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6화 (6/236)

제6화

나의 작은 흑역사(1)

으으윽….

온몸이 부서질 거 같아.

매일 슈트를 입은 다음 날 아침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근육통에 오후가 다 돼서야 일어나곤 했는데, 오늘부터 개학일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이게 아마 제인이 말한 슈트의 출력을 내 몸이 따라가지 못해서 나오는 반동 같은 거겠지.

“강림이 오랜만에 학교 가려니까 또 걱정인가 보네. 괜찮을 거야. 중학교 입학식 때도 그렇게 걱정했는데 잘 지냈잖니?”

내가 밥숟가락을 들고 한참을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 이모가 오해했던 모양이다. 물론 학교 3년 더 다니는 것도 충분히 지옥 같은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건강한 이모지만, 한번 떠나보냈던 기억 때문인지 이모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기 때문에, 나는 구겨져 있던 인상을 폈다.

“어. 아니야, 이모. 난 괜찮아. 그냥 밥 먹다가 혀 씹어서 그래.”

이 세계의 나는 고등학생.

우리 이모는 나의 유일한 보호자이다.

당장 내일도 학교를 가야 하고, 이모의 눈을 피해서 히어로 활동까지 유지해야만 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설정과 히어로물의 클리셰 중의 클리셰.

이렇게 클리셰 덩어리인 상황이라면, 이모에게 내 활동을 들켰을 때 분명 반대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테지. 최대한 오랫동안 걸리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아이구. 좀 조심하지. 아, 맞아. 이모는 오늘 야근을 좀 해야 할 수도 있을 거 같아. 저녁은 혼자 먹구.”

오늘 저녁은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지금까진 제인이 만들어준 홀로그램 장치를 통해 숨겨왔지만, 그게 언제까지 들키지 않을 순 없다.

“네네, 걱정하지 마~ 혼자 잘 있을 테니까.”

<“어젯밤, 천산시에 있는 경한 은행에서 총기로 무장한 은행강도가 침입해서 돈을 둔 총격전 끝에 2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히어로 퀘이사의 활약 끝에 도주한 1명 이외 나머지….”>

티비에서 히어로가 해결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입에 숟가락을 욱여넣은 채로 슬쩍 화면을 바라보았다.

티비 화면에 나온 히어로는 원작에서 주인공과 가장 친밀하게 지내던 히어로이자, 히어로로서의 라이벌이기도 하던 퀘이사였다.

원작 주인공처럼 원작 히어로들과 친밀한 관계로 지내야 할지에 대해선 조금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이 만화를 중간 하차하게 만들었던 사건.

시빌 워-킬 더 히어로.

정신 지배를 당한 스타라이트가 나머지 히어로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죽이는 에피소드.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짓을 했는지 봤더라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중간에 하차해 버리는 바람에 나는 그 사건에 관련된 빌런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스타라이트를 정신 지배한 인물은 잔인하게도 스타라이트와 친밀한 히어로만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했고, 나는 그때부터 스타라이트가 무너졌기 때문에 세계의 멸망을 막지 못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내가 이들과 친해지는 대신 사무적인 관계만을 구축한다면, 내가 이들을 죽일 가능성도 적어지지 않을까?

“에고. 밤마다 난리도 난리도 아니야, 아주. 강림아, 밤에 항상 조심히 다녀야 하는 거 알지? 이 주변에 요즘 또 별별 일이 다 생기니까 조심해.”

“에이, 내가 밤에 돌아다닐 일이 뭐가 있어. 집에나 있어야지.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이모의 대답에 혹시나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까 싶어 나는 후딱 식기를 들고 나갔다.

<“…그리고 같은 날 365코너의 ATM 기기를 노린 초능력자가 다른 초능력자와의 접전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지잉….

깜깜해지는 티비 화면.

“어휴. 세상이 참 무서워. 매일 누가 죽는 이야기밖에 안 나오네.”

이소희는 티비를 끄고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    *    *

내 이름은 나강림.

예전 나이는 스물셋. 현재 나이는 열일곱.

만화 「Heroicest」에 들어온 지는 약 이 주일 정도 되었고, 내가 들어오면서 사라진 만화의 주인공을 대신해 매일 밤 히어로 [다크 카이저]로서 활동하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 세계로 전이하고 난 후 첫 등교 날이다.

