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헬스폰(7)
“어… 그럼 난 도서실에 가봐야 해서… 혹시 또 책 빌리거나 그럴 일 있으면 도서실로 와.”
“어… 응….”
강림이 그렇게 말한 뒤 도망치듯 도서실로 가버리는 것을 보고, 소연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
왜 굳이 그런 말까지 해선….
모처럼 강림이가 좋아하는 것을 물어봐 주는 덕에 너무 신나서 마음을 놓아버렸다.
공포소설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무난한 추리소설이나 로맨스 소설 같은 걸 이야기할 걸 그랬어.
이미 자기 마음에 있던 모든 걸 보여준 후에야,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강림의 겁먹은 표정을 본 후에야, 소연은 스스로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었는데… 앞으로 도서실에 어떻게 가지?
거기에 마지막에 웃긴 왜 웃어가지고.
아, 정말~~~!
소연에게 점심시간은 고역의 시간이었다.
혼자서 밥을 먹는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볼까 봐, 또 자신이 앉은 테이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매일 같이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의 맞은편만 비어 있는 급식실 의자에 앉아, 소연은 항상 쫓기듯 밥을 먹고 교실로 올라와야 했다.
항상 비어 있는 맞은편 앞자리가 말을 거는 듯해.
넌 왜 항상 혼자야?
급하게 먹은 탓에 안 좋은 속을 만지며 복도를 걷다가 문뜩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왜 단 한 명도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걸까?
그래서 소연은 도서실이 좋았다. 거긴 떠드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책만 읽고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도서실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도서실은 항상 사서 선생님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도서실에 있으면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소연은 매일 같이 점심시간에 도서실에 갔다. 하지만, 이제 도서실에서도 자기 자신을 이상하게 볼 사람이 생겨 버렸다.
한소연, 죽어버려.
너 같은 건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어.
소연은 복도 저 너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강수아를 발견하고 절로 눈길이 갔다.
자신과 똑같이 혼자서 다니지만, 그런데도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매력 있는 동급생.
나는 혼자인 게 외롭지 않은 척, 익숙한 척, 주변 시선에 숨어만 다니는데.
저런 애는 나처럼 꾸며낼 필요가 없는 거겠지.
오늘 아침에 창문 너머로 강림이와 함께 등교하는 것도 봤다. 저런 애는 나처럼 강림이한테 한마디 거는 데도 벌벌 떨진 않겠지.
아.
부러워.
혹시 눈이 마주치면 스스로가 더 초라해 보일까 봐, 한소연은 강수아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항상 그렇듯 바닥을 보며 걸었다.
* * *
아. 드디어 발견했다.
지옥의 군주 벨제뷔트는 이 현세에 강림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벨제뷔트가 보기에 지구는 이미 썩어버린, 다 지워버려야 할 쓰레기들이 모여 있는 지저분한 세계였다.
어차피 매해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이 오천만 명 이상인 세계라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벨제뷔트가 보기에 현세는 이미 지옥과 비교해도 어느 쪽이 지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이 세계도 진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낫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육체 일부를 현세로 보냈고, 자신의 일부를 발견한 인간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놈을 골라 지옥에서 지구로 강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드디어 자기 자신의 욕심에 맞는 인간을 찾을 수 있었다.
저 소녀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은 벨제뷔트의 육체가 될 것이고, 저 소녀가 가진 저 신비로운 힘은 벨제뷔트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벨제뷔트를 이 상자에 집어넣은 늙은이는, 이 상자만으로 자신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저 소녀가 지금 내뿜은 부정적인 감정만으로 벨제뷔트는 자신의 본체를 미약하게나마 소환해 낼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저 소녀의 주변에 붙어 저 소녀가 만들어내는 감정을 먹어 더 강한 육체를 만들어내는 것.
