 수행은 한 손으로 턱밑을 긁으며 끌끌, 하고 혀를 찼다. 얼마 전 장사를 끝마치고 돌아와 있던 할아버지가 의아한 얼굴로 아들에게 물었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은결이가 허튼짓을 할 아이도 아니고, 늦는다면 늦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이지. 만에 하나 위험에 처했다면 이미 연락을 보내왔을 테고. 그리고 정히 걱정이라면 왜 그렇게 전화 따위의 불편한 물건을 사용하지도 모르겠구나. 팔찌를 통해 염으로 대화하면 알 수 있지 않느냐?”

할아버지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수행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 그 말을 받았다.

“그게-”

천재. 전설. 어떤 형용사로도 그 재능을 모두 담아 평가할 수 없다는 거인은 아버지의 질문 앞에서 참으로 드물게도 말을 머뭇거렸다. 씁쓰레한 웃음이 뒤섞인 그의 표정이 담고 있는 감정은 우려와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은결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아, 깨어계셨군요.”

“오, 어서오너라. 오늘은 늦었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음, 별 다른 일은 없었어요.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경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 덕에 좀, 늦었던 거죠. 죄송합니다.”

은결은 담담함을 가장하며 답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씁쓸한 마음이 진득한 가래처럼 전신이 퍼져있는 기분이다. 오늘 동물원에서 세연과 나누었던 대화와, 오늘 밤에 쿠로사카와 나누었던 대화가 마음을 후벼 팠던 탓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을 하고 말았다. 열망은 하얀 재처럼 식었기에,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견디기 힘들지 않았는데. ‘어디에도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은 하얀 재 밑의 희미한 불씨를 되살리며 ‘지금 이 곳’을 참혹하게 견디지 못하도록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모순은 마음을 송곳처럼 후비고, 자신을 신뢰할 수 없기에 행동할 수 없다는 속박은 무력감으로 사지를 옥죈다. 갈망과 꿈에 대한 자각이 겹치며, 세계를 일그러뜨린다.

“아니, 죄송할 필요는 없다. 네게도 네 사정이 있는 법이지.”

수행은 손을 저으며 은결에게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흠’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수행이 운을 띄웠다.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행이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는 무척 정갈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뭔가요?”

“그, 혹시, 오늘 저녁에 줄곧 시간을 같이 보냈던 것은, 세연양이 아니었느냐?”

“서, 설마요!”

은결은 발걸음을 허둥지둥 뒤로 물리며 부정했다. 그게 대체 무슨 벼락 떨어질 소리란 말인가! 아니, 벼락은 이미 여러 번 떨어진 것 같지만, 어쨌건 은결은 이런 늦은 시간까지 남의 집 귀한 딸과 시간을 보낼 만큼 파렴치한(대인배)은 아니다.

“괜찮다.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진경에게서는 별다른 전화를 받지 못했지만, 세연양과 관계된 이야기에서 그 녀석의 말을 솔직하게 다 믿을 수는 없었으니까.”

어딘지 근엄한, 동시에 기대에 찬 표정으로 수행은 말했다. 옆에서 그 표정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어때서 그의 아들이 염파를 통한 대화를 하지 않고 전화 따위를 사용하는 뻘짓을 했던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수행이 관심이 있었던 것은 혹시 은결이 그 세연이라는 아가씨와 함께 하느라 늦지 않았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기대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도천시에는 은결 외에도 쿠로사카라는 아이가 사념체를 상대해 주고 있으니, 말을 미리 해 둔다면 하루 정도 여유를 얻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녀석도 은결이 일이 되니까 눈이 멀었군. 기대할 걸 해야지.’

할아버지는 측은한 눈으로 거인이라 이야기되는 아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뭐, 할아버지도 사실 기대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옆의 이 팔불출 아들처럼 성급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손자가 어느새 여자아이와 사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을 생각하면, 자신의 예상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늙고 낡은 것이었던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면 좀 아깝군.’

