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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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먼 곳에서 금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영을 맞이한다. 완성된 아름다움의 한 총체처럼 섬세한 선을 품고 대기를 가르는 그 인영은 쿠로사카다. 그녀는 은결과 합류하자마자 다소 쌀쌀맞은 안색으로 툭, 던지듯 말한다.
“(굳이 나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고마워. 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내 일이니까.)”
‘내 일이니까.’ 잘 닦인 키리야미의 날처럼 차가운 말에 가슴 속에서 욱, 하고 무언가 치솟으려 함을 느낀다. 내 일이라니, 내 일 네 일을 굳이 갈라야 하는 건가? 쿠로사카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말로 은결을 냅다 찌른다.
“(그런 태도는 그만 둬.)”
“(아...)”
은결은 놀란 표정을 한다.
“(응, 헤헤, 응.)”
이어서 그는 그녀가 화내는 이유를 이해한다. 그래서 기뻐하며 쑥스러워한다. 그 모습이 쿠로사카에게 낯간지럽고 창피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은결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뭐야, 이래선 내가 마치 대단한 말이라도 한 것 같잖아.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닌데. 시시하고, 사소하고, 아무 것도 아닌--
“(쿠로사카 다 왔어.)”
차분한 안정이 옅은 긴장과 함께 하는 목소리로 은결이 고한다. 쿠로사카의 걸음 역시, 목적에 근접해 부드럽게 속도를 죽이며 한 순간의 폭발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도심의, 상당히 넓은 공터의 한 가운데 묵묵하게 떠 있는 사념체였다.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양 돌아다니고, 차들은 분주한 마음을 바퀴로 돌리지 못해 짜증스런 경적만을 눌러대고 있었다.
-평범한, 사념체였다.
“(뭐, 쉽겠군. 얼른 끝내도록 할까.)”
키리야미를 부드럽게 들며, 쿠로사카는 말한다. 은결은 진중한 안색으로 그녀의 방심을 질책한다.
“(유리에, 어떤 경우라도 쉽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쿠로사카가 심술을 덕지덕지 묻힌 채 냉소적으로 말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네가 세연이라는 아가씨 곁으로 얼른 돌아가지.)”
“(으음...)”
은결은 볼을 붉히며 그녀가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그야 할 일도 여럿 있으면서 연애놀이나 하는 것이 안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자신도 별로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저렇게 쿡쿡 쑤시고 들어오며 놀릴 것 까지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일’이라는 말에 역정을 냈으면서, 이런 데서 불만이라는 양 할게 뭐란 말인가. 이왕 도와준다면 깨끗하게 도와주는 게 좋지 않은가.
한편, 쿠로사카는 은결이 입을 다물자 유쾌함을 느끼며 반듯한 자세를 취했다. 완성된 그녀의 자세는 진지하고 훌륭하다. 처음에?경시하는 투로 검을 잡아들었지만, 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정도는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쿠로사카는 그저 저 바보를 조금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결계가 따라서 완성되었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흩어졌다. 빽빽하던 도로의 자동차도 어떤 압도적인 강박관념에 밀려 서둘러 빠져나간다.
“(간다.)”
도시의 일각이 죽어 침묵이 내려앉았음을 확인하고, 쿠로사카는 은결에게 고한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다. 뒤늦게 이어지는 죽어가는 대기의 헐떡임이 그녀의 동작을 설명한다. 음속을 조롱하는 초신속. 그 속도를 타고 키리야미의 날이 반원을 그린다. 은결은 맞은편으로 돌아가며 사념체의 다음 동작에 대응한다.
-꾸웅!
키리야미와 사념체가 충돌한다. 무거운 소리가 넓은 파장을 그리며 주변을 펼쳐진다. 쿠로사카는 눈살을 찌푸린다. 심상치 않다. 지금 이 방어는 독특하지만 낯설지 않다. 이건 마치, 은결이 사용하는 역장 같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역장은 무척 독특한 기술이다. 극도의 유연성을 가진 그 기술은 특수한 기호체계를 수련한 사람만이 사용한다. 하물며 사념체라니. 아마도 비슷해 보이는 다른 종류의 보호막이리라.
“후-”
쿠로사카는 숨을 토하며 물러선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혹시 이어질 사념체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그 틈을 허점으로 전환시키지 않도록 은결이 사념체를 상대할 것이다. 실제로 은결은 그녀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즉시 공세를 시작했다. 쿠로사카는 흘깃 그 장면을 바라보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은결의 모습은 훌륭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념체에게서는 어떤 강한 감정의 덩어리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 바보가 상대하기엔 가장 편한 종류의 적이다. 쿠로사카는 마음 편히 전투를 바라보며 다음을 준비한다.
-은결과 사념체가 충돌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충돌이 있은 다음, 은결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사념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특별히 방금 충돌에서 손해를 본 것도 아니면서. 쿠로사카는 불길함을 느낀다. 그녀는 은결을 향해 달려간다.
“(왜 그래?)”
“(아, 아아... 아...)”
은결은 쿠로사카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입만 벌린 채, 사념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 채, 저걸 보라는 듯, 저것 좀 보라는 듯, 저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라는 듯, 그런 모양새를 보일 뿐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당황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을 뿐이다. 쿠로사카는 미간을 모은다. 그녀는 지금 은결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은결이 위험하다는 것과,
“(--뭔진 모르겠지만, 저 녀석을 없애면 끝나겠지!)”
