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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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는 펜을 쥐고 책상 앞에 앉아있다. 스탠드의 하얀 불빛으로 밝혀진 책상 위에는 책과 공책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가장 위에 묵묵히 펼쳐진 것은, 하지만 성경이다. 여우는 펼쳐진 성경을 바라보며 고민한다. 앎과, 이성과, 선악과, 지혜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그것들이 깨끗한 하나로 연결될 때, 선악이 곧 지혜로 바뀌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손아귀에서 우왕좌왕 혼돈스럽게 오가지만, 그래도 손아귀에 있을 뿐이다. 정리를 시작하기 위한 첫 단추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말하는 자 만이 지혜를 가질 수 있다.
“말이... 창조한다.”
하나님은 말로서 세계를 만들었다. ‘빛이 있으라.’ 말이 빛을 만들어 세계를 이루었다. 말이 곧 이성이라면, 이성은 곧 창조하는 능력이라는 말인가?
“창조하는 이성...”
하나님은 이성으로서 무엇을 만드는가? 세계를 만든다. 허무로부터 존재로의 전환. 없던 것이 있게 되는 기적. 창조의 권능. 이성의 권능. 판단하는 권능이 지혜라면, 이 지혜의 권능이 이성이라면, 이 이성의 권능은 곧 창조의 권능인가? 그렇다면 이성과 창조가 말과 같은 것으로서 지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선악과 어떤 연결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선악이 창조된다? 그럴 리는 없겠지. 선악이 창조되는 것이라면, 앎이 인간의 의무로 연결되는 것은 이상한 말이다.
“앞으로 조금...인데.”
머릿속이 멍하다. 여우는 무미한 눈길로 성경을 뒤적거린다. 열심히 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창세기 부분은 종이가 많이 구겨져 있었다. 이렇게 한 달만 보면 다 헤질지도 모르겠다. 무미한 눈길의 무미한 묵독 사이로 문득, 문장이 깊게 스친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아담과 이브는 처음에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끄러워 한 것은 선악과, 지혜과를 먹게 된 다음의 일이다. 여우는 확인을 겸해 무력하게 페이지를 넘긴다. 페이지가 펼쳐지고 문장이 드러난다. 빽빽한 검은 기호의 숲에서, 눈이 밝아져,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다는 부분이 있는 것을 본다.
“...지혜과를 먹고 겨우 짐승에서 벗어났다는 말이군.”
벌거벗고도 창피를 모르는 것이 짐승이다. 그들은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어디서나 흘레붙는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됨이라는 것은 매우 흔하고 필연적인 논리다. 문명은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거기서 은결이 생각났다. 은결이 오늘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와, 그저께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순수하게 웃으며, 의심 없이 기뻐하며, 우정과 선의로서 그는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여우는 은결이 짐승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치 지혜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래서 창피함 없이 옷을 벗고 지내는 짐승 같다.
“......”
은결은 바보다. 여우는 다시 은결이 짐승처럼 웃으면서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여우는 이를 문다. 견디기 힘든 것이, 치솟는다. 아픔과도 닮은 비감들이다. 은결이 해준 이야기들, 자신을 향하는 태도들, 그의 명료한 지성이, 그 높은 곳의 시선이... 그곳에서 고양됐었다. 싫다. 짐승 같은 것은... 떨쳐낸다. 단호함을 반복한다. 은결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 아니, 새벽의 은결네다. 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할아버지와 은결은 새벽에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떠냐?”
“괜찮을 것 같네요. 얘기해 볼께요. 미래가 좀 걱정이지만.”
할아버지의 말에 은결은 놀랐지만 곧 긍정했다. 다음 주 쯤에 쿠로사카를 집에 초대해 보지 않겠느냐 하는 것 정도는, 좀 특별한 제안이긴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신세진 것도 있고 집안끼리도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미즈하라를 제외하면 직접적인 면식은 없지만 쿠로사카는 이세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가문이고, 은결네는 수행이 워낙 유명했다. 이 참에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흠, 그리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
“그- 쿠로사카하고는 요즘도 친하게 지내고 있느냐?”
조심스럽게 말한다 했더니, 겨우 이런 정도의 물음이라니. 은결은 다소 맥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담담하게 말한다.
“그야. 그녀는 소중한 사람이죠.”
“끌끌. 아깝구나. 그런 말은 본인 앞에게 해 주면 더 좋아할텐데.”
은결의 답에 할아버지는 안타까움과 기쁨을 함께 느낀다. 저런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사이를 이야기 해 주는 것 같아서 기쁘지만, 아껴뒀다가 본인에게만 해 주면 더 기뻐하리란 건 분명하지 않겠는가. 말도 경제성을 고려해야 한다. 부도수표처럼 저런 말을 남발하면 기쁨이 덜하다. 하지만 은결은 할아버지의 속내는 모르고 피식 웃으며 가볍게 그 말을 내친다.
