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스카 페이스(2)
“쏴버려. 괜히 내버려 둬서 좋을 거 하나 없잖아.”
쯧. 더 지켜보았다간 송장이 하나 생길 것 같아, 이쯤에서 안쪽으로 들어서기로 마음먹으며 히어로 랜딩을 준비했다.
굳이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을뿐더러,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히어로로서의 체면도 살지 않는다. 제인은 경험치 채점 때 가차 없이 감점해 버릴걸.
“지금 여기, 나 강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숨어 있던 통로에서 뛰어 내려오며 인질을 향해 총을 쏘려던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빡!
머리에서 난 소리라곤 믿어지지 않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풀썩 쓰러졌다. 놈들이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빠르게 끝을 봐야 한다.
가장 위험한 총기를 가지고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야지. 방금 경섭이라고 불린 남자가 들고 있는 자동소총을 손으로 붙잡고,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갈겨 넣으려고 할 때였다.
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보스라고 불리던 놈이 손에 쥐고 있던 리볼버를 순식간에 전부 갈겨 버렸다.
나는 가까스로 경섭을 방패 삼아 놈의 총알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놈은 자신의 부하가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총탄을 쏴버렸다.
“히이이이익.”
그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인질로 잡혀 있던 지점장이 거의 기어서 금고 안쪽으로 도망쳤다.
“넌 누구냐? 처음 보는 얼굴인데? 또 새로 나타난 아이돌인가?”
“아이돌?”
“너처럼 가면 뒤집어쓴 새끼들은 다 똑같아. 정해진 듯한 표정을 하고, 정해진 듯한 포즈를 짓고, 정해진 듯한 대사를 치고. 대중의 말에 휘둘리고, 주어진 힘을 우리처럼 마음대로 휘두르지도 못하지. 그게 아이돌이랑 다를 게 뭐냐?”
남자가 리볼버를 손에 쥐고 능글능글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범죄자들과는 달랐다. 놈은 내가 히어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본인은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남자의 저 능글능글한 표정과 말투마저 능력을 지키기 위한 컨셉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쭉 찢어진 눈.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얼굴에 난도질 되어 있는 칼자국들. 스카 페이스다. 원작에서 나왔던 얼굴과 빼다 박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조금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스카 페이스는 원작에서도 많은 히어로들을 애먹이는 강력한 빌런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다크 카이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스카 페이스는 손에 쥐고 있던 리볼버를 다시 한번 내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비어 있네.”
동시에 내게 날아드는 스카 페이스의 주먹. 남은 총탄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움찔한 덕분에, 놈의 다른 쪽 주먹을 신경 쓰지 못해 한 방 먹었다. 놈이 쥐고 있던 가방은 어느새 바닥에 내려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놈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리볼버가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슝!
리볼버가 바람을 가르고 휘둘러지는 소리를 들은 몸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놈의 리볼버를 막아냈다.
막아내자마자 다시 한번 날아드는 놈의 왼손.
채찍처럼 후려치는 놈의 왼손을 오른손의 체인으로 쳐내고 놈의 손에 들려 있는 리볼버를 걷어찼다.
투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리볼버. 놈은 리볼버를 놓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 주먹을 내게 연속으로 휘둘러댔다.
파바박!
빠르다. 놈의 육체 능력은 속도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 능력이 힘 위주로 맞춰져 있는 나로서는 피하고 막아내기도 버거웠다.
[“상대 전투 스타일 분석 중…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전투 센스 또한 이제 막 히어로가 된 나보다 스카 페이스의 센스가 훨씬 좋았다.
몇 번의 주먹질이 오가고 내 몸에 타격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을 때, 놈의 오른손이 다리 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스카 페이스의 주특기는 나이프 격투술. 그리고 지니고 있는 나이프는 미스릴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마 내 슈트도 저 나이프에는 힘을 쓰기 힘들 거다.
