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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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마지막 종이를 확인하고 옆에 놓아두었다. 이미 본 다른 종이들이 차곡차곡 거기 쌓여져 있었다. 보통 책의 반 권 정도는 될 것 같은 높이였다. 이어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수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략적인 원리는 알았습니다. 이 방법대로라면 그노시스트의 방해 없이 결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금 은결이 확인했던 것은 수행이 그노시스트에 대비해 그간 작성한 진이었다. 도시 규모의 초거대 결계를 형성하는 진인 만큼 그 자체의 규모 자체도 매우 거대했다. 하지만 수행이 보여준 진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그것이 진을 미리 형성한 다음 에너지를 운용시켜 구동시킨다는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진은 필요한 때가 되면 진을 구동시키는 이들이 각자 맡은 기호를 현상계에 표출시키고 그것들을 연결함으로서 진을 현성한다. 술자들이 전투 도중에 허공에 순식간에 진식을 형성-사용하는 방식과 같았다. 필요한 순간에 짤 수 있는 만큼 그노시스트의 방해공작 같은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최적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전투 중에 사용하는 진식들은 보통 아주 간단하고, 술자가 그것을 철저히 암기하고 있는 것들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런 준비 없이 관념과 에너지만으로 진을 형성하는 것은 ‘개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수백 명이 관념으로 이런 복잡한 진을 짤 수 있을 정도의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하지만 수행은 해냈다.
“대신에 네게 부여되는 부담이 작지 않다. 구성원들 대부분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도 맡은 바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들이 다루어야 하는 일은 간단해야만 하니, 세밀한 조종은 모두 네게 맡겨진 셈이니까. 할 수 있겠느냐?”
“음-”
은결은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맡은 부분을 마음속에 떠올려봤다.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버지가 설치한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작업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집중한 상태에서 천천히 하는 게 아니라 극히 짧은 시간 내에 온갖 상황에 대처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플러스마이너스 해 보면 제로에 가깝게 나올 것 같았다. 난이도는 좀 있지만 못 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의 마음을 끌고 있던 오히려 기호구성 그 자체였다.
“어렵겠느냐?”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연습을 거치면 할 수 있습니다.”
은결은 애매한 추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정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표현했다. 지금 자신과 주변이 처해있는 현실이 겸양을 위한 애매한 표현 따위를 허락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것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수행이 그러한 현실에 쐐기를 박듯이 물었다.
“어느 정도, 라면?”
“이번주 일요일까지는 필요한 만큼 숙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좋다.”
수행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네가 이 일을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네 능력에 버겁다고 여겼는데... 모르던 사이 네 실력이 크게 성장한 모양이구나.”
“예. 다소 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수행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침묵했다. 이어서, 깊은 감정을 담은 어조로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너는 내가 모르도록 성장해 왔었지.”
“......”
은결은 아버지의 말이 슬프다고 느꼈다. 아니다, 기쁘다고 느꼈다. 아니다. 아버지의 말은 슬프거나 기쁜 것 같았다. 아니다. 아버지의 말은 슬프고 또한 기쁜 것 같았다. ‘저는 아버지를 부정하겠습니다.’ 불과 며칠 전 아버지를 향해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은결은 자신의 허벅지 부분의 바지를 꽉 잡았다. ‘아버지-’ 마음이 꽉 들어찼다. 풍선 같은 마음이 폭발할 것 같다고 느껴질 때에, 수행은 말했다.
“나가보도록 해라.”
은결은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우울하게, 세연은 침대의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하얀 잠옷 차림으로 침대 위에 몸을 누인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귀여운 매력으로 가득한다. 하나, “하아-” 하는 안타까운 한숨이 배게 속으로 뜨겁게 묻혔다. 세연은 몸을 빙글 돌려 천정을 바라봤다. 형광등의 차가운 흰 빛을 받으며 그녀는 다시 한 숨을 쉬었다. 별것 아니라면 아니지만- 역시 마음이 우울하다.