할아버지는 쿠로사카라는 소녀를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길이 글을 더듬는다. 눈길이 글을 더듬는다. 그 손길과 눈길은 조심스럽게 문장을 이어가며 의미를 꿰어 맞춘다. 글을 대하는 그것의 태도는 단순한 글을 대한다기 보다 어떤 경전을 대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양극화를 이루는지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명백하게도, 자유는 언제나 강자의 자유다. 체격도, 속도도, 훈련기간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자유롭게’ 싸운다면 크고, 빠르고, 오래 훈련한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이기는 것은 필연이다. 더구나 자본의 세계에서,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승자가 패자의 시신을 잡아먹고 자신의 덩치를 키우는 과정과도 연결된다. 그래서 자본의 탄생과 성장은 고름과 오물을 뚝뚝 흘리는 흡혈귀의 형상과 언제나 닮았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자유의 이념을 극단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이 흐름이 민주주의와 적대되는 양극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에 최적화된 자본의 양상인 국제금융자본이다. 이들은 투자지역에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기 쉽다. 금융자본에 있어 투자지역의 성장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투자지역의 성장으로 인한 투자증대는 노동력과 원자재의 수요증가로 물가를 상승시키게 된다. 하지만 금융자본은 물가상승이 일어나면 직접적으로 그들의 이익에 손해를 보게 된다. 물가가 상승하는 만큼 그들의 투자이익(이자)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투기자본의 속성상 그들이 투자하는 자본의 유동은 단기적이고 빠르다. 즉, 장기투자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막대한 국제금융자본이 들어선 지역의 지역기업은 적대적 합병인수를 막기 위해 투자를 줄여 그들의 공격에 대비하게 되고, 이는 고용불안을 부르게 된다. 고용불안은 곧장 시민들의 저축증대와 소비감소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저성장이다. 저성장의 논리적 귀결은 또한, 결국 양극화다.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사실상 그 어떤 국가에서도 발전이라 할 만한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은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다. 한국의 진보 경제학자들 가운데는 97년 이전 30-40년간 재벌의 과잉투자가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신자유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투자를 억제함으로 한국 경제에 긍정적이었다고 말하나, 과잉투자는 그 투자로 인한 생산물이 소비가 되지 않아 경제가 침체될 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한국은 97년 이전 공황이라 할 만한 것을 겪지 않았고, 꾸준한 성장을 해 왔다.

도리어 국제금융자본이야 말로 97년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93년, 금융자본이 한국에 들어오게 됨으로서, 과거 은행이자로 상당부분 빠짐으로서 시민의 소득증대에 큰 몫을 했던 기업의 이익은 주주자본주의로의 전환과 함께 투자에 들어가기보다 주주들을 위한 배당금으로 돌아섰고, 이는 이자로 나가던 이익의 상당부분을 외국인 고소득자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이러한 투자억제는 직접적인 내수침체의 원인이 되었고, 이 흐름에 수반되어 국내기업의 부채규모는 외국인 직접 투자가 허용된 93년 이후 급증해 93년 400억 달러 수준이던 외채는 98년 1500억 달러까지 치솟는다. 따지고 보자면 97년 무렵, 한국에는 과잉투자라 할만한 현상이 짤막하게 있었는데, 이는 93년의 정책시행의 결과라 보아 무방하다. 실제로 97년의 금융위기를 겪지 않은 아시아 국가로는 중국과 대만이 있는데, 그들은 금융자유화를 하지 않았다...

-텁.

맞은편에서 육중한 소리가 났다. 그림자는 시선과 눈길을 그쪽으로 돌린다. 마스터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는 소리였다. 그는 그림자의 시선을 눈치 채고 말한다.

