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11화 (11/236)

제11화

헬스폰(2)

헬-스폰.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Heroicest」의 세계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확장된다.

이 안에 들어 있는 이 물건은, 「Heroicest」의 세계를 지옥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원래는 실제로 스카 페이스가 상자를 여는 데 성공하는 바람에 통로가 열려 버리게 되고,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이 이 세계를 침공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있는 한, 그렇게 둘 순 없지.

원작에서는 사대희가 이 물건을 어떻게 해서 손에 넣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반 권에 걸쳐서 진행된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만화를 보는 독자가 아니라 만화 속 한 명의 등장인물일 뿐인지라,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사대희가 이 물건을 이렇게 빨리 손에 넣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아마 지금 입수 과정이 내가 알던 과정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내가 알던 내용과 최대한 변하지 않았기를 기도해야겠지.

“그럼… 이 물건, 어떻게 할 거예요?”

황서연은 나가 있다 돌아와서 어떤 물건인진 모르지만, 분위기상 위험한 물건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그건 퀘이사,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거 같다.”

“으엑.”

어? 방금은 강수아 목소리가 나온 거 같은데.

내가 이 불길한 가방을 자신에게 주려고 한다는 것에 놀란 모양이다. 청명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던 목소리가 아닌 평범한 여고생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마 목소리를 변형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가방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물건은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게 더 안심되지 않겠나?”

“그 말이 맞긴 하네. 알겠어. 내가 가지고 가도록 할게.”

다행이다. 나도 저거 우리 집에 가져가기 싫어.

거기에 나는 상자를 여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헬-스폰의 정신 지배에 취약해질 가능성도 크다. 사대희가 괜히 헬-스폰을 자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 가져다 놓은 게 아니다.

아예 여는 방법을 모르는 퀘이사가 가지고 있는 편이 더 낫겠지.

가방을 지키고, 퀘이사와의 연관 고리가 생긴 것만으로 지금은 이득이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으아악.

비명이 나오려는 걸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내일 당장 학교에도 등교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강수아, 쟤도 마찬가지일 텐데. 오늘 화재  때문에 일찍 돌아가질 못했나 보네.

“벌써 가요?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여기서 더 쉬었다 가도 돼요.”

“뭐··· 뭐라고요?”

beeep-!

제인이 삐 하는 경고음을 내 귓가에 흘렸다.

아, 다크 카이저. 히어로 컨셉 지켜야지.

“아니. 아니, 됐어. 이 시간이야말로 밤의 황제인 나의 시간이니까.”

나는 옆에 있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다행스럽게도 창문은 내가 나갈 수 있을 만큼 컸다.

아. 이거 예쁜 여자들 앞에서 하려니까 더 쪽팔리네.

“나는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 이 빚은 잊지 않겠다.”

“잠깐! 연락은 어떻게….”

퀘이사가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창문을 넘어 뛰었다.

아 개 쪽팔리네, 정말.

[“Not bad. 정신없는 상황에서 한 것치곤 나쁘지 않았어요. 앞으로 더 발전해 주시길 바래요.”]

[경험치 +25]

제인이 내게 경험치를 건네줘도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    *    *

“강림아? 나강림! 일어나서 학교 가야지!”

나는 이모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정말? 잠깐 눈을 감은 거 같은데 벌써 아침이라고?

“너 어제 그렇게 일찍 자놓고 늦잠 잤네. 이모가 일찍 일어난 게 아니었으면 지각했겠다. 많이 피곤했니?”

이모가 이렇게 깨워주는 게 얼마 만이더라.

“자면서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렸어? 빨리 씻고 가.”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등교가 8시 반까지니까, 벌써 꽤 늦었네. 이럴 때 슈트를 입고 옥상을 건너다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면 나도 초능력이나 있었으면 좋겠네.

안타깝게도 제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내추럴이란다.

내 몸에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뮤턴트 인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아마 이대론 평생 가도 자연적으로 초능력을 개화할 가능성은 없을 거다.