‘약속이 깨지다니...’
오늘 저녁에 은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미안한 어조로 사정이 생겨 이번 토요일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머릿속으로 벼락이 치는 것 같았지만 세연은 당황하지 않은 척 가장하고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사정이 생겼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은결이 밝히기 어려운 사정을 많이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세연은 그냥 물러나고 말았다.
‘잔뜩 기대했는데.’
슬펐던 얼굴이 불만에 부루퉁하게 변했다. 은결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은결이 믿을 수 없다면 세상에 믿을만한 사람은 없다는 말과 같다. 다만 실망스러웠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어떻게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하고 잔뜩, 잔뜩 기대하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해 왔는데, 오늘 받은 한통의 전화로 그 모든 것이 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만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그에 대한 신비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만남에 다시 만남을 겹쳐도 그와의 만남은 익숙해지지 않는 긴장과 설렘을 담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
부루퉁했던 얼굴이 진지한 슬픔에 자리를 내 주었다. ‘무너짐’ 이란 것이 은결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참 많이 닮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를 알 수가 없다.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사실로서 착각하고, 거짓을 현실 삼아 거기다 은결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이제 확증이 ‘무너진’ 세계에서 은결에 대해 자신이 쌓을 수 있는 이미지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범주틀에 맞춰 해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려움과 무지는 그 자체만으로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은결이 얼마 전에 이야기 했다. ‘견딜 수 없었던 아이들은 옥상으로 올라갔지.’ 그녀는 이 두려움이 옥상으로 올라간 아이들과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자유와도 무척이나 닮았다. 행동해야 한다.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자유는 무섭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려움이 옥상으로 아이를 옥상으로 올려보내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러니까, 사랑인 것 같다.’
고, 세연은 베개를 꼭 끌어안으면서, 어딘가 애닯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얼마가지 않은 그녀는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의 어딘가 가녀리고 깨끗한 인상의 미소녀는 그곳에 없었다. 거기 있는 것은, 하지만 위대하거나 잔인한 폭군 또한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랑인 것 같다고?”
그것- 푸른 이빨은 중얼거렸고,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사랑, 이라니. 견디기 힘들었다. 소름이 전신을 스쳤다. 이 계집아이의 말이 유치하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그러니까 사랑인 것 같다.’는 말에 어떠한 가치평가도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이 땅에 남은 마지막 진실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푸른 이빨의관심사는 아니다. 단지 그는 이 계집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소름 돋도록 싫었을 뿐이다.
“크- 니기미 좆같은---!!”
으득, 이를 갈며 새되게 푸른 이빨은 말을 뱉었다. 이 멍청한 년은 심지어 그러니까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미치광이 좆병신 새끼는, 사랑은커녕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 마음의 불균형이 푸른 이빨을 못 견딜 것 같이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누구에게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은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좆병신은 분명히 자신의 마음을 이 계집에게 전달했었다. 그것을 푸른 이빨이 무효화했다. 좆병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그 믿기 힘들만큼 썩어가며 꼬여있는 모순의 총체에, 한결 더한 고통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공했다. 좆병신은 기대했던 것 만큼 이 계집과의 관계로 인해 골치 아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도 따라붙었다.
“끔찍하군.”
그는 생각지도 못하게 따라붙은 것들을 한 마디로 평한다. 그는 거울을 본다. 소녀의 얼굴은 아름답다. 푸른 이빨은 이 아름다운 얼굴이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찡그려지는 것을 상상한다. 불쾌한 격통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차피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한층 더 그 좆병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계집이 우는 꼴은 ‘정말로’ 보고 싶지 않다. 푸른 이빨은 그게 가장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 다시금 가장 끔찍했다.
“후.”
푸른 이빨은 인간의 한숨 닮은 숨을 쉰다.
왜 이 꼴이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필요하다면...
*굉장히 글을 빨리 진행한 것 같은데 아직도 꽤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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