“(전설의 글을 읽느냐? 하지만 그 글에는 전설의 파편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세심하게 읽을 이유는 없는 셈이지. 하늘에 머리가 닿는 거인이 쓰러지듯 엎드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역시도 흥미롭다면 흥미롭지만, 결국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자는 매만지던 종이를 놓아두고 그에게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제껏 그가 읽던 책을 살핀다. 그는 그림자의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이어, 그림자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재밌는 책이었다. 특히 재밌었던 것은 이 로렌스라고 하는, 그토록이나 치열한 태도로 자기반성을 하며 살아갔던 자조차도, 결국은 그가 꾸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했던 대로, 그의 반성과 행위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한 양태일 뿐이었다. 마치 구토의 로캉탱이 현세에 나타난 것처럼 치열한 인식을 했던 이 조차 말이다. 그는 그래서 이중으로 꿈에 갇혀 있었지. 첫째는 그 자신의 이상이라는 꿈이고, 둘째는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세계관이었다. 아니, 혹은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는 희미하게 웃는다.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웃음이다. 그림자는 다소곳이 그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후설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의 제자로 하이데거라는 자가 있었다. 후설은 순수한 인식으로 학의 기초를 세울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그 학의 이름을 ‘현상학’이라고 붙였다. 제자였던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공부해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어 놓는다. 그로인해 후설과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는 스승과 달리 현상학을 통해 순수한 인식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는 결국 인간이란 ‘세계-내-존재’라고 생각했다. 해석하는 자, 꿈을 꾸는 자라는 말이었지. 인식에 대한 반성조차 실은 그렇게 불모한 것일지도 모른다. 꿈을 넘어, 다시 꿈을 보는 참혹한 거짓의 연속처럼 말이다.)”

꿈을 넘어서 꿈을. 그래서 그는, 그리고 그림자는 세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은 참혹하도록 잔인한 거짓된 세계의 산물. 이곳에서는 어떤 선도 진정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해, 진정한 신에게로 귀환하기를 원한다. 육체라는, 세계라는 속박을 넘어서. 이어서 그는 다시 그림자에게 말한다.

“(후후, 그러면, 이제 지난번 물음의 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림자는 속삭인다. 그것은 마스터에게 ‘그 꿈의 이름은 ‘진실’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는 돌아온 대답에 만족한 듯, 그윽하게 웃는다.

“(그래. 그가 꾸는 꿈의 이름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세상의 비웃음과 멸시를 받으면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 행위는 한없이 불모하다. 이해하고자 하는 그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꿈을 벗어나지 못하는 육신의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에 불과하니까. 멀더라도 시야가 가 닿는 끝. 그들이 인식하는 세계의 범위란 그렇게 협소하다. 그러하기에, 아무의 이해도 받지 못하면서 이해를 추구해 ‘진실’이라는 꿈을 꾸는 그의 미래는 파멸뿐이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파멸하지 않는다면, 그의 미래는 어떤 것이 되리라 생각하느냐?)”

그림자는 답하지 못한다. 마스터는 말한다.

“(그는 왕중왕이 될 것이다. 세계는 그에게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가 얻은 이해와 진실은 세계를 완전히 바꾸도록 할 것이다. 영지란 그런 것이다.)”

*챕터 끝났습니다.

*쿠로사카도 기를 거의 운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외선에 피부가 타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게 과거 이야기 된 적이 있죠. 큼.

*은결이 카미의 힘을 다 흡수해도 전성기 수행과 비교하긴 힘들겠죠. 지금도 어지간한 카미는 가지고 노는데.

*아, 그리고, 세연은 대단한 성의를 가진 신도가 아니기 때문에 진보적 기독교의 신학 논리 같은 건 알지 못합니다. 부시의 '지적설계자 이론'을 교과서에 집어넣겠다는 뻘짓 정도는 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은결은 현재도 만물일여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즉, 그의 정신적인 혼란은 극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의 현재 정신적인 상태가 일견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이는 이미 수행이 심각하게 예고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럼에도 은결의 정신적인 상태와 논리가 글의 전개상 ‘어거지’로 보인다면, 저는 ‘어거지’이상의 글을 쓸 능력은 없는 셈입니다. 매우 불편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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