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92화 (192/300)

#   193-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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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먼눈으로 밤의 도천시를 바라본다.

그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 읽었던 때를 떠올렸다. 7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슬픔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글이었다. 유전자는 이기적이고, 그 이기적인 성격에서 다른 모든 생명의 성향이 탄생되었다는 주장이었으니까. 이타적인 것들 역시 이타성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성립되었다고 그 책은 주장한다. 본질적인 선량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결은 그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 주장이 보여주는 현실과의 정합성. 그리고 무수한 사태를 한 지점에 모아 간단하게 설명해 버리는 강력함. 그것은 혼돈을 정리해 질서로 만들고, 다양함을 포섭해 하나로 통일한다. 그래서 도킨스의 주장은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웠다. 선악을 말하지 않는 무참한 질서의 아름다움. 은결은 그 주장의 아름다움에 슬퍼하면서 수행에게 물었다.

‘아버지, 글라우콘의 질문은 정말 대답할 수 없는 것인가요?’

그때 수행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이내 그는 은결이 읽던 책의 제목을 보고 자상하게 웃었다. 왜 은결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겠다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수행은 은결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새벽녘 고요한 샘물에 떨어진 차가운 이슬방울 같은 어조로 답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손길은 포근했다. 은결은 그것만으로 다 좋아서, 더 묻지 않았다. 다른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부정한 것으로 충분했다. 당시의 은결에게 아버지는 완전한 진리의 담지자였으니까.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는, 그렇게 위대했던 아버지는 몰락했다. 아무도 글라우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었다.(아버지를 넘어서야 했다.)

---그러니까,

“으...”

---‘어디에도 없는 곳’을 찾아(만들어)라.

은결은 충동을 억누르고 이지러지는 세계를 정리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손을 꽉 쥐었다. 이와 이 사이에, 그리고 손과 손 사이에 그의 자그마한 몸 안에 도천시 도시 전체를 박살낼 만한 에너지가 충돌하며 균형을 맞췄다. 삐꺽이며, 정리되며, 자지러지며, 수축하며, 확장하며- 희미하게 깨어진 균형 사이로 삐져나간 얼마 되지 않는 에너지로 인해 쩍, 하고 은결의 발밑에 균열이 생겼다.

“(은결.)”

쿠로사카가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은결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 아.)”

“(가자.)”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쿠로사카가 몸을 날렸다. 은결은 그녀의 뒤를 쫒듯이 몸을 날렸다. 지금도 눈앞의 세계는 일그러져 추악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곳’에 대한 충동을 거절할 수 있었다. 죽음을, 거부할 수 있었다. 글라우콘의 질문에 답할 수 없어도,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그는 의무처럼 날았다.

여우는 이리세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야, 까르마조프에서 조시마 장로는 왜 그렇게 모욕적으로 죽은 거라고 생각해?”

이리세는 눈에 이채를 띄면서 반문했다.

“너는 까르마조프를 읽지 않았던 거 아냐?”

“아, 내가 궁금한 건 아니고... 친구가 묻길래. 그 녀석도 책을 좋아하거든. 네가 워낙 까르마조프를 칭찬하길래 그 녀석도 읽었던지, 읽었으면 어떻게 읽었던지 물어보다가 화제가 거기까지 이르른 거지.”

여우는 당황하면서 설명했다.

“흐응.”

“그래서, 왜 그렇다고 생각해?”

여우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는 이리세의 모습이 귀여운 편이라고, 하지만 역시 진지하게 사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답을 재촉했다. 이리세는 곧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답은 간결했다.

“욥은 왜 하나님을 믿었지?”

“에?”

“그렇게 말하면 돼.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 자세히 설명해도 무의미하겠지. 그걸 가슴으로 이해하는 사람만이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이리세는 그렇게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까르마조프도, 욥도 모르는 여우는 더 붙여볼 말이 없었다. 내일 이 답을 은결에게 전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아마 그때 은결이 이리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것이다.

“욥은 왜 하나님을 믿었지? -라고 말하던걸.”

다음날, 여우는 기대어린 얼굴의 은결에게 그렇게 답했다. 그 답을 듣고, 은결은 갑자기 눈을 감더니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도 호흡은 정리되지 않은 듯이 한 손으로 눈 주변을 감싸고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잠깐만, 화장실에 갔다 올게.”

“갑자기 배라도 아프냐?”

해설을 기다리던 여우가 조금 유감스럽게 물었다. 은결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뭐, 비슷한 거지.”라고 답했다. 대답을 한 후 은결은 교실을 빠져나갔다. 친구들의 시선을 뒤로 한 그는 곧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면대의 배수구를 막고 물을 쏟아냈다. 양 손으로 물을 그득 담아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표면의 열기를 식히혔다. 달아오른 사고가 가라앉는 기분이다. 그는 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얼굴을 들었다. 더러운 거울에 멍한 얼굴이 비쳤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일그러진 가운데, 자신을 향하는 자신의 시선만이 명료했다.