“좋아하긴요. 잡아먹으려 드는데. 예전보다는 확실히 많이 나아진 것 같다고 느끼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가 마땅치 않은 것 같아요. 하기야 밉보일 짓을 이것저것 하기는 했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곤혹스런 얼굴로 할아버지는 묻는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대련 같은 거 하면 쉽게 느낄 수 있어요. 그 애가 저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는. 학교 옥상에서 되게 많이 당했어요. 원수 두들겨 패듯 얻어맞은 적도 있고, 말 그대로 벌레 밟히듯 밟힌 적도 있고. 뭐 그래도 정말로 많이 나아졌어요. 다른건 서서히 고쳐나가야 할 일이겠죠.”
은결은 자신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아한 얼굴로 한숨을 섞어 답한다. 할아버지는 그제서야 자기 손자가 10년짜리 왕따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은결은 가족이라는 직설적인 감정의 교환이 주를 이루는 공간에서나 인간적인 것들을 경험했다. 눈치코치가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천재인 덕분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그것으로 인해 천재가 아닌 이들과의 교류가 힘들었을 텐데.
“그건... 아니 됐다.”
할아버지는 설명 하려다가 만다. 사실 그 아이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은결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서둘 필요는 없다. 대신에 질문을 바꾼다.
“그리고, 세연과는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느냐?”
“아... 예. 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일도 만나기로 했고...”
은결은 약간 말을 흘리며 답한다. 부담스런 물음이다. 떳떳하지 못한 연애라는 건 다른 사람은 모두 몰라도 자신은 알기 때문이다. 은결은 세연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도 친구의 한 사람이고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것은 연애감정과는 다르다. 그 연애는 그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노련한 연륜의 힘으로 은결의 말에 묻어나는 초조와 부담감 같은 것을 인식은 했지만 정답과는 달리 해석하고 기쁘게 생각했다. 말하자면, 은결, 세연 커플이 머지않아 깨질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느낀 것이다. 세연이란 아이도 좋았지만, 역시 할아버지는 쿠로사카 쪽이 마음에 들었다. 10년짜리 왕따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어디란 말인가! 사악한 아들이 마음을 흔들었지만 알아본 결과 해결 방안은 여럿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직 어리니 연애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의무감 같은 게 아니라 좀 더 네 마음가는대로 해도 좋을 게다.”
“알겠습니다.”
은결은 할아버지의 말을 그저 덕담이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만족하고 집을 나섰다. 가을의 차가운 새벽 공기는 어딘지 단맛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어스름한 하늘의 깊은 암청을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노시스트...’
마음에 심어진 불안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고요와 일상은 안온하게 반복되고 자리를 잡았지만,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함께 한다. 그것은 때때로 초조가 되어 마음을 괴롭힌다.
그노시스트.
그들은 강하다. 기꺼이 세계를 부정하면서, 그 부정을 외부로 실천하는데 망설임이 없다는 데서, 그들은 심지어 불교의 술법을 최고수준으로 공부한 이들조차 때때로 능가하는 힘을 구사한다. 무엇도 그들을 구속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발전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리우스 파 척결이 세계를 건 싸움으로 발전해야 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다른 파의 술법도 시간의 흐름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지 않았는가. 암약해야만 했던 그들을 여전히 두려워 해야 할까? 두려워해야한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어느 곳 보다 강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확신한다. 그들의 강함이 어떠한 것일지는 수행을 생각해도 알 수 있다. 그노시스트의 술법이 지니는 기본적인 방법론은 수행의 그것과 많이 흡사하다. 당연하다. 그들이 서양 연금술의 원류이며, 수행은 그 연금술을 현대에 발전적으로 참고해 독자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런 아득한 힘을 이루었다. 수행의 천재성을 고려해도, 그들의 방법론이 무척이나 특별하고 뛰어나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행이 다른 방법론을 물리치고 그들의 것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그들은 불완전하나마 아담의 언어까지 사용했다.
‘...지나치게 정의롭지.’
할아버지는 혀를 찬다. 그노시스트는 정의롭다. 그들이 정의로움과 사랑에 충만한 자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정의와 사랑을 위해 얼마든지 웃으며 죽을 수 있고, 실제로 그러했다. 확고하게 정의롭고 사랑하기에, 그들은 ‘혹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세계를 부정하는 그들은 세계 전부와 투쟁했다. 정의를 위해, 진리를 위해, 양보 없이. 무적의 신앙으로 욥처럼 강인하게. 그들은 죽음이나 고통에 슬퍼하지 않는다. 그노시스트는 오로지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만을 슬퍼한다. 그노시스트의 강인한 독선에, 사익에 대한 욕구는 한 점도 없다.
‘그래서, 더 문제지. 타협이 불가능하니.’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든, 은결과 충돌해야 한다. 그들이 기획하는 것은 가장 작은 범위라도 인류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고, 인류의 개선을 목표로 투쟁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할아버지는 하다못해 그들의 재출현이 먼 훗날이길 바란다.
*애혈향님의 추천에 감사! 그나저나 소란을 피해 정담을 떠났더니 한담에서 그걸 겪다니, 그저 좌절. 으앙.
*수능 치신 분들은 좋은 결과가 있었길 바랍니다.
*이번 챕터도 끝나갑니다. 앞으로 10화 안에는 끝.(...) 그러면 마지막 챕터 ‘희망을 위한 찬가’로 이동하겠죠. 아니다. 외전도 하나 적어야지. 하여간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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