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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34화 (234/300)

#   235-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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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말이 세상을 창조한다.

금단을 범하고 부끄러움을 알았다.

지혜과는 선악과이다.

지혜와 선악을 알게 되면서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말은 이성이다.

이런 파편들이 지속적으로 얽히며 상을 이루어 나갔다. 정확한 상을 이루어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줌의 ‘이것’을 쥘 수 있었다. 성경을 다시금 읽던 중에, 거기 겹쳐 한 사람이 떠올랐고, 그래서 어떤 벼락같은 것의 스침이 꺼끌꺼끌하던 파편의 먼지를 모두 훑어내고, 맞물림의 형태들을 드러내 주었다. 고통스런 희열이었다. 여우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맞추었고,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말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말은 곧 이성이고, 이성은 그런데 지혜이고, 그런데 이 지혜는 선악이기도 한데, 선악이 지혜라는 것은 분별이 지혜라는 것이고, 분별이 지혜라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이고, 부끄러움은 그래서 이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은결이 떠오른다. 갓 태어난 짐승처럼 자신을 바라보면서 웃어주던 친구의 얼굴이다. 여우는 이를 물었고, 이렇게 말을 흘렸다.

“네, 잘못이야. 내 앞에서 알짱거린...”

그래. 은결의 잘못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안 되었다. 고통스럽게 자신을 직면하면서, 그 직면에 대해 여우는 그렇게 말한다. 은결의 잘못이었다. 자신은 짐승처럼 웃을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원죄를 범했다. 그래서 누구나, 부끄러움을 안다. 그렇잖아. 그는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짐승 같은 너의 잘못이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냐. 그럼. 그래서 너는 그렇게 대단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너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너는 끝없이 사소하다.

“나는, 아무 것도 잘못 하지 않았어.”

스탠드의 허망한 불빛 아래 중얼거림을 가랑비처럼 흘리며 여우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쁘게 이어지던 사고는 결국 마지막에 불꽃같은 괴로움으로 종결된다. 하지만 평소에 은결이 하던 이야기 중 일부는 이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 예술은 언제나 자기 보기인 모양이다. 소외됨 없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자신의 행위는 결국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맞물린 조각 어디에서 의혹은 없고, 의혹 없는 전체상이 드러내는 자신의 모습은 단순한 정답이 아닌, 무수한 의미, 결국 ‘나’ 자신의 연합일 수 밖에 없다.

“또, 은결인가...”

방을 나서며 여우는 피식 중얼거린다. 마치 전거처럼 은결이 떠오른다. 그가 했던 이야기, 그가 했던 행동, 그가 보여주고 들려줬던 것들이. 자신이 이루어낸 것들이 그를 향한 상 앞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달려간다. 그래서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어때’하고 말한다. 싫다. 불쾌하다. 사실 은결은 시시하니까. 그 녀석은 아무 것도 아냐.

여우의 책상 위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다. 펼쳐진 성경에는 볼펜으로 길게 줄이 하나 쳐져 있었다. 그 부분은 ‘눈이 열려 알몸인 것을 알고’ 였다.

토요일 아침, 은결과 미래는 언제나 그러하듯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고 있다. 시리듯 푸른 아늘 아래, 가을바람은 한결 차가워지고, 길의 가로수는 메마른 다채색 죽음을 길 위로 뿌려 새하얀 시절을 대비한다.

차가운 바람에 얼굴을 살짝 찡그리다가 은결의 등에 얼굴을 묻기를 반복하던 미래는 후하- 하며 크게 숨을 쉬고 고개를 든다. 건물과 사람이 자전거의 뒤로 무심하게 흘러간다. 다들 자신의 하루를, 그래서 일생을 쌓아가기 여념이 없다. 바람을 타고 높이 오르는 낙엽이 보였다. 그녀는 여름철 그러했을 풍성한 초록은 이제 없고, 화려할지라도 가냘픈 색조만이 머물러 있는 그 잎에서 아련한 슬픔 같을 것을 느낀다. 가슴을 푹 찌르는 감각. 왜 그럴까?

“......”

