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헬스폰(5)
“뭐야? 방금 여기로 들어왔는데?”
아. 골치 아프네.
“탐색 가능한 이능계열 아무도 없어?”
중요한 물건을 빼앗겼으니 당연히 물건을 찾기 위해 뭔가 수를 쓰리라곤 생각했지만, 그게 내게 현상금을 걸어버리는 방법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다른 빌런들이나 몇 고용할 줄 알았는데….
“분명 여기 어디 숨어 있을 텐데….”
나는 지금 어느 불 꺼진 건물의 벽에 붙어 숨어 있었다.
다크 카이저의 슈트는 반타블랙에 가까운 아주 짙은 검은색이라,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한 인간의 육안으로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괜히 어둠의 황제, 더 다크 카이저라고 불리는 것이 과언이 아닌 셈이다.
…라고 중학생인 내가 설정했었지.
내가 과거에 설정한 내 설정에 큰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슈트 색만 믿고 여기 계속 숨어 있을 순 없긴 하다.
‘제인! 홀로그램 투영기 만들어줘.’
[“집에 하나 있는 거 말고 새로요?”]
‘당연한 거 묻지 말고 빨리해, 빨리. 시간 없어.’
[“예. 예. 알겠습니다. 경험치 10exp 사용해서 홀로그램 투영기를 제작합니다.”]
[현재 동화율 : 23.15%
현재 누적 경험치 = 267exp-10exp = 257exp]
다행스럽게도 스카 페이스와의 전투와 파워 피스트와의 전투로 얻은 경험치와 동화율이 꽤 된다.
경험치 10포인트 정도야 써도 지장 없을 거야.
“여기 찾아본 사람 있어?”
딱 그 타이밍에 내 앞으로 다가오는 히어로 한 명이 보인다. 항상 이런 클리셰적인 장면이 나오더라. 여기가 만화 속 세상이긴 한가 봐.
나는 동시에 내 툴 벨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홀로그램 투영기를 바라보며 초조한 속을 삼켰다.
거의… 다 됐는데….
저벅… 저벅….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그와 동시에 툴 벨트에 나타나는 홀로그램 투영기.
나는 곧바로 홀로그램 투영기를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지금 여기. 나 강림!”}
“저기다! 저기서 나왔어!”
우다다다다-
내 홀로그램 투영기가 제대로 작동한 모양이다. 나를 찾아다니던 히어로들이 내가 만든 홀로그램을 따라 달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휴… 진짜 들킬 뻔했네.
상대가 꽤 깨끗한 이미지의 기업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돈이면 나 같은 애송이 하나 묻어버리는 거 어렵지 않지.
나는 내 눈앞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신경질적으로 껐다. 하루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수배까지 때리냐?
별것 아닌 엑스트라 쩌리 히어로들. 원래라면 그냥 싸워 물리칠 만도 했지만….
나는 벌겋게 물들어 있는 슈트의 홀로그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파워 피스트와의 싸움으로 제인이 슈트를 심하게 과부하 시켜버리는 바람에, 슈트 자체의 성능이 너무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 도저히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에 파워 피스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가 조이기 한 번에 다 터져 버렸다. 슈트 안쪽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니까, 지금 가서 치료도 다시 받아야 할 판이다.
그리고 퀘이사한테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도 있고.
나는 치료를 받고, 현재 상황에 대해 알리기 위해 황서현의 가게로 향했다.
* * *
[Tattoo Daphne]
황서현의 가게 앞 건물의 옥상에 서서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그냥 문 열고 들어가는 건 다크 카이저의 컨셉과 맞지 않는 상황이지 않을까?
역시 다크 히어로는 창문을 넘는 게 좋겠지?
그런데 창문이 닫혀 있네. 닫힌 창문을 두드려서 알려주는 편이 좋을까?
고민하는 그때,
철컥
창문이 열리고 황서현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거기 서서 뭐 해요? 여기서 거기 서 있는 거 다 보이는데. 볼일 있으면 들어오세요.”
