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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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말을 꺼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상처를 상처로서 바라볼 수는 없기에 붕대를 그 위에 감듯이, 말로서 관계의 드러난 균열을 감아 삭히는 것은 이 자리에 선 모두에게 중요했다. 그래서 먼저 고릴라가 은결을 위로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저런 거 다 일순간이지 뭐. 나중에 사과할거야. 아니면 나중에 내가 얘기해 볼게.”
“그래. 고릴라 말이, 맞아.”
여우가 동조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이 ‘일순간’일 거란 고릴라의 말에는 도무지 동의하지 못한다. 이미 ‘일순간’ 일 수 없게 되었다. ‘일순간’으로 끝낼 수 있던 경계지점은 민성이 ‘농담’이 아니냐는 은결의 물음을 부정했을 때 넘어섰다. 이제 민성은,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구속되어서라도, 지금 한 말을 ‘일순간’으로 돌리지 못한다. 여우는 아주 잘 안다. ‘시선’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한 번 만들어진 시선은 주체를 구속한다. 그래서 여우는 돌아갈 여지 없이 걸어가 버린 민성에 대해 분노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만일 그렇지 못해도-”
여우는 억지로 짜낸 동의에 스스로 공허를 채우기 위해 다른, 분노를 담은 진실한 말을 덧붙여 그를 위로한다. 은결은 여우를 돌아보고서 어딘가 놀란 기색 같은 것이 느껴지는 어조로 확인한다.
“-나는 계속 네 편이 될 테니까.”
“내, 편?”
“그래.”
여우는 불길함을 느낀다. 은결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에서 희미하지만 더 짙어진 참혹함, 슬픔이 느껴진다. 그의 곁에 서겠다는 말을 한 것인데, 그것이 무슨 문제라는 것일까? 여우는 초조감 가운데 의문을 느낀다. 은결은 방금 전과 같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연다.
“고마워. 하지만 ‘내 편’은 괜찮아.”
돌이 삭아 내려앉은 먼지의 건조함을 품은 목소리로, 은결은 옅게 웃으며 사의를 표했다. 그는 이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에 좀 갔다 올게.” 그리고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약하게 붕 뜬 듯한 걸음이었다. 쿠로사카가 다급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나간 다음 고릴라와 여우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교환할 말이 없던 두 사람은 우울한 얼굴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은결은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사람이 없는 곳에 있고 싶었다. 사람을 견디기 힘들었다. 옥상에 올라간 은결은 울지도 않았고, 토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심호흡을 했고,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옥상에서 도시의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쿠로사카는 그러한 외면의 굳건함이 거짓이거나 거짓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분하게 듯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중심이 사실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던가, 정지한 손에서도 미미한 떨림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던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반응이 0.03 초 정도 평소보다 늦다던가 하는 것을, 그녀에게는 속일 수 없었다.
“......”
그렇지만 곁에 서서, 쿠로사카는 어떤 말을 그에게 건낼 수가 없었다. 가슴이 조이게 안타깝지만, 한층 더 가슴이 조이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은결이 이 꼴을 당해야 했던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자신이 그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그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고,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이런 꼴을 당할 필요도 없이 평소처럼 지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감히 은결에게 어떤 말을 꺼낸다는 것도, 더구나 위로를 한다는 것도, 자신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저 무심한 허무처럼 보이는 고통의 어깨를 쥐고 한 마디를 던지는 순간, 은결은 분노로 파랗게 타오르는 눈을 하고 자신을 향해 질책을 해 올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데. 아마 저 바보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저 바보가 결코 그렇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그런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심지어 목숨을 노렸고, 그것이 실패한 이후에도 그를 바라보는데 주저와 두려움이 없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척이나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자신은 그를 ‘좋아’한다. 그런 만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쿠로사카는 오른 손으로 자신의 교복 윗옷 목덜미 쪽을 잡아 쥐었다. 아무런 지지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공허를 쥐고 버티기는 마음이 외로웠다. 지금 은결의 모습이 ‘자신의 책임일지도 모른다.’(책임이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마주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피하지 않기로, 이 바보를 바라보며 배웠으니까. 그녀는 색- 하고 좁게 올라오는 자신의 껄끄러운 숨결을 느끼며 은결에게 물었다.
“(괜, 찮아?)”
은결은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쿠로사카를 바라봤다. 그는 희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은결은 답했고, 답하고 난 뒤에 공허감에 휩싸인다. 그는 자신의 답이 기계적이라고 느낀다. 모든 부분이 공허로 채색된 것은 아니었지만, 곰 인형의 배를 누르면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I love you"처럼, 자신의 ‘괜찮아.’ 라는 대답은 모든 ‘괜찮아?’라는 물음에 대한 준비된 대답이다. 은결은 공허한 자신의 대답을 이어지는 말로써 채운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쿠로사카는 은결의 대답을 들었다. 그녀가 내심 예상했던 대로 차분히 가라앉은 대답이었다. 미약한 안도가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보다 크게, 충격 같은 것이, 아마도 아픔을 닮았으리라 여겨지는 충격 같은 것이 가슴을 둔중하게 때렸다. 그녀는 그 충격을 떨치기 위해 노력하며 조심스레, 자신의 심장의 박동이 점차 더 빨라지는 것을 보는 것 처럼 확실하게 느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미안해.)”