놈이 손에 나이프를 쥘 수 없게 하는 편이 내게 더 유리하다. 맨손으로도 빠른 속도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나이프까지 쥐게 되면 내가 놈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놈이 나이프를 쥐기 위해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잠시 틈이 생겼다. 나는 놈이 오른손으로 내 공격을 막아내도록 유도하기 위해 놈의 오른쪽을 향해 발차기를 휘둘렀다.
내 발차기를 막아내기 위해 내려가려던 손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내게 틈을 준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놈이 가드를 올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놈을 힘차게 걷어찼다.
빠악!
놈이 내 발에 담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밀려나 벽에 부딪혔다.
내게 개방된 몇 안 되는 능력 중의 하나가 각력이다. 콘크리트 정글을 뛰어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각력은, 발차기에도 뛰어난 위력을 발휘한다.
나는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다시 한번 달려들어 놈의 가슴에 무릎을 박아 넣었다.
우지직
놈의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이놈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 페이스는 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히어로들을 방해하는 주축으로써 활동한다. 여기서 미리 끝을 내놓는다면, 이 이후 행보에 꽤 큰 도움이 될 거다.
앞으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거슬리고 귀찮을 놈이다. 나중에 세를 불리고 나선 공략하기 늦었을 테지.
나는 놈의 가슴에 돌려차기를 집어넣기 위해 몸을 회전시켰다. 공격을 성공시켰을 때 최대한의 위력을 놈에게 때려 박아야 이길 가능성이 높다.
‘…얕다.’
놈이 몸을 최대한 틀어 피한 덕에, 놈의 가슴팍에 박힌 공격이 얕게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쉭!
동시에 내 뱃가죽을 가르고 들어오는 나이프의 소름 돋게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나는 뒤로 풀쩍 물러났다.
그 칼을 뽑지 못하게 하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 사이에 나이프를 뽑아내는 데 성공한 거다.
내가 뒤로 몸을 빼는 동안에도 내 팔과 다리에 칼날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꽤 깊다. 일반인이 휘두른 칼날이라면 별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을 다크 카이저의 슈트도, 미스릴 합금의 나이프엔 무력하게 찢겨나갔다.
[전투 스타일 분석 완료. <다크 카이저 슈트 모드 - 스피드 스타> 개방이 필요합니다. 개방하시겠습니까?
사용되는 경험치 : 100exp]
아. 저런 게 있었지.
일종의 스피드 타입 슈트. 원래 기본적으로 파워 타입인 슈트를 변형시켜 가볍게 만들어, 스피드 타입의 적에 대항할 수 있게 만드는 모드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먹었을까?
내 앞에 있던 스카 페이스는 들어오라는 뜻으로 알아먹었던 모양이다.
휙!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내 가슴팍으로 날아드는 미스릴 나이프.
SUIT MOD
The Dark Kiaser
철컥… 철커덕….
몸에 붙어 있던 슈트의 조각들이 변형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서 놈이 휘두르는 나이프의 궤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아마 제인이 놈의 전투 스타일을 파악해서 보여준 걸 테지.
아까는 눈에 보이지도 않아 피할 엄두도 못 내고 당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인다. 나는 미스릴 나이프를 몸을 틀어 피해내며, 놈의 가슴팍에 훅을 연달아 먹였다.
퍽퍽퍽!
슈트가 변형한 탓에 확실히 힘은 약해졌지만, 상대의 나이프에 대응하기는 편해졌다.
서로 치고받는 공격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하며, 내가 입고 있던 슈트가 점점 더 얇고 가벼운 형태로 변화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이쯤 되면 상대도 내 변화에 대해 눈치챘을 거다.
아. 그런데 슈트 안이 왜 이렇게 덥냐?
[“다크 카이저. 육체와 정신에 한계가 온 탓에 슈트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어요.”]