아….
순식간에 다시 수치심이 올라왔다.
그래도 이젠 좀 익숙해.
이렇게 된 이상, 원래 문을 열어줄 줄 알았던 것처럼 행동하자.
나는 올라온 수치심을 애써 무시하며 활공해서 창문 안으로 날아들었다.
“지금 여기… 나, 강림.”
“그거 꼭 해야 하는 거죠?”
황서현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더 쪽팔리잖아.
“그… 괜찮다. 그대와 퀘이사에게 전할 말이 있어 내가 지금, 여기 왔다.”
* * *
으다아아악.
다행스럽게 내가 상처를 입었다는 걸 금방 눈치챈 황서현 덕에 찢어진 상처에 대한 치료를 먼저 받을 수 있었지만.
끼아아아아악!
지난번에 왔을 땐 기절해 있어서 괜찮았는데, 이번엔 생살에 바늘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맨정신으로 느껴야만 했다.
이건 마치 화타에게 치료받는 관우가 된 심정…!
“제가 전문 의사가 아니라 타투이스트라, 마취제는 준비를 잘 못 해요. 구할 수 있을 때가 있고 구하기 힘들 때가 있고. 요즘은 마취제 구하기가 좀 힘들어요. 그래서 그런데, 마취제 없이 계속해도 괜찮겠어요?”
“별로… 고통… 스럽지… 않다….”
나는 관우다… 나는 지금 아프지 않다….
“…그럼 계속할게요.”
최강훈은 이걸 대체 어떻게 매번 견딘 거지? 앞으로 도저히 계속 맨정신으로 받을 자신이 없는데. 어디서 마취제 빼돌릴 방법이라도 알아봐야 할 판이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좀 쉬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씀드린 건데… 그래도 잘 참으셨어요. 이제부터 좀 더 편해지실 거예요.”
드디어 끝났나 보다. 봉합 도구를 내려놓은 황서현이 내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tu-ta-bien….”
눈을 감고 무어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한 황서현의 손에 녹색 에너지가 맺히기 시작했다.
오. 이 세계의 초능력이란….
초능력이 없는 세계에서 온 내추럴인 나에겐 무슨 능력이든 신기할 따름이다.
작가가 설명하길, 꼬리가 하나 생긴 기분에 가깝다고 했는데, 대체 그게 무슨 기분일까?
계속해서 눈을 감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며 내 상처 부위를 쓰다듬어 주자, 점점 더 상처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상처가 좀 편해지니까 내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황서현의 몸 곳곳에 그려진 타투에 자꾸 눈이 갔다.
팔다리, 배, 목덜미, 쇄골.
몸 곳곳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들.
내 피부 위를 미끄러지는 황서현의 부드러운 손.
“자. 이제 좀 편안해졌죠? 아까도 말했지만 제 능력이라고 완전히 아물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휴식을 좀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나는 황서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다크 카이저. 이 빚은 잊지 않겠다.”
“바로 어제 그 말씀 하셨던 거 기억하시죠?”
“…….”
할 말이 없네.
일단 상처 치료는 받았으니, 말을 전해야지.
“사대희가 범인으로 스카 페이스가 아닌 날 지목했다. 내가 강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명 수배됐더군. 아마 하는 걸 보니 물건이 아직 나한테 있는 걸로 아는 것 같긴 하다만, 만약을 대비해 물건의 관리에 신경 써달라고 전해줄 수 있겠나?”
“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아요. 상황이 좋지 않아졌네요. 몸조심하세요.”
대답 대신 창문을 열어 아까 전 건물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달을 바라보며 황서현을 등진 채, 나는 컨셉에 몸을 맡겼다.
“어둠의 황제 다크 카이저에게 이 정도 상처는 생채기에 가깝지….”
드륵, 탁!
…….
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닫힌 창문을 바라보다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 * *
[“마스터. 말씀드릴 게 있어요.”]
어? 뭔데, 말해봐.
[“오늘은 창문으로 들어가시면 안 돼요.”]
