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래빗즈(1)
지금, 현재.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뮤턴트 인자를 가진 사람과, 뮤턴트 인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
뮤턴트 인자를 통해 정상적으로 변이해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슈페리어, 그렇지 못하고 변이 과정에 문제가 생겨 동물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브루트라고 부른다.
이 세계에 사는 80퍼센트 이상의 사람이 몸에 뮤턴트 인자를 지니고 있고, 그중 간단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약 5퍼센트 정도에 달한다.
뮤턴트 인자를 지닌 스무 명 중 한 명은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초능력자라는 의미다. 그중 실질적으로 인간에게 해를 끼칠 만한 파괴력 있는 초능력은 소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곳의 치안 상황은 내가 알던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 그로 인해 달라진 것들은 만화에 나오지 않았을 거다.
여기서 내가 ‘지금, 현재’라고 말 한 이유는 이 만화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스토리 전개의 한계를 느낀 작가가 끝없이 세계관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초능력자와 슈퍼 빌런으로 시작된 세계관이 후반부에 가선 마법과 유령, 괴물들까지 공존하는 막장의 세계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원래 히어로 만화의 대부분이 그런 짬뽕 세계관이지만, 내가 이곳에서 살게 된 만큼 그렇게 갑작스럽게 세계관이 확장되는 상황은 막아내야만 한다.
작중 세계관이 확장되는 그 한순간의 사건들. 그 사건들만 막을 수 있다면, 빌런들이 더 만들어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거실에서 이모가 보고 있는 티비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내 방까지 들려왔다. 이모가 아프고 난 후부터 집의 티비는 켜진 적이 없었는데.
이 세계에서 이모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 이상, 나는 이 세계가 더 망가지는 것을 막아내야만 한다.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 또 제인의 반응을 봐서는 원작의 주인공 최강훈은 완전히 사라지고 나로 대체된 게 확실한 모양이다. 그래서 원작의 주인공인 최강훈이 했던 일들을 이제 내가 해치워야만 한다.
풀썩.
꽤 다행스럽게도, 뭔가 조금 수상한 느낌의 AI, 제인은 내게 히어로 업무 외의 그 어떤 것도 터치하지 않았다. 대신 이 세상을 구하는 것과 히어로 일을 하는 것에는 엄격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히어로로서 벗어나는 일을 하게 되면 가차 없이 동화율을 떨어트렸다.
마치 내 옆에 계속해서 붙어서 나를 히어로로 만들려는 선생님이 하나 함께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걸 하지 않으면, 나는 다시 이모를 잃게 되겠지.
나는 새로 생긴 내 방 안에서 제인이 요구하는 훈련을 하며, 제인이 홀로그램으로 띄워준 뉴스 화면들을 이것저것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주요 빌런들의 현 행방과 미래의 행동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 바뀐 부분도 있지만, 내가 막아낼 수 있는 부분도 많다.
<“경한 제약. 이번엔 브루트 치료제에 도전한다.”>
저건 실패한다.
애초에 뮤턴트 인자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만이다. 뮤턴트 인자의 변형은 인간이 손댈 수 있는 분야의 일이 아니다.
경한 제약이 브루트 치료제랍시고 만들었던 약은, 뮤턴트 인자에 새로운 변형을 일으켜 또 다른 재앙을 만들어낸다.
만약 브루트 치료제를 만드는 데 성공해도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공급할 테니, 브루트들은 꿈도 못 꾸겠지만.
경한 그룹 회장, 사대희는 심각한 수준의 브루트 혐오증이 있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 브루트들을 위해 약을 뿌려줄 일은 없다.
“제인. 지금 시간이 몇 시지?”
[03-01-2020 Sun 22:02:35]
내 질문에 눈앞에 떠오르는 시간과 날짜.
개학 전날, 그리고 저녁 10시.
원작에선 오늘 중요한 일이 일어나진 않지만, 이 세상에 원작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다시 일어나는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 계획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하지.
“제인. 래빗즈 ATM 기기 강도사건 아직도 안 일어났어?”
[“아직이요.”]
이젠 슬슬 일어나야 맞는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
[“마스터. 일단 내일 등교할 준비부터 해놓고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아, 맞다. 나 지금 고등학생이었지.