“...욥은 왜 하나님을 믿었지?”

여우에게 전해 들었던 대답을 반복해 본다. 가슴이 징징 울린다. 그 아이는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주체가 타자의 집합으로 존재하듯, 텍스트와 텍스트의 진정한 연결이 그것들 사이의 대결로서 성립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 눈이 뜨겁다. 욥은 왜 하나님을 믿었지? 까르마조프는 그것을 장엄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작이다.

욥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부유한 유대인으로, 사탄과 하나님의 내기대상이 된다. 사탄은 하나님이 그를 행복하게 했기에 그가 신실하게 행동할 뿐, 고난으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다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하여 내기는 시작된다. 욥은 모든 것을 빼앗긴다. 그는 고난에 고난을 겪는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꺾이지 않는다. 많던 아이들이 모두 죽고, 아내는 그를 힐난한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욥의 믿음은 무적이다.

-욥은 왜 하나님을 믿었지?

아아. 아름다운 대답이었다. 그것이 까르마조프의 핵심이었다. 그렇기에, 조시마 장로의 죽음은 그토록 모욕적이었다. 욥은 그 무수한 고난에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가졌던 그 모든 영화를 잃고, 고통이 그의 반려가 된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도 비참하다. 그의 시선은 곧장 썩은 냄새를 내며 의혹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의 신앙과 성스러움을 의심한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것일까? 고난이 욥의 신앙을 꺾지 못했듯, 어떤 모욕도 조시마의 성스러움을 해치지 못한다. 이반의 말이 아무리 논리적이어도, 그의 대심문관이 아무리 가슴을 울려도, 그게 어쨌다는 걸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욥이 하나님을 믿듯이, 하나의 정답은 존재한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괴델이 증명되었기에 수학의 실재성을 믿었던가?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수학의 기초를 붕괴시켰다. 그 순결한 믿음 앞에 증거는 필요하지 않다. 진정한 믿음 앞에서 고통도, 비극도 무의미하다. 도리어 믿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욥은 왜 하나님을 믿었지?

은결은 달아오른 눈을 감는다. 부푼 습기가 뜨거운 눈물이 되어 양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욥의 믿음은 무적이다. 가장 순결하고, 가장 완벽하다. 거기 그 무엇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그는 주어지는 것 없이 믿는다. 빼앗기면서 믿는다. 고통 받으면서 믿는다. 오로지 믿는다. 어리석게 믿는다. 그는 끝없이 협력한다. 무수한 배신 앞에서 끝없이 협력한다. 거기에는 기게스의 반지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답이 존재한다.

“......”

끼어들 여지없이 완벽한, 아름다운 대답... 그런 대답을 가진다면 의심없이 전진할 수 있다. 끝없이 나갈 수 있다. 행위에는 망설임이 없고, 발언에는 의혹이 없다. 망설임 없는 행위와, 의혹 없는 선동으로 세계를 거침없이 바꿀 수 있다. 고민 따위의 한심하고 저열한 것을 할 시간은 없다. 실천하기에만도 인생은 충분하지 않으니까. 세계를 변혁하기에만도, 생은 충분하지 않으니까. 끝없는 사랑. 끝없는 변혁. 끝없는 실천. 영구혁명. 그러나-

“......”

은결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는다. 욥은 왜 하나님을 믿었지? 여전히 가슴이 징징 울린다. 너무도 아름다운 대답이다. 슬픈 대답이다. 그토록 아름답기에 은결이 영원히 잃어버린 대답이기도 하다. 끼어들 길 없이 순결하고 완벽하기에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답변. 그래서 은결은 그 대답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때 같은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은결에게 기게스의 반지는 여전히 답변되지 못한 질문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을 찾아라.

명료한 관념을 지닌 이명이 뇌리를 지배한다.

*MichaelNK님의 추천에 감사! 힘입어 빠른 연재를 합니다! 이 글이 자국어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니, 기쁜 일입니다. 껄껄.

*유감스럽게도 이리세가 평범을 약간 넘어서는 외모인 것은 글의 진행상 매우 중요한 점이라서 여러분이 요구해도 바꿀 수 있는 설정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제가 에로게 라이터도 아니고 여자 등장하면 다 미소녀라고 굳게 믿으시다니, 좀 좌절. 물론 미소녀는 매우매우 좋아합니다만. 큼큼.

*은결이 30%를 유지하는건 실제적인 효과보다는 정치적 신념의 측면이 더 강합니다.

*성원!성원!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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