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7화 (7/236)

제7화

나의 작은 흑역사(2)

나는 준석이가 히어로 노벨에 정신을 돌리고 나서야 겨우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시끄럽게 떠드는 학생들의 소리, 끼익 끼익 책걸상이 움직이는 소리… 학교의 풍경은 내가 있던 세계와 별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함께 온 도유진.

그리고 원작 세계에 존재하던 박준석.

두 사람 모두 다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프기 전의 이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외면했었지만, 17세 고등학교 1학년 나강림의 인생에 돌아와 보니, 이제야 내 주변을 제대로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내가 지금까진 너무 다크 카이저로서의 활동에 빠져 의식적으로 내 상황을 무시해 왔다.

나는 머릿속을 혼자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가정.

만약 이 세상이 나의 상상뿐인 세계라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이모마저 돌아가시게 된 내가 정신을 놓고 보게 된 환상이라면?

나는 며칠 전까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시사 용어들과 사회 용어들을 공부하고, 뉴스와 신문 기사를 엄청나게 스크랩했었다.

내가 그런 사회 용어들을 모두 상상해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첫 번째 가정을 지웠다. 이런 느낌의 진행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지금 당장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과한 설정이다.

두 번째 가정.

내가 본 만화 「Heroicest」는 정말 있었던 일들을 그려놓은 만화라면? 만화 속 주인공이던 최강훈이 실패하고, 그런 미래를 수정하기 위해 나에게만 도움을 요청한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누가?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왜 하필 내가 선택받은 것일까?

그 이후로도 몇 가지 가정을 머릿속에 썼다가 지우길 반복했지만, 역시 지금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드르륵.

내가 한참을 다른 생각을 하며 교실 앞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170은 돼 보이는 큰 키에 모델 같은 비율.

흰 피부에 마치 아이돌을 연상시키는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 꾹 닫은 입술과 무표정한 얼굴 덕분에, 언뜻 보면 마치 인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외모. 만화에서나 나오는 미인을 현실로 끄집어낸다면 이렇게 보일 수 있겠구나.

“강수아….”

강수아.

오늘 아침 티비에서도 본 적 있는 히어로 퀘이사의 본래 정체인 강수아였다.

*    *    *

“강수아….”

내 부름에 앞문을 열고 들어오던 강수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차. 속마음으로만 생각해야 할 게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요즘 제인이랑 계속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혼잣말하는 버릇이 많이 늘어난 모양이다. 그렇게 크게 말한 것도 아닌데, 귀도 참 좋다.

나는 부른 적이 없는 것처럼 눈을 돌려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

드르륵

마침 학교 벨이 울리며 들어오는 선생님.

“자. 서 있지 말고 다 빈자리 가서 앉아. 먼저 출석부터 부를게요. 자, 1번 강경환.”

다행스럽게도 강수아는 선생님이 들어오자 내게 뭐라고 하려다 말고, 냉기를 풀풀 흘리며 빈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아휴. 다행이다.

담임으로 보이는 선생님은 반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이름 석 자를 칠판에 크게 썼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한 학기를 함께하게 된 도덕과 윤리를 담당하고 있는 박상훈이라고 합니다.”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꽤 젊고 당당한 느낌의 선생님.

원작에서도 주인공인 최강훈의 반을 담당했었던 기억이 있다.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지만,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가끔 최강훈에게 히어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는, 그런 좋은 담임 선생님이었다.

내가 박준석, 강수아와 같은 반이라면 원작의 최강훈이랑 같은 반이어야만 하는데…….

출석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최강훈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정말 내가 최강훈의 자리를 걷어내고 주저앉은 걸까?

그럼 이 세계에 존재하던 최강훈은 어디로 간 걸까?

*    *    *

오랜만에 고등학교 책상에 앉아 있으니까 꽤 재밌는 기분이 들었지만, 교과서 좀 받고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조금 듣고 나니 집에 가란다.