멍하니 낙엽을 바라보며, 다시 낙엽을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찾아드는 아스라한 고통 같은 것을 생각하던 미래의 눈망울로 건물이 들어선다. 가을이 그 촉촉함을 앗아가지 못하는 발랄한 눈망울에 맺힌 건물의 상은 한 슈퍼의 것이다. ‘점포세’라는 글이 하얀 종이에 적혀 푸른색 셔터 위에 붙어 있다.

“오빠.”

“응?”

“언젠가 수업 시간에, 소비가 미덕이라고 배웠거든.”

“아아. 케인즈의 승수이론에 기초한 말이지. 간단히 말해서 자본의 회전율이 빨라지면 같은 기간 동안 개인이나 국가, 기업이 얻을 수 있는 돈의 총액은 늘어나게 되니까.”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그런 것도 그 말에 적용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투자가 늘고, 일자리가 늘고, 그런 게 가능해?”

“안 될 건 없지만... 훨씬 효과가 약하겠지. 이미 생산력이 소비를 한참 넘어서는 시점에 와 있기 때문에 기업이 거둔 이익이 다시 투자로 전환되고, 그것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고전적인 도식은 잘 맞지 않거든. 그것이 아니더라도 기술의 발달로 투자에 대비해 필요한 인원은 훨씬 더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주로 비정규의 단순직종이지.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유동자금이 400조를 넘길 이유가 없겠지.”

은결은 시니컬하게 답한다. 승수이론은 자본이 회전해야 하는 무대가 ‘세계’가 되고, 국가의 역할에 대한 최대한의 축소가 주장되고, 자유무역이 부르짖어지면서 잘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 승수이론에 기초한 완전소비와 완전고용이란 케인즈 주의의 이념은 강력한 국가를 가정함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대 국가와 관료주의의 비효율은 실재한다. 그러나...

“흠... 그럼 사람들이 대형마트 이런 거 이용하는 건 제살 깎아먹는 거야?”

“넓은 시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건 소규모 자영업자를 몰락시키니까. 그리고 소규모 자영업자는 지역 경제에 자신의 자본을 많이 다시 사용하게 되지만, 대형 자본은 그렇지 않거든. 심지어 다국적 기업의 수입은 국가 외부로 빠져나가게 되지. 그런 게 많이 모이면 중산계층의 몰락과 내수 시장 자체의 위축으로 이어지겠지. 말하자면, 양극화가 일어나는 거야. 하지만 소규모 자영업자의 몰락은 막을 수 없을 거야. 그것이 설령 제살 깎아먹기라고 해도, 그리고 알고 있더라도, 사람들은 대자본이 구축한 시장을 사용할 테니까.”

“왜, 그럴까?”

“그야, 싸고 편리하잖아.”

가을바람보다 차갑게 은결은 말한다. 그렇다. 싸고 편리하다. 그래서 대형 마트는 승리한다. 재래시장을 간단히 무너뜨린다. 그것이 종국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발밑을 무너뜨리게 되는 치명적인 양극화를 이루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다국적 초대형자본을 사용한다. 폐해는 멀고 아득한 곳에서 소리죽인 채 다가오고, 이득은 바로 눈앞이다. 의식은 결코 존재를 구성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다들 알게 되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미래는 얼마 전 은결이 해 줬던 붉은 여왕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딘가 슬픈 어조로 말한다.

“무리야. 그런 걸로 막을 수 있다면...”

거기서 은결은 고통스럽게 한 숨을 쉰다. 걸려서 토해지지 않는 마음.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사람은 왜 자신을 벌레라고 생각해야 했더라? 오랜만에, 세계가 일그러진다. 배신자. 배신자가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은결은 이를 악문다. 구토감이 치민다. 집어치워! 그는 겨우 그것을 견뎌낸다. 그리고 말한다.

“...이건 환경오염 같은 거야. 자연을 착취해 사용할 때는 좋지. 하지만 꽤 즐긴 덕분에 이제는 온난화로 파멸적인 미래가 예고되고 있잖아. 그런데 다들 그 결과를 알지만, 그래도 환경오염은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지. 막을 수 없어. 이걸 좀 더 정석화한 모델로 만들면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아아. 알아. 공유지에서 낚시하도록 해 두면 사람들이 마음껏 잡아가서 공유지가 황폐해 져서 결국 다 같이 손해를 입게 된다는 거지?”

