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05화 (205/300)

#   206-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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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체를 쫒으면서 은결은 헤겔을 생각한다.

-근대가 열리고,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르고, 68혁명을 거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이제는 전체성의 철학자로 비판받는 그를 생각한다. 정반합(正反合)의 끝없는 과정이 결국에는 절대정신으로 우리를 인도하리라고 이야기 한 그의 이야기가 사실은 모든 차이를 하나로 귀속시키기 위한 위장된 동일성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생각한다.

쿠로사카가 사념체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가며 사념체의 진로를 막는다. 갑자기 끼어든 그녀의 모습에 놀란 듯, 사념체는 주춤, 멈췄다가 방향을 꺾어 두 사람을 피한다. 하지만 은결은 이미 사념체가 도망갈 방향을 읽고 있었고, 사념체가 주춤거리면서 벌게 된 시간 역시 적지 않았던 덕분에 금세 접근할 수 있었다.

-엥겔스가 이야기 했듯이, 헤겔은 보수적인 철학자였다. 그는 어용 철학자였다. 독일 왕권의 정당화에 그의 철학은 사용되었고, 자유주의 운동을 억압하는데 또 사용되었다. 그의 절대정신을 향한 끝없는 상승이란 혁명적 운동은, 반대로 그 시대의 자유를 그 시대의 한계로 인정하게 함으로서, 그 시대의 악을 그 시대의 한계라는 뜻으로 ‘정의’라고 인정하게 하는데 사용되었다.

곧, 사념체는 피할 곳을 잃었다. 그것은 도주를 포기하고 다가오는 두 사람을 향해 이빨을 들이 내민다. 검은 바늘이 거꾸로 내리는 비처럼 일대를 휘감는다. 은결은 역장을 펼친다. 투명한 역장의 전면으로 검은 바늘이 충돌한다. 쾅쾅! 상당한 파괴력이다. 하지만 은결의 역장을 어쩌지는 못한다. 은결은 시선을 흘끗, 옆으로 돌린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는다. 쿠로사카는 검으로 그 바늘 같은 공격을 일일이 쳐내고 있다. 방어하기 위한 술법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검술 연습이라도 할 모양이다.

-그래도, 은결은 헤겔에 대한 비판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위장된 동일성에 대한 모든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헤겔은 칸트를 넘어서고자 했었다. 물자체를 말한 칸트는 인식이 그 곳에 가 닿을 수 없으리라 이야기 했고, 인식의 한계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이후 유럽 세계를 지배한다. 그런 칸트의 이야기는 쉴러와 셸링을 거쳐 헤겔에 까지 이르렀다. 고로, 헤겔의 문제의식은 단순하지만 중대한 것이었다. 그는 ‘진정한 인식’에 가 닿을 수 있는 철학적 체계를 만들어 내고자 했었다. 그는 무한한 정반합이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은결은 시선을 다시 사념체로 고정시키고 역장을 발 뒤로 강하게 생성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세게 밟는다. 역장이 강대한 에너지에 박살났고, 은결의 몸은 어떤 총탄보다 빠르게 날았다. 그의 전신으로 검은 사념의 바늘이 쏟아졌지만, 어느 것 하나 은결의 역장을 파괴하지 못한다. 사념체는 바늘을 쏟아내는 것을 멈추고 몸 전체를 늘인 것 같은 원추형의 거대한 사념덩어리를 은결의 앞으로 내민다.

-그런 시대였다. 아직, 정답에 가 닿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때에 모든 차이가 사실은 하나로 돌아가기 위한 예비된 모습이라는 것은, 진정한 인식을 향해 노력하던 헤겔로서는 당연한 해석이었다. 온전한 차이, 차이 그 자체. 융합될 수 없는 그런 차이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절대적’인 것이란 그런 것이기 마련이니까. ‘차이 그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극복 불가능한 무지가 심연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이 합의될 때에만 인정될 수 있는 개념이니까. 차이 그 자체. 그것은 결국 간섭 불가능한 타자라는 말이니까.