“자. 오늘은 개학 첫날이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주번들은 일찍 와서 내가 말한 청소들만 좀 하고. 일찍 끝났다고 너무 오랫동안 놀러 다니지 말고 밤늦기 전에 집에 들어가라. 한 학기 같이 잘 지내보자.”

“네~~.”

“이상.”

세상 쿨하게 퇴장하시는 담임 선생님.

이 세계의 애들은 참 편하게 학교 다니는구만. 고등학생이 개학 날 수업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들으면 꼰대라 매질을 당하겠지만, 어? 나 때는 말이야, 개학 첫날에 야자 11시까지 하고 갔다~ 이 말이야.

이 세계엔 밤에 범죄율이 워낙 높은 탓에 야간 자율학습은 물론이고, 학원도 잘 다니지 않는다.

학생들 대부분이 집에서 인강을 듣거나 개인과외로 공부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하긴 원래 살던 세계도 강제 야자는 내가 학교 다니던 시기부터 천천히 사라지고 있던 추세였긴 하다. 나도 딱 1학년까지만 야자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야, 오늘 같이 PC방 갈 사람?”

여기도 빨리 끝나는 날 반 친구들끼리 게임을 하며 친목을 다지는 건 같은가 보다.

“강림아! 마치고 애들이랑 다 같이 PC방 갈 거지? ”

담임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당연하단 듯이 준석이가 책가방을 멘 채 나한테 묻는다.

이 세계에선 대체 무슨 게임을 하려나? 그동안 적응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네. 군대에 있을 땐 게임이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게임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PC방? 무슨 게임 하게?”

“롤 해야지. 오늘은 내가 버스 태워준다. 꽉 잡아.”

“야, 무조건 가야지. 무슨 버스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오늘 내가 보여준다.

“실딱이는 빠져.”

“야, 갈 거면 빨리 말해. 팀 짜야 되니까. 티어랑 라인 어디 가는지 딱 말해.”

롤? 이 세계에도 롤이 있다고? 반 내전?

이 세계의 나강림, 이 녀석. 아직 골드도 못 올라간 거냐? 내가 한 수 가르쳐 줘야겠구만.

*    *    *

이 세계도 PC방은 비슷했고, 롤도 조금 사소한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실질적으론 비슷했다.

아마 고등학생 때 골드였던 내 티어가 이 세계에서도 반영되어 골드 티어의 아이디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학 생활과 군대 휴가로 단련된 나의 롤 실력은 이제 곧 다이아를 바라보고 있는 다이아급 플래티넘인 바, 골드에서 헤매고 있는 박준석이라는 벽돌을 등에 메고도 충분히 버스를 태울 수 있었다.

“야야, 한 판 더 해. 팀 바꿔. 우리 팀 정글 X나 못 해.”

“무슨 소리야. 탑이 똥 싸서 진 건데.”

[“다크 카이저. 학교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벌써 5시예요. 오늘 동화율을 많이 획득했다지만,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면 기껏 얻은 동화율이 떨어진다는 거. 잊지 않으셨길 바래요.”]

그 말과 함께 제인이 띄워준 시계는 막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해도 지고 있고, 활동을 시작해도 될 시간대이긴 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롤 한판 하니까 살 것 같네.

“야야. 이제 오늘은 이만하자. 나 집에 갈게.”

“왜? 벌써? 아직 5시밖에 안 됐는데.”

“야, 5시면 곧 해질 시간이야. 해지고 돌아다니면 위험해.”

“큰길가로만 다니면 되지, 뭘. 좀만 더해.”

“암튼, 나 집에 가서 공부할 것도 있고 먼저 집에 간다. 얘들아, 미안해. 다음에 더 같이 오래 하자. 미안.”

“뭐? 야, 너 언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다고…….”

“미안. 미안. 먼저 갈게.”

앞으로 같이 지낼 친구들과의 친목도 중요하지만, 오늘 저녁을 쉬면 동화율이 몇이나 떨어질지 모른다. 하루 이틀 쉬어서 잃을 동화율이 내가 며칠 고생해 번 동화율보다 많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일어서려다, 순간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구석진 곳이라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분명….