“그래. 이익은 개인이 가지지만 그에 대한 손해는 전체가 다 함께 지게 되지. 더구나 그 손해는 당장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걸. 합리적인 개인은 결코 공유지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거두어들일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공정하게 공유지를 사용하려던 사람도 그런 자를 보게 되면 억울함을 느끼겠지. 그래서 그도 합리적인 이기주의자로서 행동할 테고. 그를 막을 수 없다면, 그 처럼 행동해야 최소한 덜 손해를 볼 테니까. 이렇게 합리적인 행동의 합은 합리가 아냐. 도리어 무수한 합리가 모여 최대의 비합리가 이루어지지. 환경오염처럼.”

그래서 글라우콘의 질문은 대답되어야만 했는데. 합리가 모여 비합리가 되지 않도록, 비합리를 합리로 설명해 내고, 합리의 정체를 비합리로, 설명해 내어야만 했는데. 기게스의 반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못한 질문이고, 기게스는 반박되지 못했기에 우리 모두는 반지를 낀 기게스가 되기를 갈망하며 살아간다. 나는 다만 끝없이 이기적이 될 테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 줄 거야. 나는 끝없이 게을러 질 테다. 내게 주어지는 것이 없기에 힘들여 수고할 이유가 없다. 이건 내 일이 아냐. 차라리 도스도예프스키를 긍정해야 했던가. 그 오만과, 독선의---

다시, 일그러짐.

“음...”

은결의 말을 끝나자 미래는 숙고를 시작한다. 은결은 더 말하지 않고 자전거를 모는 데만 집중한다. 시계가 어지럽고, 속이 안 좋다. 곧장이라도 게워내고 싶다. 토요일 아침부터 고통스럽다. 그 가운데서 그는 팃폴텟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라면 최선은 바랄 수 없고, 조정자는 없다. 그렇다면 차선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인데, 이 차선의 결과는, 기껏해야 비극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참혹한 비극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긍정하는 것은, 역시 슬픈 일이다.

‘기껏 손을 얻었는데.’

그래. 기껏 손을 얻었는데. 기껏 그런 가능성을 가졌는데. 진정한 자유는 그곳에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공유지는 파멸할테고, 재앙은 우리 모두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죄 있는 자, 죄 없는 자를 가리지 않는 재앙이다. 하지만 정말 죄 있는 자는 도리어 재앙에서 가장 덜 피해를 입겠지. 그들은 그 합리적인 선택으로 쌓은 것들로 자신들을 위한 성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죄 없이 착취당한 이들만이 고통 받아야 한다. 아니, 착취는 없던가. 수요와 공급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그곳에 착취는 없지 않던가. 모든 것은 정당한 거래다. 13살의 어린여아가 그날 밥값을 벌기 위해 가랑이를 벌려야 하는 것도. 어쨌거나 죄 없는 자들의 피값 위에, 죄 있는 자들이 살아갈 것이다.

역사가 끝난 이상, 타자가 승리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샤니스님의 추천에 감사~ 추위를 무릎 쓰고 열심히 쓰겠음. 그나저나 요즘 컴퓨터실이 추워서 글 쓰다보면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요. ㄷㄷㄷ;

*해설이라... 용어해설만 해도 남경태씨의 개념어 사전 정도 분량은 나올 텐데, 해설이라니;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심 곤란. 글 수정하기도 빡빡한데...; 그리고 개인지는 제가 아직 어디 알아보거나 한 게 아니기 때문에 6만원이라던가 하는 사항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진 마세요. 사실 300분이 되는지도 아직 조사 안 했는데;

*하지만 역사적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지금까지를, 경제사적으로 고전 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까지를, 과학사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에서 확실성을 찾다가 좌절되고 지금에 이르는 여정을, 철학사적으로 욕망의 문제를 중심으로 칸트에서 들뢰즈까지 쭉 다루면서 이것들이 어떻게 상호 조응해서 ‘현대’를 만드는지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야망은 있었습니다. 한 20년 정도 열심히 공부하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죠. 아니 20년 가지곤 무린가.(무릴 것 같다.) 이 글은 그런 좌절된 야망의 한 파편 같은 성격을 약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덜덜. 아, 추운데 감기 조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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