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희망을 위한 찬가 - 타자는 주체의 의혹에 머무른다.(15)
#
부엌에서 요리를 하면서 쿠로사카는 글을 읽고 있었다. 문득, 정말로 문득, 관심이 생겨서 학교에서 인쇄해온 은결 아버지의 이번 주 사설이었다.
-1998년, 프랑스의 시사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시장을 무장해체하자!’라는 타이틀의 사설을 게제한다. 이 사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것은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무소불위하면서 사회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국제금융시장의 힘을 비판하고,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시민지원을 위한 토빈세 과세연합이라는 새로운 NGO를 설립하는 것이 어째서 말이 안 된단 말인가? 노동조합과 수많은 사회, 문화, 환경 단체들과 협력하여 이 단체는 최종적으로 토빈세를 도입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연대의 이름으로.”
이 글은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오천통이 넘는 독자 편지가 날아들었고, 편집진은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98년 6월3일 파리에서 아탁이 결성된다.
토빈세란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이 1978년에 주장한 세금을 말한다. 이것은 장기투자 자금에 대해서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단기성 투기 자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함으로서 파괴적인 자본유동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에 따르면 토빈세가 세계적으로 도입될 경우 1400억 달러의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며, 그것을 통해 세계의 수많은 비참 중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아탁의 기본적인 목표는 각국이 이 토빈세를 받아들이도록 광대한 세계적 규모의 연대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때때로 비현실적이라 비판되는 이 운동은 그러한 아우성에도 무관하게 성과를 내고 있다. 최초로 캐나다에서 토빈세를 도입한데 이어, 2001년 11월 19일 프랑스 의회는 토빈세 도입에 찬성했고, 2004년에는 벨기에에서도 이를 도입한다. 지금은 유럽 연합 차원에서 토빈세를 도입하는 것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갈 길은 여전히 멀지만, 조롱되던 것 처럼 불가능이 아님을,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탁의 목표는 그 이상이다. 진정하고 거대한 연대를 위해 아탁은 단순한 시민연합을 넘어선 거대한 문화, 교육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규모의 스터디 클럽이며, 문화운동이며, 시위대이자, 정치집단이다.
자신을 둘러싼 시스템을 이해해야만 대처 방안을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이 처한 현실에 어떤 감정을 담아야 올바른 것인지 알 수 있기에 그들은 경제적 문맹 퇴치에 열중한다. 무지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악이다. 그 이해가 분노나 슬픔과 같은 감정적 뜨거움이 될때 실천으로 옮아갈 수 있기에 그들은 그들의 운동과 관련된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한다. 이 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감정적 공감의 띠가 더 넓고 굳건해 지도록. 그리하여 아탁은 모든 이들에게 이 연대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익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랑스의 로베스피에르 거리에 있는 아탁 포스터는 이 운동의 성격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 그렇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정치적 무기력과 혐오, 그리고 경제적 무지에 잠식된 티티테이먼트의 디스토피아는, 그리하여 결국 파시즘의 공포가 이면에 도사리는 신화적 세계는 거절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지금 이 세계를 거부한다. 아탁은 다른 세계를 위한 작은 고리의 이름이다. 이 고리에 아탁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아탁이란 하나의 상징이다. 중요한 것은 이 상징이 의미하는 기의, 결국 ‘연대’다. 이 세계는 단순하다. 전 세계의 하위 80%가 단결한 세계다. 그들은 거대자본의 폭력을 잃을 것이고, 민주화와 민주주의가 일치하는 다른 세계를 얻을 것이다...
다 읽고, 쿠로사카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경제에 대해 그녀가 아는 바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이 ‘연대’라는 말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대’ 함께함.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본에 있을 때, 때때로 접한 문장이다. 그때는 빛바랜 사진의 삭아가는 모습 같은 문장이라 느꼈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아니, 생동감이랄 것 까지는 없다. 하지만, 그냥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아무리 꾸깃꾸깃 구겨진 사진이라도, 언젠가 다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이다.
이어서, 쿠로사카는 음식의 맛을 본다. 혀로 스며들며 퍼지는 음식의 맛은 부드러웠다. 은결이나 은결 할아버지에 비하긴 힘들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았다. 자기 입에는 좀 짠 듯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국인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쿠로사카는 베란다로 나갔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도시의 모습은 활발하다. 이 푸르름 아래에, 그리고 이 활발함 안에서, 은결은-
‘-데이트를 하고 있겠지.’
쥐고 있던 난간이 박살나지 않는 것은 그녀의 수양이 깊다는 증거다. 쿠로사카는 짤막하게 심호흡을 하고 하늘을 높게 바라본다. 막힘없는 하늘로는 구름이 떠다닌다. 가을의 구름은 옅어서 수채화를 그려놓은 것 같다. 머지않은 곳에 느긋하게 떠가는 비행기의 모습도 보인다. 하늘을 보면서 쿠로사카는 두 손을 모으고 잠깐 기원한다.