“아, 어차피 내일 개학날이라 수업도 안 할 텐데, 그냥 네가 해킹해서 출석 처리하거나 내일 전학 온 것처럼 만들면 안 돼? 오늘 꼭 확인해야 되는데.”
[“마스터. 쓸데없이 결석하면 주변의 이목을 끌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말씀드린 히어로의 두 번째 철칙. 절대 주변에 정체를 들키지 말 것. 기억 안 나세요?”]
제인이 이 정도까지 말하면 한 발 빠지는 게 낫다. 괜히 여기서 더 건드렸다가 동화율이라도 잃게 되면 나만 손해지.
“알겠어, 알겠어. 그냥 농담 한번 한 거야.”
허공에 띄워져 있던 홀로그램이 모두 지워지고, 잠시 로딩 화면이 지나갔다.
[“마스터. 방금 말씀하신 사건, 일어났어요.”]
제인의 말과 함께, 내 눈앞으로 CCTV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 * *
쏴아아아….
동네 후미진 곳에 있어, 사람도 잘 오지 않는 작은 ATM 365코너에 토끼 가면을 쓴 두 남자가 들어가 있다.
무기도, 장비도 없다.
대신 그들에겐 일반적인 사람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야, 빨리해. 시간 없어.”
“알았어! 보채지 좀 마. 정신 사나우니까.”
붉은색 토끼 가면을 쓴 남자가 손에서 나오는 불꽃으로 ATM기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은행 365코너라서 쾌적한 온도로 맞춰져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옷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푸른 가면의 남자가 붉은 가면의 남자에게 물었다.
“야. 미… 민… 민석아. 며··· 며몇… 몇 분 남았냐?”
“아. X발, 형. 형. 형. X발. 내가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가면 색깔로 부르라고, 가면 색깔!”
붉은 가면이 화를 내자, 파란색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거… 의… 다 된 거… 같아. 걱정하지 마.”
덜컹.
ATM기의 금고가 열리고, 안쪽에 있던 현금이 보였다. 그들은 허겁지겁 그 안에 있던 현금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 * *
나는 ATM기를 부수고 있는 강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 사건이 맞다.
「Heroicest」의 주인공인 최강훈이 가장 먼저 해결한 사건.
자신들을 스스로 「래빗즈」라고 부르는 그들은 가진 능력을 통해 기술자로서 하루하루 밥 벌어 먹고사는 브루트들인데,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게 되고. 부패 병원장이 요구하는 과한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 큰돈을 구하기 위해 ATM 강도질을 하게 된다.
사실 ATM을 털어봐야 거기 안에 병원장이 요구하는 돈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얘네들 입장에선 자기들 능력에 비해 큰 용기를 내서 벌이는 일인 거다.
정의의 히어로인 최강훈은 이 녀석들을 두들겨 패 감옥으로 보내고, 그들의 사정을 들은 뒤 부패한 병원장을 협박해 그들의 어머니를 치료하게 돕게 된다. 그리고 퇴장. 다신 등장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여기 진짜 내가 아는 그 만화 속 세계가 맞구나.”
히어로 덕후로서 내가 직접 히어로 만화 속으로 들어와 히어로의 능력을 얻고, 초인적인 신체 능력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범죄자를 퇴치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기뻤지만, 또 반대로 이 세상의 운명이 내 손안에 달려 있다는 점은 무섭기도 하다.
저들도 브루트라고 차별받는 입장이라 그렇지, 손에서 불을 뿜는 정도의 능력이면 내가 지금 가진 능력들보단 더 좋은 거 같은데. 대충 기술만 배워도 먹고살 수 있을 텐데. 이 세계의 브루트들의 위치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다.
“머… 무무무… 뭐가 이렇게 무거워…!”
“아, 입 좀 다물고 돈이나 빨리빨리 좀 처넣어. 시끄럽게 했다가 가면 쓴 놈들이라도 꼬이면 어떡할 건데?”
“가… 가가… 가면은 우리가 쓰고 있잖아.”
“아, X발, 좀! 히어로 말하는 거잖아, X발. 히어로!”