해 보자는 거지! 은결은 미간을 좁히며 싸늘하게 웃는다. 그는 허공에 역장을 발생시켜 한 번 더 밟았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던 은결의 속도가 한결 빨라진다. 운동에너지의 확산을 억제한 공간 내부임에도 대기 전체가 키이잉- 하고 날카롭게 흔들렸을 정도다.

-일 더하기 일은 왜 이가 되는 것일까? 몰라. 아무도 그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럴 뿐이다. 일 더하기 일이 왜 이가 되는지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했고, 최후에 남은 것은 증명불가능하다는 괴델의 선언뿐이었다. 불완전성 정리. 과학이 발달하고 발달하면, 우리는 우주의 모든 물질을 예측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우리는 고양이의 생사조차 진실로 확인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주의 원리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겨우 남아있는 것은 확률일 뿐이다. 불확정성 원리. 철저하게 완전한 언어의 사용으로, 모든 하잘것없는 철학적 문제를 제거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우리의 모든 언어는 허섭스레기 같은 개념을 얼기설기 조립해 만들어졌을 뿐이다. 언어와 세계의 일대일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있는 것은 가족유사성을 가진 게임의 규칙일 뿐. 철학적 탐구. 절대적(絶對的)인 무지를 인정하기 위한 기초는, 이렇게 마련되었다.

충돌. 꾸아아앙!! 원추형의 사념 덩어리는 은결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두부처럼, 솜 처럼, 푸딩처럼 무너졌다. 사념체의 본체는 위기감을 느꼈던지 충동함과 동시에 원추형의 사념 덩어리를 방기하고 몸을 피했기에 그 충돌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는 듯이, 도망치는 방향으로 쿠로사카가 뛰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예리한 검이 사념체의 동체를 가르기 위해 날았다. 사념체는 몸을 길쭉하게 펼쳐 그 공격에서 최대한 몸을 지키려고 한다. 빛이 공간을 갈랐고, 사념체의 몸 가운데 일부가 잘렸다. 쿠로사카는 살짝 입술을 깨문다. 이번 일격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시선을 돌린다. 이미 은결이 사념체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무지는 우리의 숙명임으로 모든 ‘이것’이라는 단정적 판단에는 언제나 ‘혹시’라는 타자의 공간을 마련해 두어야만 했다. ‘혹시’를 인정하지 않던 그노시스트들이 세계의 운명을 걸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이 ‘혹시’ 위에서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개념이 피어나고,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인식론적 기초와 모든 소수자들이 쉴 수 있는 대지가 마련된다. ‘앙-똘레랑스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똘레랑스’라는 이 시대 교양인들을 위한 좌우명은, 결국 극복 불가능한 무지라는 조건에서 파생된 하나의 가지다.

은결은 사념체의 중심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 무수한 사념이 그에게로 전달된다. 형언하기 힘든 복잡한 마음들. 그것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다만 ‘고통’이다. 결국, 사념체는 고통의 덩어리였다. 그 모든 고통을 느끼면서, 산산이 찢어질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으면서 은결은 다시 생각한다. 자신에게 들려주는 노래처럼 속삭인다.

-넘어설 수 없는 무지가 있다.

때문에,

결코 융합 될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가치판단 하지 마라.

이것이 옳다고,

저것이 틀렸다고,

이렇게 하라고,

저렇게 하지 말라고,

타자를 재단하지 마라.

타자는 타자일 뿐,

네가 아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무한한 상상력을 허용하라.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

무지(無知)만이 세계를 재단한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래.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은결은 숨을 싶게 들이키면서 주먹을 거둔다. 대기 중에 흩어져가는 사념체의 모습은 먹물을 머금은 안개 같다. “(수고했어.)” 쿠로사카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낸다. “(너도.)”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속삭임의 끝에, 무언가가 은결을 향해 희게 웃으며 말한다. ‘정말로?’ 열망이 뜨겁게 들끓는다. 은결은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태연한 신색으로 움직이고, 대화한다. 하지만 그 도중에도 열망이 마음을 침식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을 향해 마음은 아우성을 친다. 은결은 작게 이를 물고 자신을 향해 답한다. ‘정말로.’ 은결은 이리세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느낀다. 자로 그은 듯한 그녀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사랑스럽다.