‘벼락이라도 맞기를.’
그리고 쿠로사카는 눈을 뜬다. 하늘은 맑아서 도저히 벼락을 맞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유감이다. 뭐,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할 일도 많은 주제에 놀러 다닌 다는 것은 역시 경박한 것 같다. 다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암. 아니고말고. 그리고 쿠로사카는 아래를 바라본다. 사람과 차의 부산한 움직임은 여전했다. 토요일이니만치 더욱 그러하리라. 놀이터 쪽에는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쿠로사카는 찬찬히 그 아이들을 살폈다.
‘아, 있구나.’
그녀는 아이들 틈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극장에서 나오면서 은결은 몸서리를 친다. 옆에서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왜 그래?”
“아니, 갑자기-”
은결은 설명하려다가 그냥 말꼬리를 흐렸다. 설명해 봐야 무의미한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등골을 타고 흐르는 불안함 같은 것이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특별히 무서운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연애 영화를 봤다) 무서운 영화라고 해 봐야 평소 활동하는 세계가 세계이니만큼 은결에게는 그저 하품이 나올 뿐이다.
“음, 아냐.”
하지만 세연은 은결의 말을 흐리는 모양새를 보고 다시 마음을 조인다. 저 표상이 이면에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려일까? 무시일까? 포기일까? 어느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행위의 맥락은 틀림없이 틀어 맞춰졌고, 정답 없이 주어진 해석의 갈래 앞에, 마음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막 끝난 영화의 내용 때문에 한 층 더 그러한 불안이 가중되는 것 같기도 했다. 세연의 마음은 모른 채, 은결은 의례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영화는 재밌었어?”
“응. 재밌었어. 기법적으로 세련된 게 특히 좋았어. 미장센이라고 하나? 그런 것들이 충실히 추구되면서 그것들이 영화의 이야기와 겉돌지 않는 게 좋았어.”
서둘러 불안을 정리하고, 세연은 답한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 평범한 연애영화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아주 괜찮던걸.”
두 사람이 본 영화는 평범한 플롯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 연애영화였다. 사랑과 오해와 반목과 화해라는 전형적인 도식을 따르지만, 그 전형성을 세련된 연출로 덮음으로서 그 전형성이 촌스러움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잘 정리하고 있었다.
“특히, ‘담배’를 상징으로 사용해서, 두 사람의 오해의 시작도 그것으로 시작하고, 두 사람의 화해도 그걸로 끝내면서, 결국 마지막에 그 담배를 보여줌으로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멋지다고 느꼈어. 그 담배를 마지막에 보여준 것은, 그들의 앞길에는 여전히 오해가 만재할 것이고, 오해가 만재한 만큼, 사랑도 계속될 거라는, 그런 걸 이야기 해 주는 게 좋던걸.”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은결은 ‘어라?’ 하고 느낀다.
“이건 개인적인 감상인데, 그 영화를 보고 세상에는 기호가 너무 적다고 느꼈어. 행위는 무한한데. 그래서 하나의 기호가 담을 수 있는 의미가 너무 많아서, 마음은 언제나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아. 그래서 판단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판단에는 오해가 따르는 것 같아. 영화가 보여주었던 것 처럼 말야. 기호에 의미를 둘 수 있는 방식은 너무 많아.”
“아, 아아.”
은결의 ‘어라?’는 점차 경악이 되어간다. 세연이 이런 여성이었던가? 그녀는 부드러운 기품을 느끼게 하지만 특별히 지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은결은 기억한다. 그녀의 이 말은 혹시 자신을 고려해 미리 예습 같은 걸 해온 것일까? 아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예습, 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고,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그녀의 말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어딘가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티는 나지 않았다.
“은결?”
“응?”
불안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은결은 고개를 돌린다.
“저, 혹시 내 이야기 재미없었어?”
“아니. 재밌었어. 하지만 의외인걸, 언제부터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된 거야?”
은결은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어느 쪽이냐 하면, 세연의 이야기는 은결 취향이었다. 그는 이런 이야기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기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가 아는 세연은 이런 여성이 아니었다. 그 갭이 당혹감을 일으키고 있다. 세연은 은결의 물음에 조금 곤혹스런 표정을 보이고 답한다.
“에, 글쎄? 자연히 떠오르는 감상이었는데. 뻔, 한 이야기였잖아.”
“아, 그래.”
은결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 현상은 틀림없이 푸른 이빨과 관계가 있을테니, 그를 족쳐야겠다고!
*이번 챕터 아직 안 끝났습니다. 큼큼.
*성원해 주시는 분들게 감사를 드리며, 성원을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