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헬스폰(3)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로 점심때까지 도유진은 나를 더 괴롭히지 않았다.
그 이후부턴 자기 반에 있는 다른 친구들이랑 쉬는 시간마다 놀러 다녔거든.
아마 나를 가지고 노는 것에 질렸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덕분에 오랜만에 쾌적한 오전을 보낼 수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서 관찰해보니, 역시나 도유진이 어울려 다니는 애들은 죄다, 소문이 안 좋거나 대놓고 질 나쁜 경우였다. 특히나 자주 옆에서 목격되는 서지예, 황채경 모두 중학교 때부터 알아주는 양아치 일진들이란다.
골목길에서 삥을 뜯거나, 수제 담배를 팔고 있다는 소리는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인 모양이다.
다행스럽게도 도유진은 그걸 직접적으로 피우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쟤도 나 때문에 이 세계로 휘말려 들어와 겪지 않았어야 할 사건을 겪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도유진이 양아치들이랑 놀러 다니긴 했어도, 양아치 짓을 하던 애는 아니었으니까.
어제는 스카 페이스를 처리하느라 도와주지 못했지만, 오늘부턴 쟤가 뭘 하고 다니는지를 조금 알아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학교 외부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고, 일단은 먼저 학교에서 처리할 일을 한 가지 먼저 해야지.
나는 오늘 처음 도서 도우미로서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빠르게 점심을 해치우곤 도서실로 향했다.
“쌤~ 저 왔어요.”
이민아 사서 선생님.
원작에선 엑스트라 수준이라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막상 실제로 겪으니까 사람 좋고 인기 많은 사람인가 보다.
학교 안에서 지나가며 볼 때마다 항상 동료 교사들과 웃으면서 얘기하는 모습들만 목격했으니, 잘만하면 주변 돌아가는 상황을 빨리 알 수도 있겠다.
“어, 강림이 왔니? 고마워. 선생님도 빨리 점심 먹고 올게. 잠깐 대출대 좀 지키고 있어. 2학년부턴 대출 카드가 있으니까 대출 카드 찍고, 1학년들은 반 번호 이름, 여기에 적어놓으면 돼. 다녀와서 나머지 해야 할 거 알려줄게.”
“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른 교사들과 함께 외출해서 점심을 먹고 올 모양인가 보다.
대출대 지키고 있는 것 정도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카드 받아서 찍고, 책 받아서 바코드 찍으면 되는 간단한 업무다.
“후아….”
조용하고 평화롭네.
요 한 달간 평화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온 탓인지, 조용한 도서실이 생각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선생님 자리라 그런가? 의자도 편하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책을 보러 오는 사람은 있지만, 책을 빌리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렇게 조용히 평화를 즐기던 찰나, 누군가 대출대 앞으로 걸어오는 것이 느껴져 의자에 완전히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자. 도서 도우미로서 첫 업무인가. 완벽하게 해내어 주지.
어?
“저… 저기 혹시 1학년은 도서 카드가 없는데 대출할 수 있나… 요?”
대출대 앞에 서 있는 건, 내가 도서 도우미를 한 가장 큰 이유인, 한소연이었다.
* * *
이 세상의 초능력자들에겐 저마다 심리적인 약속이 한 가지씩 있다. 이 심리적인 약속은 초능력의 사용에 밀접하게 관계하기 때문에 이 약속의 조건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초능력의 사용에 제약을 받게 된다.
이를 가리켜, 히어로의 개인<규약>이라고 부른다.
약점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규약>은, 자신이 꼭 갖춰야 하는 복장 속에 숨겨져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꼭 해야 하는 말에 숨겨져 있거나, 혹은 꼭 해야 하는 행동이나 감정이 관계된 경우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히어로와 빌런의 <규약>들은 원작에서도 밝혀지지 않는다.
내가 보지 않은 작품의 후반부에선 밝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읽었던 중반부까지 <규약>이 밝혀져 죽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그런데도 몇몇 인물들의 경우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규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중 그 규약의 조건이 가장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있는 것이 바로, 내 앞에 있는 한소연이었다.