만화 속에 나왔던 몇몇 방법들이 생각나긴 하지만, 아직은 원작에서도 극 초반인 구간. 내가 초능력을 가질 방법은 아직까진 없다.

일단은 이럴 시간에 빨리 씻고 학교나 가야겠다. 이미 많이 늦었다.

나는 상처에서 나오는 통증과 근육통으로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    *    *

삐거덕대는 몸을 이끌고 교문을 지나려던 순간, 내 앞을 강수아가 후다닥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렇네. 쟤도 어젯밤에 늦게 잤지. 쟨 용케 지각 안 했네.

후다닥 달려가는 뒷모습도 예쁘다.

“아. 도유진이 깨워 달라고 했었는데.”

교문을 지나고 나서야 어제 도유진과 했던 약속이 생각이 났다.

뭐… 지가 알아서 일어나서 도착했겠지. 나도 늦을 뻔한 터라 깨워줄 시간이 없었다.

귀찮게 구네, 도유진….

원래 세계의 인생에선 졸업식 날 이후로 다신 볼 일이 없어 엮일 일이 없었지만, 이 세계에선 같은 반이 되어버렸다.

나는 지금은, 내가 도유진을 좋아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땐 그냥,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소꿉친구와 헤어지게 되는 아쉬움으로 감정을 착각했던 것뿐이다. 그 이후로 성인이 돼서 군대를 전역할 때까지 도유진을 완전히 잊고 살았었으니까.

[“그냥 흑역사를 잊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구요?”]

과거로 돌아왔더니 내 흑역사에 더해, 내 AI까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네.

어제까진 도유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긴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반 친구가 되어버린 탓에, 도유진이 나를 놀려먹는데 내 가장 큰 흑역사를 써먹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걔는 날 괴롭히는 게 취미니까. 아마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도 내 흑역사를 들춰낼지도 모른다.

아직 몸의 치료가 덜 된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아파왔다. 빨리 가서 책상에 엎드려라도 있어야겠다.

*    *    *

다행스럽게도 이모 덕에 지각은 가까스로 벗어났고, 출석 체크가 끝나고 1교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꿀 같은 낮잠을 자려던 찰나.

쿡쿡.

내 볼을 찌르는 누군가의 손가락에 눈을 떴다.

대체 어떤 놈이 자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찔러서 깨워?

“야. 나강림. 너 왜 나 안 깨웠냐고. 어? 내가 너 때문에 지각했잖아. 내가 늦게 일어날 거 같으면 나한테 전화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어제 전화해서 깨우랬잖아.”

그래. 여기서 날 이렇게 다룰 사람은 너밖에 없지.

“아, 너 진짜 미쳤냐? 내가 니를 아침부터 왜 깨워. 니가 알아서 쳐 일어나 좀.”

나는 나를 툭툭 치기 시작한 도유진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엎드려 휴식을 취했다.

“야, 나강림. 너도 공부 별로 못하잖아. 책 보는 척하지 말고. 뒤지기 싫으면 내 말에 대답해라.”

툭툭.

“내 말에 대답하랬다.”

툭툭툭.

“야. 너 진짜 뒤지고 싶어?”

아, 진짜 귀찮게 구네.

“내 폰에 니 번호가 없어. 그래서 못 했다. 왜? 꼽냐?”

나는 요놈의 계집애를 조금 곯려줄 양으로 일부러 거짓말을 한 번 쳤다. 요놈 계집애 성격상 내가 자기 번호 지웠다고 하면 아주 깜짝 놀랄 거다. 이런 거에 꽤 민감하게 구는 성격이거든.

내 예상대로 도유진은 그 큰 눈을 꿈뻑거리며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거 봐라. 내가 네 머리 위에 있다, 이 자식아.

“뭐야. 너 내 번호가 없다고?”

“그래, 없어.”

“왜 없어?”

“모르겠는데. 기억이 안 나서.”