세연은 달력을 바라본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붉은 원이 그려져 있다. 붉은 원이 그려진 날에 있을 일을 생각하는 세연의 얼굴은 붉다. 그녀는 달력의 날짜를 하나하나 세어본다.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세어본 날들을 시간을 곱하고, 분을 곱하고, 초를 곱해본다.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분으로 바꾸어 보는 데서는 머리가 복잡했고, 역시 암산으로 초로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계산은 토요일까지, 그렇게 많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을 뿐임을 알려준다.

“하아...”

하지만 마음은 급하게 뛰어서 그 길지 않은 시간을 길게 바꾸어 버리고 있다. 부푼 마음은 긴 상상의 행렬을 만들어 그 날을 연출하고, 그 연출 가운데서 무수한 대화와 표정을 그려낸다. 어느 것은 달고, 어느 것은 쓰고, 어느 것은 기쁘고, 어느 것은 슬프다. 창피하지만 기대되거나, 아프지만 감내해야 할 것들이 복잡하게 엉켜 있다. 어느 것이 그날의 모습이 될까? 그래서 그 날을 생각하는 것은 행복했지만, 동시에 무척 무섭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해 줄까.

내가 이렇게 입으면, 그는 이렇게 말해 줄까.

내가 이렇게 하면, 그는 저렇게 할까.

자신이 보내는 기호에 그가 어떻게 답해올지, 아무런 기약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답해 올 것 같기도 했고, 저렇게 답해 올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할 것이라 생각하면, 그는 동시에 그런 것을 좋아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달리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러한 소통의 결락이 오해가 되어 관계의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을 상상하면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 상상위에서, 상상력은 더더욱 부풀기만 해서, 그가 보내오는 모든 기호의 의미는 해체되었다. 평소 받아들이던 대로 이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들은 어떻게 이해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

두근거리는 마음에 붉어진 얼굴의 기대가, 무지 앞에서 흐려졌다. 세연은 한숨을 쉬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행위를 읽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부푼 마음은 상상을 키우고, 거기서 그는 해석 불가능한 신비처럼 드러나 있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 같았는데. 더욱 좋아하게 된 지금, 더욱 많이 이야기 해 보고, 더욱 많이 알게 된 지금, 도리어 모른다는 것이 뼈저렸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해체되었고, 알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방법들이 의혹에 침몰되었다. 그저 무지(無知)가 마음을 침식했다. 그래도 마음은 붉게 동그라미 친 토요일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간다.

“.......”

침대에 누운 소녀의 숨소리가 고르다. 세연은 곧 잠들었다. 복잡한 생각에 피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느릿하게 저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맹수처럼 무서운 얼굴로 중얼거린다.

“아- 제기랄.”

*필링님과 별빛 세공사님이 추천해 주셨군요. 감사.

*제가 가장 많이 읽은 철학 텍스트중 하나는 엥겔스가 적었던 ‘독일고전 철학의 종말과 포이에르바하’였습니다. 내용도 좋지만, 찌질하던 시절에 무엇보다 그거 대역본으로 영어 공부를 했거든요. 음. 생각해 보면 참 무모한 도전이었군요. 그때 는 것은 아마 영어실력이 아니라 근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본인이 직접 타자를 치신다면,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얼마든지 인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게 보내달라고 하시면 곤란. 그리고 이 글에서 수행이 쓰는 사설은 꽤 많은 텍스트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들 텍스트는 어느 정도 제가 소화해낸 텍스트지요. 하여간 완결나면 그것도 모아서 좀 정리를 해야 겠죠. 조금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연결이 좀 거친 부분도 있으니.

*지난 화에서 잡담이 본문을 잡아먹기에 잡담의 일부를 없앴습니다. 큼.

*추석이 멀지 않앗습니다. 이런 때에 작가에게 성원을 보내는 겁니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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