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스카 페이스(1)
“찐따같이 생겨서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야, 도유진. 이 새끼, 니 친구 맞냐?”
거기 있던 양아치 중 한 명이 목소리를 잔뜩 깔고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제인이 머리 위에 이름도 안 달아준 걸 보니 초능력도 없는 내추럴에 배역도 없는 엑스트라인 모양이다.
다가오고 있는 양아치의 눈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야, 송보라. 내가 아까 내 친구라고 말하지 않았냐?”
내가 막 뭐라고 하려던 찰나에, 도유진이 내게 다가오려던 송보라를 가로막고 노려보며 말했다.
도유진 말로는 자기 키가 160이라고 하지만, 내가 알기론 155cm도 되지 않는다.
가로막고 있는 송보라는 언뜻 봐도 170은 돼 보이는, 여자치곤 큰 키인지라 도유진이 가로막고 노려보자, 송보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이 되고 말았다.
“아, 시발. 알았어.”
“뭐? 시발?”
“아니, 알았다고. 미안해.”
“너 계속 내 위에서 말한다? 뒤지기 싫으면 내려와라.”
송보라가 주섬주섬 자세를 낮추려는 걸, 옆에 서 있던 서지예가 말렸다.
“야. 얘도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뭘 그렇게까지 해. 그만해, 도유진. 너 일단 집에 가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 * *
오랜만이네. 도유진이랑 같이 하교하는 거. 초등학교 땐 맨날 이렇게 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도유진이 일진 패거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멀어지기 시작했었다.
“야, 나강림. 찐따야. 거기서 오란다고 쳐 오냐? 어휴 진짜 병X.”
꽤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를 걱정하는 투라서 그런 건지. 뭔가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울컥 치고 올라오려는 기미가 보이기에,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니 알 바 아니잖아. 신경 꺼.”
빡!
그 말을 입에서 내뱉음과 동시에 내 명치에 도유진의 주먹이 틀어박혔고, 도무지 주먹으로 후려쳤다고는 믿기 힘든 소리가 흘러나왔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한참을 복부를 부여잡고 있던 나도 똑같이 도유진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빠악.
“아, X발. 존나 아프잖아.”
“나강림, X발. 미쳤냐? 많이 컸네?”
아. 얘 원래도 손 매웠는데, 여기선 초능력까지 있어서 진짜 존나 아프네.
진짜 놀랐는지 자기 머리를 쓰다듬던 도유진이 다시 짐짓 폼을 잡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튼, 너 그렇게 찐따처럼 다니다 잘못 물리면 뒤져. 요즘 얼마나 미친놈들이 많은데. 그러다 니 잘못되면, 이모 혼자 어떻게 살라고 그러냐?”
그 미친 짓, 지가 하고 있으면서 폼 존나 잡네.
“너나 좀 그렇게 살지 마. 너 방금 그거 약 파는 거냐?”
“니 알 바 아니잖아. 신경 꺼.”
이 말을 들었을 때 도유진이 왜 날 때렸는지 알 것 같다. 좀 얄밉긴 하네.
바로 앞에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얘한텐 집에 들어간 것처럼 해야지.
“야. 우리 집 다 왔다. 나 먼저 들어간다.”
“야, X발.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우리 집 앞까진 같이 가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 존나 심심한데.”
그냥 너 혼자 집에 가라, 제발… 나 해야 할 거 많으니까.
“아, 너 때문에 존나 피곤해. 들어가서 잘 거야.”
“알았다.”
도유진은 내 말에 뚱한 표정으로 혼자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나강림. 우리 담임 잘생겼더라. 담임한테 잘 보이고 싶으니까 내일 아침에 나 깨워라. 지각 안 하게.”
“뭐라냐. 너 알아서 일어나라.”
“난 말했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도유진의 등 뒤로 노을 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 *
나는 슈트를 입은 채 건물의 옥상에 서서, 도유진이 자기 집까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 집에서 5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에 있는 도유진의 집은 원래 세상에 있던 집과 너무도 비슷하게 생겨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추억을 자극했다.
