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90화 (190/300)

#   191-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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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전에 바캉스 갈 때 제안했던 게임, 그거 죄수의 딜레마지?”

아침에 여우는 은결을 만나 간단히 인사를 나눈 다음, 힐난하듯이 물었다. 은결은 잠시 당혹한 표정을 보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게임을 제안해도 뭘 그런 걸 제안하냐. 어쩐지 이상한 게임이다 싶었더니.”

“읽고 있던 글이 있었거든. 그 책이 틀렸다는 걸 실제로 확인해 보고 싶었어. 그리고 꽤 괜찮게 즐겼잖아?”

은결은 답했다. 그때 밀턴 프리드만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하이에크와 함께 시카고학파의 지적 대부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확대가 정치적 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한다는 주장을, 그는 책에서 하고 있었다. 익명의 개인들이 자유롭게 거래하고 경쟁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자유의 세계. 존재한 적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리 없는 세계. 은결은 차라리 ‘고상한 야만인’이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익명은 도덕을 제거한다.

“흐음, 그래서 원하는 성과는 얻었어?”

“뭐, 그럭저럭.”

약간 쓰게 웃으며 은결은 답했다. 결과는 예견했던 대로 나왔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걸 묻다니, 책이라도 본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학원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 중에 있길래.”

“뭐야, 우리들 놔두고 지들끼리만 얘기하고.”

민성이 버럭버럭 화내며 이야기 가운데 끼어들었다. 죄수의 딜레마라니? 감옥에서 썩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런 고민이라면 당연히 ‘썩지 않는다.’를 선택할 테지.

“전에 기차 안에서 했던 게임 이름이야. 설명하긴 좀 복잡하지만, 아마 민성 너라면 꽤 흥미를 가질 것 같은데.”

은결은 과거 그가 ‘스탠포드 실험 사건’에 흥미를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말했다. 죄수의 딜레마는 해석의 방향과, 그 결과에 대한 이해의 확장에 따라 스탠포드 실험사건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은결이 말을 이어나가기 전에 늑대가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은결 저 자식이야 평소에도 그랬다고 치지만, 너는 갑자기 왜 난리야. 개학하고 나서 애가 좀 맛이 간 것 같다.”

그러나 여우는 차갑게 웃으며 들개를 쫒아내는 것 처럼 쉿쉿- 하고, 늑대에게 손짓을 해 보인 다음 은결과 어깨동무를 하며 “자, 우리는 저쪽 가서 얘기할까?” 라고 괜히 친한 척 해 보였다. 말인즉슨, 무식한자 끼지 말라. 는 소리다. 찔리는 바가 컸던 늑대는 분노했다. 찔리는 바가 컸던 민성도 분노했다. 찔리는 바가 컸던 고릴라도 분노했다. 소용돌이치는 분노가 여우를 향했다. 여우는 분노하는 중생들을 보며 즐거워 하다가 사정을 설명했다.

“껄껄. 이 형님이 학원 논술 상급반에 들어가셨거든. 그러니 대화의 질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지 않냐. 단어 하나에도 지성이 깃들도록 해야지.”

“논술 상급반?”

“그래. 말하자면 일종의 엘리트 집단이지!”

여우는 ‘엘리트’에 유독 힘을 줬다. 여우의 성적은 학년 전체에서 10~15% 사이에 있었다. 꽤 좋은 성적이다. 그리고 그 성적은 조금씩이지만 오르고 있기도 했다. 은결까지 포함해서, 남자 일동 가운데 여우의 성적은 가장 높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노에 떨던 세 명이 차갑게 식으며 조롱하는 눈길을 여우에게 보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어서 시선을 슬쩍 돌리는 것만으로 그들의 뜻은 명백해 졌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한적하게 책을 읽고 있는 한 명의 소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이름은 ‘쿠로사카 유리에’다. 그녀는 학년 전체 상위 1%내외의 진짜 ‘엘리트’다.

“......”

여우는 할 말이 없었다. 본래 진짜의 ‘아우라’ 앞에서, 가짜는 침묵하는 법이다. 은결은 옆에서 네 사람은 아웅다웅을 따뜻한(한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형세가 한 순간에 자신에게 불리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여우는 큼, 하고 괜히 목청을 가다듬어 분위기에 못을 하나 박은 다음 화제를 전환했다.

“내가 거기서 여자애를 한 명 알게 됐다고 했잖아.”

“아. 여자 은결?”