그런데… 얜 여기 왜 있는 거야?

“야. 나강림. 오랜만이다?”

씨익 웃으면서 나를 툭툭 치는 작은 여자애.

“어떻게 또 같은 학교에 같은 반이 걸리냐? 거참, 신기하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흑역사가 이번엔 학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뭐지? 얘도 이모처럼 날 따라 여기에 들어왔나? 그게 가능한가? 어떻게 얘가 여기에 있을 수가 있지?

“왜 퍼뜩 대답을 안 하냐고~ 어?”

부정하기엔 실실 웃으면서 내 책상 위로 걸터앉는 자세가 한두 번 해본 폼이 아니다. 거기에 말투도, 나를 대하는 태도도 너무 똑같다.

여자애의 가슴팍에 있는 이름표를 보았다.

도유진.

나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동갑내기 소꿉친구의 이름과 똑같다. 중학교 졸업식 날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멀어지고, 학교도 갈라진 이후로 다시 볼 일이 없었는데….

“방학 동안 뭐 했냐? 또 찐따처럼 이상한 만화책이나 보면서 히죽거렸냐?”

[인물, 도유진이 이 세상으로 동화되면서 나강림의 동화율이 올랐습니다.

현재 동화율 : 21.65%

획득한 경험치 : 50 exp

누적된 경험치 : 202 exp]

아마 내가 이 세계로 전이하며 이모뿐만 아니라, 내 세상에 존재하던 사람 중에 엮여 들어온 사람들이 더 있는 모양이다.

이러면 곤란한데. 어쩐지 자꾸 뭔가 원작 내용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싶었다. 내가 이곳으로 끌려오며,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현실에서 끌고 들어오며 이야기가 달라진다면….

내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무시하자, 도유진은 다리를 쭉 뻗어 실내화를 신은 발로 나를 건들기 시작했다.

아씨. 교복 바지 더러워지게.

“야. 왜 내가 묻는데 대답을 안 해. 셋 셀 동안 대답 안 하면 뒤진다.”

쟤 진짜 도유진 맞나 보네. 오랜만에 봐도 아주 그냥 하는 짓이 똑같네.

“하나~ 두울~ 둘의 반~.”

“나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 그만해라···.”

“구만해롸~ 응~ 싫어~.”

도유진이 나를 따라 하며 깔깔 웃어댔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웃음소리라 PTSD가 올 뻔했다.

그 후로도 깔깔 웃으며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예전엔 나를 좀 괴롭히려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이게 또 꼭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 같진 않고….

뭔가 애매모호한 기분이 들어서 별말 없이 참고 있었다.

“야. 빵 좀 사다 주라. 초코빵으로.”

빵을 사다 달라고?

이거 여자애한테 이런 짓 좀 당했다고 뭐라고 하기엔 소인배가 되는 거 같고. 그렇다고 뭐라고 안 하고 넘어가기엔 내 자존심이 조금 상하네.

[“빵셔틀 임무 획득! 일진을 위해 빵을 사 오세요. 남은 시간 5분.”]

도유진이 나를 괴롭히는 상황이 맘에 들었는지, 제인마저 합류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도유진은 내 눈앞에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게 너무 익숙해 보이길래 갑자기 열이 받아, 그냥 버럭 화를 한번 내볼까 생각하다가 관뒀다.

내가 나이를 조금이라도 더 먹었으니 지금 하는 짓을 그냥 애들 장난 정도로 받아들여 주기로 했다.

이건 내가 남고, 공대, 군대 트리를 탄 남자 중의 남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야. 내가 니 빵셔틀이냐? 니가 알아서 사다 먹어라. 나 좀 귀찮게 하지 말고.”

내 말에 도유진이 정색하고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뭐야…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존나 같잖아.”

막상 오랜만에 저런 말을 들으니 다시 PTSD가 생기려고 하네.

도유진은 투덜투덜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돈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내 뒷자리에 앉았다.

하… 이걸 어떻게 한다.

도유진은 내 인생 최고 흑역사인, 내 첫사랑이었다.

*    *    *

얼굴값을 해서인지 인싸 중의 인싸를 넘어서, 일진과 양아치에 가까운 도유진과 중학교 내내 히어로 만화책이나 들고 다니던 찐따 중의 찐따인 나, 나강림은 누가 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물론 나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도유진을 좋아했다.