슈트 전체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이 그 때문인 모양이다. 이젠 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올 정도로 슈트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상대도 공격의 속도와 날카로움이 확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슴팍에 들어갔던 공격이 얕았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가슴을 중심으로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슈트의 기본 모드로도 피해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슈트 파워 모드 온.”
SUIT MOD
The Dark Kiaser
신기한 경험이었다.
제인이 보여주는 궤적에 따라 나이프가 움직이는 것이 정말 느리게 보였다.
제인이 미리 보여주는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나이프를 피하며 나는 놈의 가슴팍에 무릎을 박아 넣었다.
“어딜!”
페이크다.
마찬가지로 내 몸에 데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채고, 나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속도를 점점 늦췄던 모양이다.
아까까지 느리게 움직이던 나이프가 어느새 내 뱃가죽을 베어내고 있었다.
나는 피가 철철 흐르는 배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섰다.
스카 페이스도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었으니, 놈 또한 무사하진 않을 거다.
후욱… 후욱….
잠시 숨을 고르며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이 상태로 다시 싸우면 이길 거란 보장이 없었다.
툭.
내 발에 놈이 가지고 가려던 가방이 걸렸다. 내 발밑에 놓인 가방을 보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스카 페이스가 말했다.
“내가 그 가방을 가져가고… 이대로 쫑. 나머지 승부는 다음번에… 어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받아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낼 힘이 나지 않았다.
[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WARNING!]
[“다크 카이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긴 무리예요.”]
내 눈 위로 내 몸 상태를 표시한 여러 가지 홀로그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붉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보스! 퀘이사입니다! 퀘이사가 왔어… 으아악!”>
“아이돌 멤버가 한 명 더 있었네?”
스카 페이스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놈도 나와 싸우며 적지 않은 피해를 본 터라, 새로운 히어로의 출현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오늘 얻은 빚은 꼭 나중에 갚아주도록 하지. 이름은?”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
“뭐…? 어둠의 황제?”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던 스카 페이스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예의 분위기로 돌아가 씹듯이 내뱉었다.
“그래. 뭐~ 잊히진 않겠군.”
내가 내려온 비밀 통로를 통해 스카 페이스가 풀쩍 뛰어 빠져나갔다. 가슴뼈가 으스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꽤 빠른 속도다. 따라잡기엔 내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아직도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더 오랫동안 싸움을 계속했을 때 승리를 점치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최소한 가방은 잃지 않았다.
나는 더듬더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 *
우르릉….
쏴아아….
“아휴.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 와?”
나강림의 이모, 이소희는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에 불길함을 느꼈다. 그냥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느낌이 느껴질 때마다 이소희의 주변엔 안 좋은 일이 생기곤 했다.
그래서 본래 오려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귀가했다. 혹시라도 강림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강림아?”
그 불길하고 무서운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이소희는 조카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조카가 요즘 들어 뭘 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요즈음 1~2주 사이에 조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는 통에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이런저런 곳에 고민을 털어놔 보았으나, 고등학교 1학년은 사춘기가 오는 게 자연스럽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조카와 멀어진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기 위해 조카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강림아? 자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 이소희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11시가 좀 넘은 시각. 이 시간에 조카가 수면에 드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방 너머의 적막에 거센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방을 비우고 바깥에라도 나간 걸까? 요즘은 시대가 달라져 예전처럼 밤에 돌아다니기도 힘들 텐데…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철컥.
끼이익….
이소희는 천천히 방문을 밀어 열었다.
씩… 씩….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
문 맞은편에 보이는 침대 위에는, 조카가 얌전한 모습으로 이불을 둘러쓴 채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오늘 첫 등교 날이라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이소희는 조용히 잠을 자는 조카의 모습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자야 내일 학교도 가고 그러겠지.
이소희는 쌔근쌔근 잘 자는 조카의 방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조용히 닫았다.
끼이익… 찰칵….
지직….
지익….
직….
이소희가 문을 닫았을 때, 침대 위에 제인이 만들어둔 나강림의 홀로그램이 잠시 흐려졌다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