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3)
“하….”
옷장을 가르고 올라오는 슈트의 생김새를 보고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내가 만든 슈트가 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새의 부리를 닮은 뾰족한 가면, 그 위에 뒤집어쓴 듯한 깃털 달린 후드, 긴 망토, 타이트한 느낌의 쫄쫄이 슈트, 오른손에 칭칭 감긴 체인.
멋진 문양이 박히고, 마치 갑옷처럼 튼튼해 보이는 세련된 디자인의 원작 주인공 슈트와 달리, 내가 만든 슈트는 어딘가 중2병스럽고, 조금 창피했다.
‘그래. 이거야말로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당연한 거야. 괜찮아.’
만약 원작 주인공의 슈트가 올라왔다면, 오히려 내가 아닌 진짜 최강훈이 아직 이 세상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차라리 완전히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되어버렸다고 느낄 수 있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리고 만약 슈트의 설정까지 내가 설정한 전부를 따라온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최강의 히어로가 될 수 있을 거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슈트에 손을 뻗었다.
“오, 뭐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검은색 물질이 내 온몸을 칭칭 묶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 물질이 모두 풀리며 슈트의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거, 변신은 존나 멋있잖아.
내가 변신에 감탄하는 사이, 가면을 쓴 눈 위로 떠오르는 홀로그램 글자들.
[슈트 가동 중
10%…
30%…
50%…
90%…
100%…
가동 완료.
슈트를 개방합니다.]
[사용자 설정
사용자 이름 : 나강림 (사용자 인증 완료)
히어로 네임 : 더 다크 카이저
나이 : 17세
유지해야 하는 컨셉 : 고독한 다크 히어로
등장 대사 : 지금 여기, 나 강림
…
…
…
현재 세계 동화율 : 15%
함께 동화된 인물 : 이소희
동화율이 낮아질 경우, 함께 동화된 다른 세계의 인물들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동화율…?
내가 눈앞에 순식간에 떠오르는 글자들을 당황하며 훑어 내리고 있는 사이, 내 눈앞에 작은 별 모양의 이모티콘 홀로그램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히어로 더 다크 카이저. 제 이름은 제인. 당신이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AI입니다.”]
* * *
[“일단 육체적인 성장은 거의 끝에 다다르긴 했는데, 운동 부족인데다 섭취하는 영양소도 불균형적이고… 정신력도 그렇게 좋진 않네요. 아무래도 육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슈트의 능력 자체에 제한이 생길 수 있겠어요. 앞으로 갈 길이 머네요.”]
내 눈앞에 날아다니며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홀로그램 이모티콘.
[“그걸 풀려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성장할 필요가 있겠어요. 괜찮아요. 마스터 나강림이 「다크 카이저」로서 충분히 자기의 몫을 할 수 있는 히어로가 될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 누구시라고요?”
이런 건 원작에 없었는데….
[“제인이요. 가면 쓰기 전에 소원 비셨잖아요. 이모하고 다시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그 간절한 소원을 듣고, 당신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야?
[“원래 이 세계에 있던 최강훈은 결국 세계를 멸망시켰잖아요?”]
나는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이모의 상자 속에서 봤던 만화책을 기억해 냈다. 분명 거기엔 빌런들에게서 세상을 지키지 못하고 쓸쓸하게 혼자 죽어가던 주인공이 있었지.
[“실패하는 걸 보고 나니까 어이가 없더라고요. 저 같은 슈퍼 파워 슈트를 가지고서 세상을 구하지 못하는 게 말이 돼요?”]
별 모양 이모티콘인 제인의 얼굴에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슈트와 비슷한 모양의 가면이 씌워졌다.
[“아니, 이 작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엔딩을 낸 거야? 내가 그려도 이것보단 잘했겠다.”]
휭~.
가면을 벗어던지고 다시 나를 바라보는 제인.
