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93화 (193/300)

#   194-희망을 위한 찬가 - 도스도예프스키를 읽는 소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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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은, 그렇게 무신론의 ‘징후’들을 그 소설에 끌어 모아 드러내고 있지. 대표적인 인물은 이반이고, 그의 대심문관의 사상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무신론에 대한 논의는 글 전체를 지배해. 조시마 장로의 죽음 역시 그의 하나야. 그토록 신실하고 위대했던 이의 시신이 왜 저토록 모욕당할 수 있는가? 역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뭐, 이런 논리를 드러내고 있는 거지.”

화장실을 다녀온 은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우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별로 할 일도 없었던 기타등등도 근처에 앉아서 은결의 이야기를 들었다. 방금 은결이 보여주었던 동요의 정체를 잘 아는 쿠로사카도 흥미가 동해서 안 듣는 척 하면서 몰래 청강에 참여했다.

“이런 무신론에 대한 논의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야. 계몽주의가 전파된 시대적인 분위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지적인 발견들 역시 신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있었거든. 가령, 까르마조프의 본문에는 비유클리드적인 직선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거든. 그때 이미 포바체프스키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기초를 닦고, 리만이 리만기하학을 성립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성립이란 수학뿐만이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어. 그때까지 수학이란 유클리드를 중심으로 한 단 하나의 진리체계라고 이해되고 있었거든. 말하자면, 그건 ‘신’의 이야기였지.”

그래서 칸트가 수학을 분석명제가 아니라 종합분석명제라고 주장한 것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니까. 은결은 그렇게 머릿속에서 중얼거린 다음, 짧은 시간의 틈을 타서 화이트헤드를 생각한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서구의 일신론에 대한 전통이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본다. 신은 있고, 고로 진리는 있고, 고로 노력하면 우리는 거기 가 닿을 수 있다. 실제로 고전역학의 성전인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신을 향해 헌사 된 책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하나인 리만 기하학.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평행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리만 기하학의 공리다. 즉, 리만 기하학에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결은 다시 생각한다. 칸트는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외계인을 바라보는 주변의 눈길을 느끼며 은결은 "어흠" 하고 하던 생각을 끊고 말을 이었다.

“까르마조프의 형제들 가운데서도 이런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논의가 무신론에 연관되어 등장하고 있지. 또, 그때 이미 뇌에 대한 연구도 발전해서, 인간 정신과 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계적 연결의 모습에 대한 연구들도 속속 등장했어. 그래서 드미트리는 인간이 단지 뇌세포에 대한 전기적 자극에 의한 산물이라면, 그건 쓸쓸하지 않겠느냐고 절규하는 장면도 있지.”

약을 먹는 것만으로 심각한 정신적 고뇌는 치료될 수 있고,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면 양 뇌의 사고는 분리된 채 자신의 사고를 한다. 뇌에 대한 연구들을 접하는 일은 모두 쓸쓸하다. 어느 것 하나. 인간의 영혼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영혼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에는 언제나 편안함이 없다.

“음, 네 말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 일반이 무신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그게 왜 욥기와 연결된다는 거지?”

여우가 물었다. 은결은 답했다.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은 그 모든 무신론의 증후를 끌어 모아서, ‘처단’해 버리거든. 그것은 마치, 욥기의 고난과 같지. 욥은 모든 고난을 무적의 신앙으로 ‘처단’해 버리니까. 그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 진정한 신앙 앞에 고난이 무의미하듯, 진정한 신앙 앞에, 모든 무신론의 징후 역시 무의미하다는 거야.”

욥의 신앙은 무적이다. 또 은결은 가슴이 저리는 것을 느낀다. 그는 길게 숨을 쉬면서 징징대며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생각의 고리를 연결해 사고의 흔들림을 안정시킨다.

“거기서 더 나가, 도프도예프스키는 소설이기에 가능한 굉장히 극적인 방식으로 아무리 많은 무신론의 징후가 모이더라도 우리는 신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며 보여주지. 가장 이성적이던 이의 가장 비이성적인 몰락의 모습을 통해서. 이성은 그들을 구원하는데 실패해. 그러니까, 욥과 연결되는 거야. 이성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면면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치를 추구하고 살아가려 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는 없다, 고 그런 걸 말하는 거지.”

글라우콘의 질문에 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진리를, 신을 믿어라. 그것을 포기할 때 남는 것은 길가메시가 걸었던 불모의 세계다. 도프도예프스키는 그렇게 주장한다. 보편적 가치는 언제나 신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은결은 말을 끊고 음- 하고 침음성을 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어쩌면 앞으로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을지도 모르는 일동에게서 즐거움을 하나 뺏아가는 것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은결은 ‘저 새퀴 유령!’ 따위의 나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은결의 이야기에 살과 영혼이 분리되던 기분을 맛보던 일동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 사실 이건 말하면 스포일런데... 그래도 이걸 설명하지 않으면 까르마조프는 도무지 다 설명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은, 모르고 읽는다면 굉장히 뛰어난 반전 소설이기도 하거든. 이 ‘반전’이라는 것 또한 무척 절묘해. 그저 독자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마련된 반전이 아냐. 그건 완벽하게 소설의 주제에 봉사하기 위해 마련된 반전이야.”