저 소녀가 만들어내고 있는 악한 감정을 조금만 더 먹어도, 벨제뷔트는 이 세계에 지옥과 통하는 문을 만들어내, 자신의 수하들을 이곳에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아, 가엾은 소녀여. 너로 인해 내가 곧 이 세상에 강림할 수 있겠구나.
벨제뷔트는, 자신이 기생할 소녀의 몸을 향해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잡았다, 요놈.”
어?
* * *
아무도 없는 학교 옥상 위.
이 학교는 왜 옥상 문을 열어둔 거고,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넓은 옥상에 왜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걸까? 이것도 만화의 클리셰 같은 건가?
그렇다면 역시 이 옥상은 주인공인 나, 나강림을 위한 곳인 걸까?
나는 옥상 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손에 든 것을 내 눈 위로 들어 올렸다.
“놔라! 인간! 나는 지옥의 군주! 너 같은 놈이 손댈 수 있는 몸이 아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네.
나는 내 손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누가 봐도 지옥에서 온 생명체로 보이는 작은 개구리를 들어 올렸다.
“안녕. 지옥의 군주 벨제뷔트.”
지옥과 이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강림하려고 하는 지옥의 군주 벨제뷔트.
다행이다.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원래 원작 만화에서는 사대희에게서 헬-스폰을 뺏어오는 데 성공한 빌런, 스카 페이스의 감정을 집어삼키며 성장하다, 결국 지구에 헬 게이트를 열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바로 나, 나강림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학교에서 빌런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에게 붙지 않는지만 감시하면 됐으니까.
악마라는 족속들이 어차피 다 그렇다. 멘탈이 약한 놈들에게 붙어 감정을 쪽쪽 빨아먹으며 힘을 키운 주제에, 강한 척하는 거.
이 학교에서 가장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 인물이라면, 역시 아무래도 소연이밖에 없지.
나는 다시 한번 주변에 나를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슈트를 입었다.
온몸을 휘감는 검은 어둠. 그리고 나타난 다크 카이저.
“바로 여기… 나 강림.”
촤르륵!
바람이 불어와 내 오른손에 감겨 있는 사슬을 흔들었다.
변신한 내 모습을 본 벨제뷔트의 개구리 눈이 커졌다.
“그… 그, 그건 대체 뭐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이 맞는 거냐? 대체 어떻게 그런 봉마의 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거냐!”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다크 카이저의 오른손은 봉인되어 있다. 다크 카이저의 오른손에 감겨 있는 사슬이 그 봉인의 결정체다.
다크 카이저의 오른손에 감겨 있는 사슬은, 다크 카이저의 강력한 어둠의 에너지와 마를 봉인하는 봉마의 사슬. 내 설정에 의하면, 봉마의 사슬 안에는 아직도 벨제뷔트를 봉인할 만한 충분한 봉마의 힘이 남아 있을 거다.
나는 왼손으로 잡고 있던 벨제뷔트를 오른손에 감긴 봉마의 사슬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안 돼!!! 인간!! 놔라!! 제발!!”
봉마의 사슬이 놈의 몸에 가까워지자, 불꽃이 튀는 소리가 나며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놈은 그 소리를 듣더니 갑자기 온몸을 비틀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인간! 너에게 내 모든 힘을 주겠다! 나를 살려준다면 네가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도와주마! 아니, 이 세상과 지옥 모두를 다 네게 주마!”
나는 내 왼손에 잡혀 발버둥 치는 벨제뷔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첫째로, 지금 네 모습을 봐. 네가 나한테 힘을 줘봐야 얼마나 힘을 줄 수 있겠어? 내 한 손에 잡혀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그건…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조금만 주면, 네 주변 인간들의 감정만 먹을 수 있다면 힘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럼 내가 네게 힘을 줄 수 있어! 정말이야!”
“흠… 그래? 그럼 둘째, 넌 악마잖아. 악마 말을 믿는 멍청이가 어딨냐?”