[“분명히 이러셨잖아요. 그래서 기회를 드리려구요. 이 세계를 구해내는 데 성공하신다면, 건강한 이모와 함께 이 세계를 행복하게 살게 도와드릴게요.”]
* * *
내 이름은 나강림.
예전 나이는 스물셋. 현재 나이는 열일곱.
만화 「Heroicest」에 들어온 지는 약 일주일 정도 되었고, 내가 들어오면서 사라진 만화의 주인공을 대신해, 매일 밤 히어로 [다크 카이저]로서 활동하는 중이다.
내가 현재 사는 이 세계에서는 범죄의 발생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갑자기 어느 날 누구에게든 초능력이 생길 수도 있는 데다, 슈퍼 빌런과 뮤턴트들이 도시에 숨어 어둠 속을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범죄율이 낮은 게 더 이상할 수도 있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에선 수많은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거고, 수많은 경찰과 히어로들이 그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있을 거다.
[근처에서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다크 카이저.]
나는 험상궂은 사내가 칼을 꺼내 들고 여자를 골목길로 유도하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움직이는 곳마다 마치 그려낸 듯한 범죄가 일어난다. 마치 나에게 일거리를 주려는 것처럼.
나는 빠르게 앞에 보이는 상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가면을 썼다. 가면을 쓰자 온몸에 타이즈 슈트가 덧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요 며칠 동안 이 세상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 변신만큼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나강림 님 슈트 가동 중.
…
…
…
가동 완료.
유지해야 하는 컨셉 : 고독한 다크 히어로
등장 대사 : 지금 여기 나 강림
능력을 획득한 계기 : 방사능 박쥐에 물림]
가면을 쓰자마자 떠오르는 글자들.
히어로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홀로그램이었다. 23년 히어로 팬보이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 감격스러운 장면이지만, 며칠 동안 슈트의 인공지능에 시달려온 나로서는 이젠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제인. 나는 방사능 박쥐 같은 거에 물린 적 없잖아.”
[“아, 죄송해요. 마스터 노트에 있던 문구를 그대로 긁어오느라.”]
내 눈앞에 있는 홀로그램 문구 중 능력을 획득한 계기에 취소 선이 쭉 그어진다.
[능력을 획득한 계기 : 방사능 박쥐에 물림]
실수가 아니라 날 놀리고 싶은 거겠지.
AI라기엔 너무 지나치게 심술궂다.
다른 세계에 있는 나를 이 세계로 동화시킬 수 있는 이 AI는 AI의 범주를 넘어선 게 아닐까? 대체 얘가 내게 원하는 건 뭘까?
[“근처에서 강도 사건 발생.”]
[범인 도주까지 남은 시간 : 3분]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고, 홀로그램 글자가 떠올랐다.
알겠다. 알겠어. 나도 보고 입은 거야.
인공지능이 나를 보채는 것을 보며, 곧바로 몸을 돌려 사건 현장이 있는 방향으로 점프했다.
슈우웅
내 귓가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슈트에서 비롯된 육체 능력 때문에 건물 옥상을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옛날 같았으면 내가 꿈꾸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건물 옥상의 끄트머리에 서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소리 지르지 말고, 가방 그대로 내려놓고 꺼져.”
나는 눈앞에서 여자의 가방을 빼앗기 위해 칼을 들고 위협하고 있는 강도를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으로 하기 싫다.
[“무고한 시민이 피해를 보기 전에 사건을 마무리하세요.”]
재차 나를 보채는 인공지능.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히어로 랜딩… 히어로 랜딩….
그림처럼 떨어져 내릴수록 제인이 만족할 거고, 그래야 동화율을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을 거다.
나는 며칠 동안 연습했던 만큼 착지 자세가 멋지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한쪽 무릎과 양 주먹을 바닥에 댄 채 떨어져야 하는 랜딩 자세는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다.
그리고 아프다….
“쓰으읍….”