강수아?

쟤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 성격에 겜 하러 온 것 같진 않은데.

주변이 다 빈자리인 걸 보면 혼자 온 건가.

나는 나가려다 말고 수아의 모니터 화면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화면엔 요 며칠 일어난 슈퍼 빌런들에 의한 사건, 사고들이 정리돼 있는 블로그가 띄워져 있었다.

아.

나는 제인이라는 든든한 AI가 있다 보니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해야 하는 퀘이사 같은 경우에는 정보가 필요한 상황이 많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걸 왜 PC방에서 하고 있냐고?

쟤 집엔 컴퓨터가 없거든.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강수아가 화면을 끄고 뒤를 돌아보길래, 나는 곧바로 가방을 메고 PC방에서 빠져나왔다.

*    *    *

슬슬 옷 갈아입고 활동을 시작해야겠는데. 괜찮은 곳 없나?

슬쩍슬쩍 주변 골목이나 숨을 만한 건물을 찾아 걸어 다니고 있던 도중이었다.

“야. 거기 너. 잠깐 이리 와봐.”

골목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골목길 너머에는 딱 봐도 불량하게 보이는 고등학생들이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지금 나 부르는 건가?

“그래, 너 이 새끼야. 니 부르는 거 맞으니까 빨리 와.”

뭔 고딩 새끼들이 개학 첫날부터 이러고 있는 거야?

[“전체 인원 다섯. 그중 셋은 뮤턴트 인자 보유자인 것으로 보이고, 나머지 둘은 능력의 개방은 이뤄지지 않은 뮤턴트 인자 보유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특이 사항. 저중 한 명은 마스터의 같은 반 친구네요. 나강림 담당 일진 도유진.”]

나는 무시하고 가려다 제인의 브리핑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 도유진 진짜. 옛날부터 양아치 짓 하고 다닌 건 알았는데, 고등학생 돼서도 유치하게 이러고 노는 거야?

[도유진. 슈페리어. 타입 신체계열. 약간의 육체 능력 강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임.

서지예. 슈페리어. 타입 신체계열. 약간의 육체 능력 강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임.

황채경. 슈페리어. 타입 이능계열. 이능계열 중에서도 염력에 소질이 있는 것으로 보임.]

이 세계의 초능력은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신체계열, 자연계열, 이능계열, 정신계열.

보통 이 중 1가지 계열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최대 2가지의 능력 계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다만 이에 제한이 하나 있는데, 신체 능력자는 이능계열의 능력을 가질 수 없으며, 반대로 이능계열의 능력자 또한 신체계열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자연계열 능력자 또한 정신계열의 능력을 가질 수 없으며, 정신계열 능력자 또한 자연계열의 능력을 개방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선 양아치 짓 하는 고딩들마저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네.

그래도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최소한 등록이 되어 있는 초능력자라는 의미지.

직접 나라에 등록했거나, 아니면 초능력 범죄를 저질러 나라에 잡혀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대부분은 데이터베이스에 잡히지도 않는다.

“야. 너 얼마 있냐? 이것 좀 사라.”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치마를 짧게 줄인 전형적인 양아치, 황채경이 손에 쥐고 있던 요상한 물체를 내 손에 강제로 쥐여주려고 했다.

제인이 친절하게 머리 위에 홀로그램 글자를 띄워준 덕에 비슷비슷하게 생긴 양아치들 사이에서도 용케 이름을 구분할 수 있었다.

내 손에 쥐어진 그것은 손으로 만든 것 같은 담배였다.

아니면 무슨 마약 같은 건가? 이 세계 완전 막장이구만?

“야. 얜 됐어. 내 친구니까 걍 보내.”

뒤쪽에서 한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정신이 팔려있다, 뒤늦게 나를 알아본 도유진이 황채경에게 말했다.

이전 세계에서도 도유진의 소식은 거의 듣지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면 도유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뻔히 보였다.

“야, 도유진. 너 아직도 이러고 사냐?”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모여 있던 놈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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