“악마의 계약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겠지? 이 세상의 어떤 악마도 악마의 계약 효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건 지옥의 군주인 나 벨제뷔트도 마찬가지다. 네가 나와 계약을 맺게 된다면, 나는 이미 맺은 계약의 조항들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정말이야!”
나는 내 손아귀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벨제뷔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널 봉인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하나 남아 있단다.
“그럼 진짜 중요한 마지막 이유를 알려줄게.”
“뭐… 뭐지? 그 이유라는 게?”
“넌 어둠의 황제, 다크 카이저랑 컨셉이 너무 겹쳐.”
“끄아아아아악!”
벨제뷔트의 몸은 점점 사슬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사슬 안쪽으로 빨려 들어간 벨제뷔트는 결국 내 오른손에 감겨 있는 어둠의 힘에 잠식되어 가기 시작했다.
“잘 가. 벨제뷔트.”
“안 돼!!!”
찰그락….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오른손을 휘어 감는 사슬.
[에피소드 - 지옥의 알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에피소드 완료 보상으로 200exp 획득]
[에피소드 완료 보상으로 동화율 5% 획득]
아, 나강림. 오늘도 이 세상의 평화에 한 발짝 다가섰구나. 장하다, 나강림.
* * *
이 정도면 오늘 해야 할 일은 끝.
아니지. 그보다 훨씬 잘했지. 원래 주인공 최강훈은 지옥의 게이트가 열리는 걸 막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막아내는 데 성공했잖아?
스타라이트 따위… 다크 카이저에겐 별것 아닐지도?
내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지도?
[“마스터. 알겠으니까 그 징그러운 표정 좀 그만둬요.”]
으히히힛.
잠깐 나 스스로에 취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교실 안엔 나 혼자뿐이었다.
아, 맞아. 오늘 마지막 시간이 체육이지?
마지막 시간이 체육이라니. 누가 시간표를 이렇게 짜놓은 거야?
나는 서둘러 체육복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섰다.
* * *
“오늘은 체육 첫 수업이니까, 다들 서로 친해질 겸 짝 피구를 한번 해보는 걸로 하자.”
“네에!”
피구? 피구 따위… 내가 지배해 주지.
지금의 나는 히어로 만화의 주인공, 이 세계를 구한 남자, 나강림이니까.
운동장 한가운데를 향해 뛰기 시작하는데, 저 너머에서 여자애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래?
“수아야… 너 가방은 왜 메고 나온 거야?”
선생님의 당황스러운 목소리.
설마?
나는 운동장으로 뛰어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소란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소란이 일어난 곳엔 강수아가 책가방을 메고, 그 위에 동절기 체육복까지 입은 채로 운동장에 서 있었다.
아… 쟤는 내가 벨제뷔트를 봉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그러고 보니 서로 연락할 방법은 황서연을 통해 전하는 것 외엔 없었다. 저 가방 안에 있는 헬-스폰은 벨제뷔트가 봉인되며 똑같이 힘을 잃었을 거고, 이젠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돌이 되어버렸을 거다.
“수아야. 너 대체 그 가방은 왜 메고 나온 거야?”
“선생님. 죄송하지만, 이 가방 안에는 저희 부모님의 유품이 들어 있어서요… 도저히 가방을 떼어놓고 올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강수아는 체육 선생님의 질문에도 뻔뻔하게 대응했다. 내가 저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면 나도 깜빡 속을 뻔했는걸?
선생님을 보니, 선생님도 꽤 당황한 모양이다.
다른 애들이 그랬으면 반항하냐고 그랬을 테지만… 강수아는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정중하고, 또 진지했다.
“아니, 그런 걸 왜 학교에 가지고 온 거야? 그런 건 집에 두고 왔어야지.”
“죄송해요, 선생님… 그것도 사정이 있어서….”
아… 수아야… 이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나는 강수아에게 이미 일을 해결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은 죄로, 죄책감과 공감성, 수치심을 느끼며 가방을 멘 강수아와 피구 시합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