-라는 정도다. 그녀는 은결을 놓아둔 채 사념채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검이 휘둘러지기에 한발 앞서, 그녀의 앞에 끼어드는 또다른 초신속의 인영이 있다. 그 그림자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웅장한 힘을 담고 도도히 흐르는 키리야미의 날을 상완부를 들어 막아낸다.
-쿠아아앙!
번개가 친 듯 주변이 밝아지고, 공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가 정상을 찾는다. 우르릉, 우르릉. 세계가 공포에 떨었던 것 처럼 소리가 간간히 이어진다. 키리야미의 날은 목적지에 가 닿지 못한 채 거대한 힘의 용틀임을 계속할 뿐이고, 그 날의 앞에는 정련된 역장이 손의 이념을 품고 들어차 위대한 신의 검격을 방어한다. 은결이다. 쿠로사카는 짜증스레 묻는다.
“(너! 왜!)”
“(아, 안 돼. 너는 이, 이걸 상대하면 안 돼. 이건, 이건 오로지 내가 마주해야 해. 아, 으... 으... 내, 내가 해야 돼. 아, 아무도 이걸 침범하면 안 돼. 미안, 유리에, 미안. 정말 미안해. 상상하지 않았어. 응. 상상하지 않았어. 상상해야 한다고 해 놓고, 상상하지 않았어. 미안, 미안해. 그러니까, 이건 내, 내꺼야.)”
혼돈으로 가득한 말을 하며, 은결은 운다. 절망적으로, 운다. 무엇이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 처럼 운다. 울음 그 자체를 위해서 인 것 처럼 운다. 쿠로사카는 가슴이 아프다고 느낀다. 이 바보가, 이 천재가, 이런 정말적인 얼굴을 하는 것은 전에도 봤다. 그리고 그때 마다, 그녀는 무력함을 느꼈다. 그녀는 초조하게 화를 낸다.
“(내가 이해하도록 설명해!)”
“(이, 이건, 이건 여우야. 여우의, 사념체야.)”
은결은 답한다. 쿠로사카의 얼굴도 충격에 굳는다.
쿠로사카에게 겨우 답하고, 은결은 숨을 토한다. 지금 그는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는 숨을 삼키고, 숨을 토함으로서 숨을 쉰다. 목구멍이 무엇인가에 막힌 듯 매여서 호흡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산소를 삼키고, 산소를 토악질해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고통스럽지 않다.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은결은 이를 악물고, 쿠로사카의 굳은 얼굴에게서 시선을 돌려 사념체를 바라본다. 이리오라고 말하듯, 사념체는 고고하게 일렁인다. 그는 발을 박찬다. 형성된 역장이 그의 발끝을 받으며 거대한 힘의 받침대가 된다. 은결은 선이 되어 대기를 가른다. 아름답지 않다. 완성되어 있지 않다. 발작 같은 선이다. 그는 사념체의 바로 앞에 선다. 은결은 주먹을 쥐어, 사념체를 친다. 사념체는 은결의 주먹을 받아들인다.
-꾸웅!
-생각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세계가, 일그러진다.
“으...”
은결은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흘린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점액질의 콧물이 넘쳐흘러 입술끝머리까지 흘러내린다. 은결은 닦지 못한다. 그의 정신과 몸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못한다. 숨이 ‘허억’ 하고 막힌다. 정말 숨이 부족한건 아니다. 그저 갇혀버렸을 뿐이다. 어쩌면 좋을까? 희미한 한 가지라도 찾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발을 대지에 댄다. 발바닥과 대지의 접합이 일그러지며 하나가 되듯 무너져간다. 튼튼한 곳은 없다. 그는 쓰러진다. 은결은 견디지 못하고 속의 것을 게워낸다. 채 소화되지 못한 레스토랑의 음식들이 걸쭉한 형체를 보인 채 널부러진다. 그 위로 눈물과 콧물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생각들이, 안개처럼 희미해지며 떠돈다.
그러나 은결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위액이 목구멍에 걸려 시큰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끼면서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 그 생각 가운데 하나를 잡는다. ‘은결이라는 녀석을 알게 되었다. 이상한 녀석이지만 싸움은 잘 하는 것 같다. 그러면 뭐해. 왕따다. 이왕 친구가 되었으면 잘 대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이다. 다른 생각을 하나 잡는다. ‘답답한 녀석이다. 이러니 왕따가 됐지.’ 다른 생각을 하나 잡는다. ‘주제에 그런 책들을 읽고 있으면 뭘 한담. 분위기 깨는 소리하는 버릇만 아니면 괜찮겠는데.’ 다른 생각을 잡는다. ‘오늘도 공인 왕따가 뻘소리를 한다. 한 대 때려주고 싶다. 하지만 이 녀석 뻘소리는 도통 알아먹지 못하겠지만 듣다보면 나름 재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생각을 하나 잡는다. ‘미친 생각이란 건 알지만, 은결이 하는 말이 실은 꽤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생각을, 그리고 다른 생각을...
은결은 움직이고, 그 동작으로 전투를 수행한다. 충돌의 순간마다, 사념이 폭발하듯 그의 영혼을 침범한다. 새까맣게, 물들인다.
*이리세가 선악판단과 호오판단을 구분 짓지 않은 것은 몰라서가 아닙니다. 별 어려운 것도 아니니 ‘왜?’에 대해서는 독자 분께 맡기겠습니다.
*아마 은결을 크리스마스 끝날 때 까지는 굴려야 여러분이 좋아하시겠죠.
*댓글 감상 성원을 비롯 기타등등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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