여자 은결. 은결은 역시 거북스런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고유명사가 타인에 대한 형용사로 사용될 정도로 스스로가 개성이 풍부한 것인지도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전에, 자유인으로서 은결은 자신의 개성을 스스로조차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모든 개인이 사실은 그러하다. 그것을 형용사로 사용하는 것은, 재단할 수 없는 것을 재단하는 폭력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런데 걔가 왜?”

“음. 그 애가 말야,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아.”

일순, 주변이 얼어붙었다. 얼음 같은 침묵을 깬 것은 서슬 퍼른 민성이었다. 그는 음산한 어조로 여우에게 소가 되새김질 하듯 물었다.

“...뭐라고?”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다시.”

“나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한 번 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민성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시저의 ‘너마저도...’ 를 떠올리게 하는 표정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리고 해체의 시대, 우정의 펜타곤은 이렇게 해체되어 간다. 하지만 고릴라가 콧방귀를 꼈다.

“흥. 어디서 자뻑이야!”

“맞아!”

늑대도 동조했다. 남겨질 수 없다는 발악이다. 여우는 측은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여유로운 숨결이 창날이 되어 둘의 가슴이 틀어박혔다. 숨통을 끊어내듯이, 여우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사실 나는 그 아이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 꽤 예쁜데다 성격도 나쁜 아이는 아닌데, 내 이상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어. 그러니까 너무 초초해 하지 마. 연인이란 역시 마음이 통하는 사이여야 하는 거지, 겨우 근처의 친구가 연인을 만들었니, 만들지 않았니 하는 따위의 사태 때문에 초조해서 억지로 연인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본말전도지 않겠어?”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듣는 이들은 더 짜증스러웠다. 승자가 말하는 정답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흔히 승자의 여유로 비춰지기 마련이다. 웃긴 점은 패자가 말할 경우, 패자의 변명이 된다는 점이겠지만. 은결은 여우의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갈 곳 없는 정답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해 봤다. 역시 승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에 불과한 것이니까.

“아, 그런데-”

민성, 늑대, 고릴라를 한 뭉텅이로 박살낸 여우가 상큼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은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의문형으로 어조를 바꿨다.

“왜?”

“그 아이가 까르마조프...던가, 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책이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과 진정으로 연결된 책이라고 이야기 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여우는 은결이 모를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어조로 물었다. 은결은 갑자기 죄수의 딜레마 이야기를 왜 꺼내나 했더니 학원에서 배웠다던 내용이 '이기적 유전자'였던 모양이구나, 하고 납득했다. 이어서 그는 여우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눈에 이채를 띄며 되물었다.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이?”

“응. 그렇게 말했어.”

“그건... 아마 이반 까르마조프의 말에 관련된 게 아닐까? 소설 가운데 이반은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했거든. 이건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말이기도 하고, 사르트르 그 자신이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작업은 결국 바로 그 신 없는 세계에서의 도덕을 이루어내기였으니까.”

“그럼, 일종의 무신론에 대한 선언인거야?”

여우는 애매한 얼굴로 물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심문관 이야기도 그렇고...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

“음, 까르마조프를 읽지 않았으니 이해하기 좀 버겁군.”

“읽어봐. 까르마조프는 굉장한 소설이야. 가장 깊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지. 자살 같은 축복이야.”

경외어린 어조로 은결은 말했다. 그것을 느끼고 여우는 역시 은결과 그 아이는 닮았다고 느꼈다.

“음. 기회가 되면.”

건성으로 돌아오는 여우의 대답을 들으며 은결은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그 소녀가 이야기한 것이 이반의 그 발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대심문관의 예수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혹은 그 연결이 좀더 복잡한 것이라면, 그때 이기적 유전자와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이라는 텍스트가 만나는 지점은 다른 곳이 될 것이었다. 그 다른 지점은, 틀림없이-

‘기게스의... 반지 겠군.’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자 은결은 조금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일 그 이야기가 정말로 기게스의 반지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연결고리를 가진 이야기였다면, 만나서,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이기적 유전자는 심리적 만족을 선행에서 얻을 경우, 그것이 진정한 선행인가? 라는 종류의 물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고로 지난화의 이기성이 이타성으로 바뀐다는 종류의 이야기도 행태주의적인 것입니다. 선행과 심리적 만족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론이 ‘왜 인간은 선행에서 심리적 만족을 얻게 되는가?’ 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할 수 있겠습니다만. (심지어 의무론적 선행을 하는 이들의 존재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엄청나게 강력한 이론적 틀입니다.)

*논술문제랍시고 지문으로 하이데거 글의 일부를 발췌하는 것도 봤는데, 이기적인 유전자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죠.

*아, 더워라.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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