…왜?
[“아까 파워 피스트와의 전투에서 과부하했을 때, 홀로그램이 꺼져버린 거 같아요. 꺼지고 나서 이모님이 오셨어요.”]
그 소린 즉….
[“마스터는 아직 집에 안 들어간 걸로 돼 있는 거죠.”]
하….
나는 부랴부랴 내 스마트폰과 연동된 홀로그램을 눈앞에 띄웠다.
[pm 10:22
부재중 전화 5통.
이모.]
“왜 이걸 이제 말해?”
[“과부하에, 마스터의 좋지 않은 몸 상태 때문에 저도 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거든요? 이걸 어떻게 제 탓만 하실 수가 있어요? 너무해요.”]
하… 큰일 났네.
띠 띠 띠 띠 띠리링
도어락이 편하긴 한데, 조용하게 들어오는 데는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다. 나는 제발 이모가 주무시길 바라며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거실과 이모 방의 불은 꺼져 있었다.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내 생각보다 너무 늦어졌다. 내 몸 상태와 슈트의 상태에 따라 집 안에 있는 홀로그램이 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앞으론 다른 대책을 세울 필요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큰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띠리리리
아차.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집의 정적을 깨고 울렸다. 맞다. 도어락은 닫히는 소리가 나지….
그 소리에 잠시 이모 방문 쪽을 살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주무시는 듯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내 방 앞으로 가 방문을 열었다.
“이제 왔니?”
히이이익.
나는 내 방 침대 위에 걸터앉아 조용히 문 쪽을 노려보고 있던 이모를 보고, 기겁하며 본능적으로 차렷 자세로 섰다. 이모는 이모 방에 계신 게 아니라 내 방에 있었다.
“우리 강림이, 지금이 몇 신지 맞춰볼래?”
[“10시 25분이요.”]
이모가 평소처럼 잔소리하듯 말하면 덜 무서웠을 텐데, 오히려 흥분한 기색 없이 조용조용히 말하니 더욱 긴장되기 시작한다.
“어… 그게… 학교가 끝나고 친구 집에서… 그… 준석이 집에서 애니메이션 본다고… 새로 나온 히어로 애니메이션이….”
미안하다, 준석아.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어휴.”]
쟨 또 왜 저러는 거야?
“친구 집에 갔으면 갔다고 전화라도 하고, 전화를 못 하겠으면 카톡이라도 남겼으면 좀 좋아? 그럼 이모가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에요. 그 카톡 한 줄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게 준석이랑 놀다 말고 잠깐 잠이 들어가지고….”
“뭐어?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니?”
[“거봐요. 내가 말했죠.”]
두두두두 쏘아오는 이모의 말과 옆에서 돕는 제인의 말에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바깥에서 히어로 놀이를 하다 집에 돌아올 시간을 잊었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죄송해요. 이모… 정말 고의로 늦은 게 아니었어요.”
오늘 있었던 일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모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긴 했다. 이모를 위해 하는 일인데… 이모를 잊어버리다니….
[“아이고. 불효자는 웁니다.”]
아아악! 미안해! 제인, 제발 그만해!!
* * *
다행스럽게도 이모는 내가 준석이네 집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다 잠들어서 늦었다는 말을 믿어주셨다.
아마 단 한 번도 이런 일로 속 썩인 적 없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다는 것 때문에, 이모가 내 말을 믿어준 것이리라. 처음으로 찐따처럼 살아온 과거의 내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잘했어. 중학생 시절의 찐따 나강림.
어쩌면, 생각해 보면, 내가 찐따처럼 히어로 만화나 보고 설정이나 짠 덕분에 이 세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세계에 왔기 때문에, 돌아가셨던 이모가 멀쩡하게 내게 잔소리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하니, 오늘 조금 혼난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잘못한 거기도 하고.
아직 몸의 치료가 덜 된 탓인지 눈이 자꾸 감겨왔다. 나머지는 내일 학교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몰려오는 피로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