도수가 높은 두꺼운 안경, 화장기 없는 얼굴, 숫기 없고 소심한 성격, 작은 목소리.
전형적인 소심한 모범생 타입인 한소연은 어느 날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하던 따돌림이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하고, 그 따돌림이 계기가 되어 한소연은 초능력을 개화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빌런이 되어버린다.
한소연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한소연에게 사과하기만 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언급이 어림잡아 5번 이상은 나온다.
그래서 원작의 팬들 사이에선 한소연의 <규약>이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 대한 감정일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소연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한소연에게 사과하기만 했어도, 한소연이 빌런이 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난 미래를 알고 있잖아.
그럼 애초에 따돌림을 당하게 된 원인, 친구가 없는 한소연의 친구가 되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난 한소연의 친구가 될 수 있게, 한소연이 가장 시간을 오래 보내는 도서실의 도서 도우미가 되려고 한 거다.
“너도 1학년이지? 같은 학년 친구니까 굳이 존대할 필요 없어. 나도 1학년이거든. 1학년은 여기, 반이랑 이름 적고 옆에 책 이름 적어두고 가면 돼.”
“아, 응….”
“아, 내가 대신해 줄게. 반 번호 이름 알려줄래?”
“나 1학년 5반 21번… 한소연.”
“어? 바로 우리 옆 반이네. 난 4반인데.”
“어… 어…? 응….”
“책 좋아하나 봐?”
“어… 응….”
원작 만화에서도 숫기가 없다고 나오긴 했는데, 거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수준이네. 이런 성격일수록 급하게 마음먹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응. 다 됐어. 다음에 또 와.”
* * *
♬♩♪
으아아악! 드디어 끝났다!
몸이 쑤시고 아프던 것도 학교에 있는 동안 많이 괜찮아졌다. 황서연이 괜히 작중 최고의 치료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 정도 되는 치료사가 골목길에 숨어서 장사나 하고 있다니.
뭐. 나야 안 바쁘면 치료도 자주 받을 수 있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야, 나강림! 오늘은 우리 집에서 새로 나온 히어로 애니 안 볼래?”
수업이 끝나자마자 신이 나서 달려오는 박준석.
“어… 미안 내가 오늘은 영어학원 가야 해.”
“야, 구라를 칠 거면 창의적으로 구라를 쳐. 영어 시험을 반오십 맞는 놈이.”
쟤가 저런 말 할 때마다 너무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
“아, 제발. 주말에 같이 놀자. 내가 오늘은 진짜 바빠서 그래. 주말에 보자, 주말에.”
대충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책가방을 낚아채듯 집어 교실 문을 벗어나자, 그 뒤에서 준석이가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게 보인다.
미안. 오늘은 내가 너랑 놀아줄 시간이 없다.
오늘은 또 해야 할 일이 많거든.
그때, 내 앞에서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 교실을 빠져나가는 도유진이 보였다.
오늘은 도유진 일부터 해결해야지 마음이 편하겠다. 뭘 해도 도유진이 거슬려서 안 되겠어.
* * *
히어로 일이란, 항상 슈퍼 빌런과 전투를 한다거나, 도망치는 범죄자들을 잡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오늘 알았다.
“저희 진짜 돈 없어요.”
“돈이 없긴. 니네 뒤져서 나오면 얼마에 몇 대 맞을래?”
가끔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타이밍도 있다.
아… 제인… 이런 건 어떻게 해야 하냐?
[“히어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다크 카이저 본인이 찾으셔야 가치가 있는 법이지, 제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무튼, 어쩌고저쩌고 제인이 말 많은 걸 보니 이런 것도 그냥 지나치면 동화율을 떨굴 모양이다.
“여기 있잖아. 이 새끼들, 구라가 생활이네. 사기 싫으면 그냥 사기 싫다고 하면 되지. 왜 거짓말을 해? 내가 거짓말하는 거 존나 싫어하거든? 뒤지고 싶냐?”
도유진 일행이 학교에서 빠져나와 한 일은, 똑같이 다른 골목길에 모여 중학생들 삥을 뜯는 일이었다.
뭔… 사기 싫다고 하면 때릴 기세구만. 저런 분위기에서 사기 싫다고 어떻게 말해.