“제인. 쟤 약 하는 거 같아?”
[“일단 송보라와 비교해 보았을 때, 외적으로 보이는 신체 반응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자세한 건 머리카락이라도 구해서 정확하게 분석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꼭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그럴 거 같아서 일부러 머리 때린 건데.
“이거. 아무튼 일단 분석해 봐.”
내 손 안에는 도유진의 머리카락이 몇 개 붙어 있었다.
[tool-분석기를 개방하시겠어요?]
[필요 경험치 : 35exp]
“아. 이런 거까지 꼭 경험치를 받아야 해? 대부분은 그냥 네가 해줄 수 있잖아.”
[“어차피 계속 쓰실 거 같은데, 하나 장만하세요. 어차피 자주 쓰면 경험치 들어가는 거 아시잖아요.”]
짤짤이로 몇 번 쓰며 끌어보려고 했는데, 안 통하는 모양이다.
“알겠어. 분석기 개방해 줘.”
[35exp를 사용해서, 분석기를 개방합니다.
현재 남은 경험치: 167exp]
내 손 위에 홀로그램으로 구성된 성분 분석기의 모양 틀이 먼저 나오고, 그 위에 천천히 분석기가 조립되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와, 야, 무슨 만화 같….”
‘원작’에서 자주 묘사되던 연출이 눈앞에 나타나자 오랜만에 덕심이 차올랐던 나는, 이윽고 현실을 깨닫고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만화 같은 게 아니라 만화 속 세상이었지.
마치 게임에서 장비를 만드는 장면이 생각나서 꽤 재밌었다.
이윽고 완성된 성분 분석기 안에 나는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집어넣었다.
* * *
슈트를 입고 아까 도유진을 만났던 골목길에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거기에 있던 양아치들도 자리를 옮긴 후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꽁초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바닥을 슬슬 훑었다.
누가 보면 모양 좀 빠지긴 할 텐데. 누가 봤다고 동화율 떨어지고 그러진 않겠지?
찾았다.
나는 꽁초를 찾아 툴 벨트의 분석기에 집어넣었다.
[성분 분석 중…….
10%…
50%…
100%…
분석 결과
마약류 약품.
연기 흡입을 목적으로 제조됨.
효과 : 행복감, 고양감, 활력, 자신감.
부작용 : 환각, 강박증, 식욕 감퇴.
뮤턴트 인자에 작용하는 일종의 변이 인자 발견. 장기 흡연할 경우 뮤턴트 인자의 브루트화 증상을 야기할 수 있음.]
“도유진은 이 약 한 적 없는 거 확실하지?”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도유진 머리카락에선 마약성 약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니까요.”]
[도유진의 머리카락에선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음. 음성.]
앞으로 이 약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를 더 제대로 찾아봐야겠네.
삐뽀삐뽀
위이이잉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한 종류가 아니고 여러 종류가 한 번에 들리는 걸 보니 꽤 큰 사건이 일어난 모양이다.
“제인. 사건 개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공장 단지 화재요.”]
…….
번쩍.
갑자기 머리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기억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지금 공장 단지에 큰불을 낸 건 그냥 시야를 돌리기 위함이고, 히어로들이 공장 단지로 몰려간 틈을 타 다른 물건을 찾는 것이, 본래 목적이다.
근데 그 사건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을 텐데. 왜 벌써?
아무튼, 이 사건은 일단 막아내야만 한다. 지금 막지 않으면 내가 미리 만들어놨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경한 은행 강도에 관한 소식을 들었던 게 번뜩 생각이 났다.
아, 도유진 사건부터 처리하려고 했는데.
“제인. 우린 공장 단지에 가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천산시 내의 은행들을 감시해. 공격당하는 은행이 있는지 찾아줘. 난 그곳으로 갈 거야.”
* * *
[“1층에 있는 인원은 총 8명. 인원 대다수가 총기로 무장 중. 2층 3명. 정확도 95.3퍼센트. 2층에 있는 인원 중 한 명은 인질로 보입니다.”]