하지만 이걸 이야기 하지 않고서는 까르마조프를 정말로 설명했다고 말할 수 없기에, 은결은 적당히 가감해서 설명하기로 했다. 사실 뛰어난 반전소설에 있어 ‘반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나쁜 짓이지만, 이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반전이란 흔히 독자의 예상을 훌륭하게 배신하는 작품에 대해 하는 이야기잖아. 그건 무척 유쾌한 지적 배신이라서, 어떤 작품들은 그 배신을 훌륭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이야기 전부를 투자하기도 해. 하지만 도프도예프스키의 목적은 그런 게 아냐. 그는 그러한 ‘배신’을 통해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봐라. 인간의 인식이란 이토록 하찮지 않은가. 우리의 이성은 진리에 가 닿을 수 없다. 부족한 지식은 어리석은 방식으로 진실을 왜곡하게 된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고 신 앞에 겸허해야 한다. -이렇게 말야. 그렇게 까르마조프는 소설의 모든 요소를 주제에 봉사시키고 있는 거야. 그 소설의 구성은 그것만으로도 예술이지! 기획되었던 2부가 쓰이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야.”

열정적인 은결의 까르마조프의 형제들 해설이 끝났다. 그의 마음 한 곳에서 ‘하지만-’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은결은 그것을 꾹 참고 억눌렀다. 그것까지 이야기 하는 것은 너무 이야기가 길어질 우려가 있다. 더구나 그 이야기는 고통스럽다.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일동은 여우를 제외하고는 ‘되게 재미없는 소설인 것 같다!’고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됐다. 실제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은 마치 추리소설 같은 요소가 강하고, 움베르토 에코를 찜쪄먹을 등장인물들의 말발 덕분에 어느 정도의 인내심만 있으면 아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걸작이다. 고릴라가 은결의 이야기를 다 들은 감상을 말했다.

“...내가 오늘 장주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주인가, 하는 말을 체험하게 될지는 몰랐다.”

비몽사몽간을 헤맸다는 소리다. 그 이야기에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은 좌절했다. 그나마의 위안은 여우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 정도였다. 하기야 질문한 당사자가 성실하게 들어주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여우는 주변의 기타등등을 “훗-!” 하는 눈길로 깔아보아 주고는 은결에게 말했다.

“음, 잘 들었어. 내가 교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건 없지만,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는 알 수 있었어.”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은결은 조금 쓸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교인이 아닌 것은 은결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욥과 까르마조프의 연결이 그토록 가슴이 저렸던 것은, 그것이 사실 교인이냐 아니냐와 무관한 삶의 근본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해도 공감하는 사람은 한줌도 되지 않겠지만. 문득 대심문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사탄의 제안을 거절한 예수의 선택이 소수의 위대한 자들을 위한 사치라고 울부짖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일용할 양식에 허덕이며 비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비루함을 해결해 주지 못한 채 무슨 자유며 사랑이란 말인가! 21세기인 지금도, 10억의 인구가 굶주리고, 한해 600만의 어린이가 굶어죽는다. 어린 여자 아이는 한 끼 밥벌이를 위해 사타구니를 열고, 남자아이는 하루 14시간을 일한다. 대심문관의 절규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것을--- 은결은 거칠고 어둡게 부풀어 오른 마음을 접는다. 여우가 다른 질문을 했다.

“아, 그런데 그렇게 되면 네가 이야기 했던 무신론과 이기적 유전자의 연결은 그 이리세라는 아이의 주장과는 다른거 아냐?”

“응.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그 아이가 연결되어있다고 말한 지점은 다른 곳이었겠지.”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그 아이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와 까르마조프의 연결은 무신론이기 보다는 기게스의 반지에 대한 문제인 것 같아.”

“기게스의 반지?”

“그건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이야긴데-”

그렇게 은결이 입을 열려고 하니 주변에서 반발했다. “아침부터 무슨 궁상이야!” “다른 걸로 해!” “니들끼리 놀지 마!” 은결과 여우는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고는 기타등등의 의견에 굴복했다. 어차피 기게스의 반지까지 이야기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부족했다. 곧 선생님이 들어올 것이다. 은결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야?”

“그- 이리세라는 아이,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네가 좀 물어봐 주지 않을래?”

그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에서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오오!” “뭐야! 이제 배신을 넘어서 바람까지 피려고?!” “이산가족 상봉이냐?” 다들 흥미진진한 모양이다. 은결은 물론 몽땅 무시했다. 여우는 잠시 어색한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일단 물어는 볼게. 기대는 하지 말고.”

“응!”

하지만 은결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은결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여우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책 읽는 척을 하며 은결의 이야기를 듣던 쿠로사카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은결이 누구와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든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긴데, 한심하게도 불쾌하게 가슴이 뛰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은결은 이미 ‘세연’이라는 연인이 있지 않은가. 또 쿠로사카는 거북함을 느꼈다.

*SFX123님의 감상에 감사! 성원에 힘입어 씁니다~

*은결의 해석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언젠가 여러분만의 까르마조프 읽기를 해 보시길 권합니다.

*은결은 6세 때 칸트를 공부했다고 앞서 나왔죠. 7세에 이기적 유전자는 사실 놀랄 거리가 못 되는데.

*그러고 저는 찌질대며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띄워주시면 곤란. 제 공부가 부족하단건 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라. 사실 저도 어디가서 아는 척 많이 하게 좀 지적이었음 좋겠습니다.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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