나도 모르게 입에서 고통을 참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우~~~ 히어로 랜딩을 하고 아파하는 히어로는 멋이 없잖아요? 분발하세요.”]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나를 보며 제인이 나를 질책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야. 이 새끼야. 너… 너 뭐야?”
[“지금! 등장 대사를 외치실 차례입니다!”]
“지금… 여기… 나… 강림….”
가면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아마 내 얼굴이 벌겋게 되었을 거다. 멋진 대사도 많은데, 왜 나는 이딴 컨셉인 거야.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이 새끼야.”
나의 등장에 긴장한 듯한 범죄자의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 망했다.
[“히어로답지 못한 태도! 옳지 않아요. 다시 한번! 등장 대사를 사용하세요!”]
알겠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
슈우웅!
철그럭.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나부끼는 망토. 찰그락 거리는 체인이 달린 근육질의 팔을 꼬아 팔짱을 낀 채, 나는 최대한 오만하게 강도를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 나 강림.”
[“Perfect! 잘했어요!”]
인정받았다면 됐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는. 저리 안 꺼져?”
내 행동에 불안함을 느낀 강도가 나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털이 북슬북슬하게 나, 마치 괴물처럼 혐오스럽게 생긴 강도의 모습. 사람보다는 무서운 맹수나 동물에 가깝게 보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뮤턴트 인자는 사람에게 초능력을 주기도 하지만, 인간을 동물에 가까운 형태로 바꿔 버리기도 한다.
뮤턴트 인자의 변형에 문제가 생겨 흉악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이들을, 이 세계에서는 브루트라고 부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흉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다, 뮤턴트 인자의 공격적인 변형으로 인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 세계에선 어느 정도 차별당하고 핍박받는 존재들에 가깝다.
이렇게 차별받고 핍박받는 브루트들은 골목이나 차원의 틈에 숨어들어 범죄자의 길을 걷는 경우가 대다수다.
원작의 주인공이 초반부에 맞서 싸울 빌런들도 뮤턴트 인자를 가진 브루트들이 대다수일 정도로, 어두운 방향으로 빠지기 쉬운 존재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생긴 것처럼 모두 흉악하고 강력하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평범한 인간들보다야 힘이 센 존재들이 많긴 하지만, 이 세계엔 더 강력한 뮤턴트들이 다수 존재한다. 수많은 브루트들이 핍박받고 고통받는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뭘 넋 놓고 있냐? 나 무시하냐? 어?”
내가 멍하게 생각에 빠진 모습을 보곤 털북숭이 손에 쥐어진 칼을 내게 휘두르는 강도.
너무 쪽팔려서 더 놀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나는 곧바로 몸을 돌리며 뒤돌아차기를 먹였다.
퍽.
그림처럼 깔끔하게 들어간 발차기.
현실에선 전혀 할 수 없을 몸놀림이지만, 이 세계 속에서 나는 히어로다.
깔끔하게 들어간 발차기에 맞은 강도의 몸이 허공에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휘릭!
동시에 팔에 감겨 있던 체인을 휘둘러 쓰러진 강도의 몸을 묶었다.
[“good~ 사건 해결! 경찰 신고는 접수됐으니 이제 현장에서 이탈하셔도 됩니다.”]
흐읍.
내 발차기를 옆에서 관람하던 시민이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도망가야지. 무언가를 더 하는 게 두려웠던 나는 체인을 끊고 몸을 돌려 벽을 타고, 다시 옥상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저 잠시만요. 혹시… 성함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시민이 당신을 부릅니다! 시민의 부름에 팬 서비스 하세요! 당신의 히어로 네임을 외치세요!”]
“나는… …이다.”
“네…?”
아차. 이러면 또 고통받겠다.
나는 서둘러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내 이름은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다.”
[“Excellent! 한 번 더 부르게 한 부분이 오히려 더 멋져요!”]
아아아악! 쪽팔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