드르르륵

“자, 조용조용. 선생님이 들어왔는데 아직 엎드려 자는 애들 뭐야? 집에서 안 자고 왜 여기서 자?”

쿵쿵쿵쿵

선생님이 들어와 애들을 깨우기 위해 책상을 쿵쿵 때리는 것을 보며, 도유진이 내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수업이 시작돼서 외려 다행이다 싶었다.

“자. 32페이지 펴고. 오늘 며칠이야. 5일? 15번 일어나서 읽어봐.”

아, 지루한 학교 수업이 시작됐다. 이번에 다시 3년을 보내면 고등학교만 6년 다닌 셈이네. 아, 지겨워.

지이잉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

수업이 시작했으니 무음으로 바꿀 생각으로 나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뒤지기 싫으면 내 번호 다시 등록해 놔라. 또 지우면 나한테 진짜 뒤질 줄….]

나는 주소록 수정 버튼을 눌렀다.

「이름 : 미친개」

확인.

*    *    *

아, 드디어 끝났다.

첫 번째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다니고 있는 이 천산고에는 미래 유망한 몇 명의 초능력자들이 존재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초능력을 깨우치고 초능력 특별전형으로 탄탄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도 존재하지만, 반대로 스스로가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초능력을 숨기고 있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아이들도 몇 명 있다.

내가 그런 애들을 모두 품을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높은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둘 수도 없으니까 몇 명씩 얼굴도 익히고 천천히 상황을 지켜볼 요량이다.

내가 다크 카이저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기고 나강림으로서만 친해지면, 미래에 일어날 정신 지배 사건에 영향받을 일도 없을 테지.

“야, 나강림. 너 내 문자 왜 안 봐? 번호 다시 등록했냐?”

아니, 얘는 나 차놓고 왜 이렇게 나한테 질척대냐?

“어, 어. 어, 알았어. 나중에 할게.”

“야, X바. 나강림.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데 어디 가?”

얘한테 한번 물리면 이번 쉬는 시간엔 아무것도 못 한다. 일단 무시하고 할 일이나 하고 와야겠다.

“아, 니가 알아서 뭐 하게?”

“아, 이 새끼. 똥 싸러 가네.”

저게 미쳤나? 목소리 존나 크네, 진짜. 내가 대체 옛날에 쟤를 왜 좋아했지?

나는 저 미친개랑 더 엮이지 않기 위해 서둘러 교실 밖으로 도망쳤다.

*    *    *

내가 쉬는 시간에 향한 곳은 도서실이었다.

“오.”

내 생각보다 훨씬 넓네. 내가 원래 다니던 학교에선 고등학교 때 이렇게 도서실이 크지 않았는데.

오. 초능력 관련된 도서를 모아놓는 곳이 아예 따로 있네. 신기해라.

나는 도서실을 한번 둘러보고 대여, 반납대 앞에 계시는 사서 선생님 앞으로 갔다. 사실 진짜 용건은 여기에 있다.

“안녕. 찾는 책이라도 있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사서 선생님.

원작에서도 얼핏얼핏 등장하긴 하지만, 중요 인물이 아닌지라 제대로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미인이시네. 만화책 보정인가?

수수하고 꾸미지 않았지만, 그래서 느껴지는 미라는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 네. 저 혹시 도서 도우미 뽑나요?”

나는 도서 도우미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내가 이곳에서 도서 도우미라는 걸 하려고 한 이유가 세 가지 정도 되는데.

첫째로, 미리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 학교에선 도서 도우미를 하면 꽤 많은 봉사 시간을 준다.

방과 후 시간을 히어로 활동과 훈련으로 투자하고 있는 내게 따로 봉사할 시간을 내는 것보단, 학교 내에서 해결하는 편이 훨씬 낫다.

둘째로,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합법적으로 도유진을 피해 달아날 공간이 생긴다. 도유진에게 책이란 베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도서실까지 쫓아올 가능성은 적다.

그리고 셋째로, 이곳에서 빌런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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