은결은 의아한 얼굴을 한다.
“(왜, 미안하지?)”
“(내가 너를 부추기지 않았다면-)”
은결은 웃는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쿠로사카의 이어질 말을 부정한다.
“(네가 그 말을 할 때, 내 목에 칼을 들이 내밀었던 거야? 네 말을 내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되게끔 어떤 협박을 하기라도 한 거야?)”
“(그렇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사과하지 마. 나는 내 판단으로 네 말을 이해했고, 내 의지로 네 말을 받아들였어. 나는 부정할 수 없는 행동의 주체였고, 행동의 주체였기에 행위의 결과 역시 내 것일 뿐이야. 너는 알잖아? 그것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다’는 것의 의미임을.)”
깨끗한 논리였다. 쿠로사카는 ‘괜찮아.’라는 자상한 그의 대답에 느꼈던 충격의 정체를 이해한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행동을 했으므로 그 결과 역시 자신의 것이라는 것. 이러한 논리는 완벽하거나 모범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에 있어 타자를 거절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고통을 타인과 나누는 것을 바보 취급하도록 만들기 쉽다. 지금 은결이 보여주는 것 처럼. 하지만 고통을 타인과 나누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과거부터 은결이 쭉 해왔던 일이지 않을까? 그래서야! 쿠로사카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지마!)”
“(왜, 그래?)”
“(너 자신을 학대하지 마! 나는, 확실히 굴러 떨어지길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고, 거기서 겨우 얻은 한줌을 소중히 하기로, 네게서 배웠지만, 내가 그것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은 지금 네가 보여주는... 그런 게 아냐.)”
쿠로사카는 높은 목소리로 외친다.
“(유리에...)”
은결은 놀란다. 그녀의 얼굴은 붉었고, 눈가는 깊은 습기를 담았다. 어쩌면 곧장이라도- 설마. 하고 은결은 자신의 생각을 자른다.
쿠로사카는 한 손으로 얼굴의 감싸 안아 고개를 떨구고는 약간의 혼란, 약간의 물기, 약간의 분노 같은 것들이 뒤섞인 말을 이어 한다.
“(모르겠어. 잘 설명하기... 어려워.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네게 그 말을 하고, 그렇게 변해주길 바람으로서 기대했던 것은... 네가 모든 자신의 실패나 고통을 너 자신의 속으로 침잠시켜 혼자, 고통 받지 말라는 거였어. 결코, 자신의 행위니까 그 결과를 혼자서 받아들여 처리하라는, 그런 가혹한 요구였던 것은 아냐. 나는 도리어 네가 과거 보다 훨씬 약해지길 원했던 거야... 다른 사람이 꼭 필요하도록...)”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반드시 ‘자신’ 이기를.
은결의 약간의 따스함 같은 것과 함께 그녀의 진심에 ‘괜찮다.’ 이외의 말을 할 필요성을 느껴 입을 연다.
“(...미안. 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던 것은 사실이야. 응. 정말 쓰리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 견딜만한 것 같아.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은결은 느끼고 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구체적인 사물의 감각처럼. 모든 종류의 현실감이 퇴색당하고, 견디기 힘든 허망함이 뇌리를 잡아먹으며 다른 것을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민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르릉, 꽝! 하고 무너지는 현실의 기반에서도 어딘가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지탱할 수 있던 미약한 기둥 같은 것의 연장이기도 했다. 그건 무엇일까? 잉잉거리는 이명 사이로 파고드는 언어. ‘상상하도록 하게.’ 고통 가운데 바이올린의 현 줄처럼 징징거리는 한 마디 충고. 무엇을 상상하는가? ‘고통’을 상상한다.
“(-모르겠지만.)”
은결은 흔들리는 현실을 다시 붙잡으며 어렵게 말을 끝낸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가을 하늘은 푸른 서늘함으로 충만하다. 그 선명함이 마음을 찔러 민성이, 그리고 늑대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아는 척 하지 말자.’ 여우가 이어진다. ‘나는 네 편이 될테니까.’ 공허와 고통이 다시금 마음을 찾아든다. 쓰다. 쓰라리다. 마음이 피를 흘리며 헐떡인다. 원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진실의 교환이 서로의 상처로 귀결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설령 실패할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라고 해도.
설령 타자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타자가 얼마나 넘어설 수 없는 질곡인지는, 역사의 끝과 함께 알고 있었다 해도.
*즐거운 명절 보내셨습니까. 저는 대충 보냈습니다. 아, 오랜 만에 글 쓰려니 글도 버벅버벅버벅. 뒹굴뒹굴.
*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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