그리고 도유진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더럽게 굴던 양아치 새끼들을 도유진이 못 건들게 막아줬거든.

일단 예쁘기도 하고, 유진이 오빠가 꽤 잘나가는 운동선수였던데다가, 오빠를 닮아서인지 유진이도 싸움깨나 했다.

그래서 아무리 찐따같이 지내도 일진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놈들 중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도유진이 소꿉친구인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 도와준 것도 모르고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해, 중학교 졸업식 날 고백했었다.

물론 당연히 대차게 차였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 고등학교가 갈리기도 하고, 어색해져 버리는 바람에 연락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한테 한 고약한 행동들을 봐선, 나를 이 세상과 동화시킨 누군가는 내가 내 흑역사에 괴로워하는 걸 즐기는 모양이다.

아마 그럼 내가 고백했던 사건도 그대로 남아 있을 테지.

도유진은 한참을 나를 괴롭히다 제풀에 지친 모양인지, 내 등 뒤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제 좀 조용해지겠네.

도유진이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잠이 들자, 내 근처에서 빙빙 돌며 간을 보고 있던 안경잡이 녀석이 부랴부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름표에 쓰여 있는 이름은 박준석.

얘는 원작에 존재하던 설명충 포지션이다. 최강훈의 친구 같은 놈인데, 3년 정도 후엔 능력을 개방해서 제법 괜찮은 능력을 얻는 놈이다. 다만 겁이 너무 많은 점 때문에 제대로 활약한 적은 없지만.

내 세상의 내 과거뿐만 아니라, 조금은 최강훈의 과거마저 내가 가지고 나온 모양이다. 이걸 긍정적으로 봐야 하나.

“나강림! ‘현실에선 변변찮은 히어로지만, 온라인 게임에선 최강입니다’ 4권 사 왔다. 빌려줄까?”

나한테 그렇게 말하며 도유진을 겁먹은 표정으로 슬쩍 보는 게, 아마 도유진이 나를 괴롭히고 있던 게 무서웠던 모양이다.

도유진이 덩치는 쪼끄맣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선 나름 이름 날리던 양아치 중의 한 명이었다.

그나마 나는 군대까지 다녀온 성인이라 별생각 없지만, 겁쟁이 고등학생인 준석이에겐 좀 무서울 수도 있겠다.

[인물 나강림 학교생활 주요 키워드 분석. 찐따, 씹덕, 빵셔틀. 학교생활 적색 주의보.]

내 흑역사를 즐기는 건 아무래도 제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여러모로 히어로물 클리셰 같은 느낌이다. 고아에 찐따에 빵셔틀 히어로가 각성 과정에서 왕따 시키는 일진들과의 갈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은, 히어로물의 클리셰 중 클리셰다.

그런데 난 이미 학교를 졸업한 성인이란 말이지… 그런 틴에이저물 클리셰 같은 것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 아니야, 됐어.”

“뭐?”

“이제 그런 거 안 보기로 했어. 공부해야지. 우리 고등학생이잖아.”

내 말에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 박준석.

“뭐야. 진성 히어로 덕후 나강림이 히어로 노벨을 거부해?”

아니, 이런 건 또 내 과거를 따라가는 거야? 아주 쪽팔린 부분은 죄다 가지고 오는구만? 내 흑역사는 다 가지고 와.

아무튼 그 말을 듣고 박준석을 무시하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작품에 나오는 히어로의 숫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만화라는 매체의 한계상 그 수많은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내가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물어올 친구가 하나쯤 있으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소설보단 현실 히어로가 더 재밌잖아. 요즘 괜찮은 히어로 없냐?”

“최근에 천산시에 새로운 히어로가 생긴 거 알아?”

박준석이 내 질문에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엉? 설마….

박준석은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 영상을 하나 틀어 보여준다.

『“혹시… 누구신지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망토가 나부낀다.

뒤돌아 있는 검은 옷의 그림자.

설마 이건….

『“나는…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다.”』

[“다크 카이저! 벌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네요! 너무 멋져요!”]

쪽팔리게 이런 건 누가 언제 찍은 거야?

으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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