마치 벽 너머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제인의 브리핑. 슈트의 능력이 많이 제한된 현재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역시 제인이다.
‘제인. 은행 건물의 설계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어?’
[“가능합니다. 경험치 5가 소모됩니다만, 괜찮으시겠어요?”]
경험치 5.
생각보다 큰 규모의 사건이니까 보너스 경험치를 많이 얻을 수 있을 테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오케이. 내려받아 줘.’
『경한 은행 나안점 설계도
다운로드 준비 중.
…10%
…50%
…100%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눈앞에 설계도가 펼쳐졌다.
[“은행 구조상 현금과 현물이 될만한 금고는 은행 지점장이 가지고 있는 키카드를 지참한 채, 금고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야만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에요. 지금 2층에서부터 세 명이 지점장 데리고 올라가네요.”]
제인의 설명을 들으며 망원경으로 놈들의 추세를 살피고 있었더니, 과연 세 명이 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와, 진짜 게임 같아.
슬슬 흥분되기 시작했다. 마치 원작 만화를 기반으로 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기분.
1층에 있던 놈 중 몇 명이 무전을 받고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3명이 3층으로 올라갔으니 2층도 감시하에 두려는 모양이지.
나는 예전처럼 창문을 발로 깨며 안쪽으로 들어서려다가 생각을 바꿔먹었다. 이전엔 총이 없는 놈들이니까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놈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창문을 뚫고 들어갔다간 몸이 벌집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설계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 *
더 다크 카이저의 AI인 제인의 능력은 내 상상보다 훨씬 더 유능했다. 제인이 가져온 이 설계도에는 옥상부터 금고문 앞까지 숨겨진 통로가 있다는 것까지 나와 있었다.
[“그게 바로 저예요.”]
그렇게 말하며 제인이 뿌듯한 듯 혼자 실실 웃기 시작했다. 어두운 비밀 통로를 지나며 여자 목소리가 혼자 실실 쪼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괜히 그런 부분을 지적했다간 또 삐칠 거 같아 가만히 있었다.
원작에 따르면, 경한 그룹의 대표 사대희에겐 심한 안전 불안 장애가 있다. 그는 항상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안전 요원들을 대동해야만 움직이며, 음식과 음료 또한 자신의 손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집에는 수많은 사냥개를 풀어 기르며, 24시간 돌아가는 CCTV 한복판에서 생활한다. 공식 석상에서도 거의 온몸을 가리는 특수 제작한 갑옷을 하나 껴입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냐면, 주변 측근들 이외에는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경계심이 많아, 종종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자주 가는 건물에는 꼭 비밀 통로를 하나 마련해 둔다. 아마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싫은 모양이다.
그리고 이 건물에는 사대희가 만들어놓은 비밀 통로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곳을 통해서 이동하고 있었다.
쭉 통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자, 금세 놈들의 머리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천장 틈으로 내려다본 놈들은 이미 금고 안에 다녀온 듯, 손에 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진짜 여기 있었네요, 보스.”
“이런 데 숨긴다고 우리가 못 찾을 거라 생각했나. 어처구니가 없구만.”
보스라고 불린 남자는 검은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눈에 탐욕이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이 남자가 노렸던 것은 돈이 아니라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인 듯했다.
“경섭아. 그만 챙기고 나와라. 똥파리 꼬이면 귀찮아진다.”
“예. 보스.”
남자의 말에 금고 안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기고 있던 남자가 가방을 하나 짊어지고 나왔다. 인질을 끌고 다니던 남자가 인질의 머리에 자동소총을 겨누고 물었다.
“…그럼 이놈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흐이이익.”
“쏴버려. 괜히 내버려 둬서 좋을 거 하나 없잖아.”
쯧. 더 지켜보았다간 송장이 하나 생길 것 같아, 이쯤에서 안쪽으로 들어서기로 마음먹으며 히어로 랜딩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