나는 지금 반대편 옥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거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릿속에서 등장 신을 그려보았다. 사실 그냥 문 열고 들어가서 몰래 제압하는 게 가장 편하긴 하지만, 슈트의 기능을 담당하는 프로토콜은 그런 멋 없는 설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옥상에서부터 글라이딩의 능력을 이용해 망토를 펼치고 활공하기 시작했다. 나도 비행 능력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아직 내게 허락된 능력은 가벼운 활공 정도의 능력이 최대다.
슈우우우….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위쪽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내가 거의 코앞에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땀만 흘리고 있었다.
“어…? 어어?”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푸른 가면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활공하던 상태 그대로 날아가 발로 은행 창문을 깨부수며 뛰어들었다.
쿠구구궁!
비가 내리는 밤하늘을 뚫고 날아온 내 등 뒤로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지금 여기… 나 강림.”
[“히어로 철칙 세 번째. 히어로는 무조건 컨셉대로 살고, 죽더라도 컨셉대로 죽을 것. 잘하셨습니다.”]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푸른 가면이 덜덜 떨며 외쳤다.
“미… 미미, 미민… 석아! 히… 히히… 히어로! 히어로가 왔어!”
“아, X발, 형! 가면 색깔로 부르라고!”
붉은색 토끼 가면이 성을 내며 일어났다.
“답답해 뒤지겠네! 정말.”
민석이, 뭐 자기가 가면 이름대로 부르라고 했으니까 굳이 이름 붙이자면….
“흐읍.”
그래. ‘레드 레빗’은 몸을 일으키고 손에 불을 키웠다.
후우욱, 하고 올라오는 불길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짧은 거로 봐서, 온도는 철을 녹일 정도로 높게 유지할 수 있지만 앞으로 분사하는 능력은 없는 모양이다.
레드 래빗이 손에 불을 켜고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블루 래빗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히… 히히… 히… 히어로랑 싸울 거야?”
“뭐, 그럼 쟤가 우리 지나가세요, 하고 비켜줄 것 같아? 자꾸 말 시키지 마! 집중해야 되니까!”
그 말을 듣자 블루 래빗도 어색한 느낌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 전투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너네 허접인 거 아니까 빨리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 제인에게 지적당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빨간 놈은 불, 파란 놈은 얼음. 이제 생각해 보니 포X몬스터도 아니고, 되게 단순한 놈들이네. 얘네한테 혹시 다른 능력이 있던가?
각자 능력도 미약하고, 서로 능력이 조화되는 것도 아니다. 괜히 한번 등장하고 그 이후에 나오지 않는 게 아니다.
퍽!
조금 더 시간을 줬다간 저쪽에서 용기를 내서 먼저 달려들까 봐, 나는 그 자리에서 발을 굴리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흐이이익”
역시나, 조금 덩치가 있어 보이는 파란 토끼는 덩칫값을 못 하고 내가 발을 굴리는 소리에 쫄아 뒷걸음질 쳤다.
이놈들은 확실히 전투에 익숙하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해먹던 대로 놈의 몸통에 뒤돌려차기를 먹이기 위해 몸을…….
“whoops…!”
디딘 발이 있는 곳이 미끄러워 쭉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어떻게 넘어져야 컨셉을 구기지 않을지를 고민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으학…!”
나는 꼴사납게 뒤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히어로의 이름값에 먹칠하는 이런 상황. 좋지 않아요. 훈련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집에 가면 훈련량을 늘려야겠어요.”]
으아아악, 제발. 지금도 아침마다 근육통 때문에 고통스럽단 말이야.
속 쓰림을 느끼기 전에 나는 그대로 몸을 굴려 다시 일어났다.
“흐에에엑.”
파란 토끼가 참고 있던 숨을 확 내쉬자, 발을 통해 나오던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는 것이 보였다.
맞다. 얜 숨을 참고 있어야만 발밑을 얼릴 수 있는 능력이었지.
나도 초짜 히어로인 바,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초능력을 가진 빌런 둘을 모두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인. 경찰이 여기 도착하기까지 몇 분 정도 남았지?
「“약 3분 정도 남았습니다.”」
꽈아악.
손을 말아 쥐자, 내 손안의 검은색 장갑이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