아무리 그래도 히어로인데, 이런 일에도 나서는 게 좋을까? 조금 모양 빠지는 거 아냐?
조금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이 조금 불편했기 때문에, 근처 건물로 숨어들어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슈트 온”
검은색 실이 내려와 내 온몸을 덮는 감각이 잠시 느껴지고, 내 눈 위로 익숙한 부팅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강림 님, 슈트 최초 동기화 중
10%…
30%…
100%…
가동 완료.
슈트를 개방합니다.]
나는 곧바로 점프해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히어로 랜딩.
쿵.
그렇게 높은 건물이 아니라 그런지 임팩트 있는 소리는 안 나네.
어차피 미성년자들이고, 주의 정도만 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굳이 과한 등장 연출 같은 걸 사용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도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뚝 떨어졌기 때문인지, 골목길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게 느껴진다.
“지금 여기, 나 강림.”
슈트로 인해 변형된 내 목소리가 골목길을 울렸다.
* * *
“지금 여기, 나 강림.”
뭐야, 저 찐따 같은 건?
황채경은 우스꽝스러운 컨셉의 검은 코스튬 히어로가 하는 말을 듣고 피식 웃고 말았다. 컨셉에 먹힌 수준 아냐?
갑자기 눈앞에 사람이 떨어져서 놀라긴 했지만, 어디서 들어본 히어로도 아니고 컨셉 또한 유치하게 보인지라, 황채경은 이 히어로가 분명 별것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아마 히어로 딱지 붙이기도 아까운 골목길 자경단 중 하나일 테지. 가끔 이런 골목 자경단이 나타날 때도 종종 있었다.
“앞으로 30초를 주지. 30초 안에 이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친다면, 너희들을 용서해 주겠다.”
“아저씨, 누군데요?”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이내 골목길 곳곳에서 비웃음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사과하고 돈을 돌려준다면 용서해 주겠다. 그리고 거기 너, 담배 꺼.”
한참 인상을 쓰고 쫄쫄이를 바라보던 서지예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주저앉아 있던 황채경도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몸을 일으켰다.
“저기요. 저희가 돈을 줬든 뺐든 신경 쓰지 말고-.”
“예, 죄송합니다.”
“당장 꺼ㅈ… 뭐?”
* * *
황채경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 이름 있는 히어로도 아니고, 자경단 수준의 히어로 한 명 정도는 셋이서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
거기에 자신들은 학생 신분이라, 자경단 활동하는 히어로 입장에서도 껄끄러웠을 터. 그렇게 자존심 상할 정도로 꺾여줄 필요는 없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도유진은 이상한 검은색 쫄쫄이를 상대로 지나치게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결국, 쫄쫄이가 요구한 대로 돈을 돌려주고 중학생들을 상대로 사과까지 해야만 했다. 평소 폼과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도유진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뭐야, 도유진. 왜 그래? 존나 이상한 새끼였는데 왜 이렇게 설설 기었는데?”
어제도 도유진이 자기 친구라고 찐따 같은 놈 하나 보호해 준답시고 다른 친구들 자존심 상하게 해놓고선, 이번에도 폼 안 나게 이상한 쫄쫄이한테 설설 기게 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아니, 진짜 무슨 강림이야, 강림이. 존나 씹덕 같애. 사과하고 고개 숙일 필요까진 없었잖아. 컨셉만 봐도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황채경 혼자 이해를 못 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매일 함께 다니는 보라 또한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 주었다.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힘을 얻은 채경은 어디론가 전화하려는 도유진을 다시 한번 채근했다.
“아, 쫌. 뭔지 말해야 우리도 이해를 해주지.”
“아, X발. 조용히 좀 해봐. 우리 지금 대박 났으니까. 이제 그딴 X같은 담배 안 팔아도 돼.”
도유진의 목소리에서 들떠 있는 감정을 읽은 채경은 입을 다물었다. 이 지저분한 약을 파는 것이 지겨운 것은 채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어, 여보세요. 어. 저 도유진인데요. 저 그 새끼 찾았어요. 그 검은색 쫄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