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헬스폰(8)
밤거리. 범죄. 그리고 나, 다크 카이저.
지옥의 군주 벨제뷔트를 처리한 지 약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천산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슈트를 입었다.
제인, 브리핑.
[신체계 능력자 하나, 자연계 능력자 하나, 이능계 능력자 하나요.]
Beep-
제인이 내게 브리핑해 줌과 동시에, 가벼운 신호음과 함께 내가 내려다보고 있던 3명의 망령당 당원들의 머리 위에 능력의 종류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망령당.
이 도시에 각종 마약을 유통하고 있는 일종의 조직 폭력배, 혹은 갱단쯤 되는 놈들이다.
hahaha!
망령당 패거리 중 한 명의 웃음소리가 텅 빈 밤하늘을 울렸다. 저들은 내가 온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저들끼리 웃고 떠들기 바쁘다. 경찰들의 순찰 범위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인적 없는 후미진 곳이라 그런지, 전혀 주변을 경계하지 않는다.
적들의 경계가 흩어진 지금이야말로, 나 같은 히어로가 등장하기 딱 좋은 적기라 할 수 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목표물을 체크했다.
그들이 몇 개피씩이나 주구장창 피우고 있는 담배는 도유진과 그 일행이 파는 담배가 확실하다. 전국 유통도 아니고 딱, 천산시에서만 돌고 있는 저급 마약.
대부분 시중에 파는 담배의 속을 비워 채우거나, 잎을 사 직접 말아 피우는 방식으로 흡입하는데, 브루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것이 어느새, 천산시 골목길에서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수준으로 퍼져 버리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도유진이 팔고 다니는 약을 없애려면 일단 먼저 공급원을 찾아 조지는 수밖에.
“제인. 운명의 장막 사용해 줘. 범위는 매번 하던 대로.”
[분석 중…
범위, 2블럭 범위의 건물과 거리의 가로등. 시간은 약 1분.]
“타이밍은, 내가 랜딩한 바로 직 후로.”
[50%…
99%….
하늘을 가리는 운명의 장막(the DESTINY)이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같이 허공에 몸을 맡겼다.
내 몸에 부딪힌 공기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대지에 랜딩할 준비를 했다.
BOOM!
오늘은 조금 소리가 크네. 임팩트 있는 등장에는 큰소리만 한 게 없긴 하지.
“뭐야?”
“누구야?”
자. 히어로 등장.
놀란 망령당 당원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나의 전용 등장 대사를 읊었다.
“지금 여기, 나 강림.”
Pi-yoong!
그와 동시에 기계 장치가 꺼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사위의 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앞이 안 보여!”
“젠장, 정신 차려!”
좋아. 내가 생각한 연출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
갑작스럽게 불이 꺼진 탓에 주변이 보이지 않는 놈들이 당황할 때, 빠르게 처리해야만 한다.
나는 내 눈에 야간 시야 모드를 적용하고, 곧바로 능력의 종류를 알아차리기가 힘든 이능계 능력자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예전에도 말했던 적이 있지만, 이 세계에는 4가지 계열의 능력이 있다.
그 중 이능계열 능력자들은 내가 아닌 다른 것들에게 ‘특수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들을 의미한다.
작게는 염동력 같은 사물 조작 능력부터, 넓게는 시간이나 공간을 뒤틀어버리는 능력까지 생각할 수 있는, 초능력의 범위로써는 가장 많은 능력이 있는 계열이다.
뮤턴트 인자의 특성상 계열까진 파악할 수 있어도, 정확한 능력과 작용 범위까진 파악하기 힘들다. 혹시 능력의 종류를 알아도 이능계열의 특성상 숨겨진 다른 능력이 존재할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에, 가장 우선시해서 제거해야 할 족속들이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이능계열의 갱에게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이능계열은 신체계열을 함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것에 대한 내구성이 약한 경우가 많다. 단 한 방만 먹이는 데 성공한다면 곧장 제압할 수 있다.
텅!
사람을 치는 게 아닌, 무언가 다른 사물을 치는 듯한 소리. 몸 안에 갑옷 같은 걸 껴입은 모양이지만….
CRASH!
파워 모드를 적용 중인 다크 카이저의 힘을 버티기엔 육체 능력이 딸려도 너무 딸렸다.
내 몸에 부딪힌 놈은 곧바로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떨어져 기절해 버렸다.
한 놈.
바로 그다음은 자연계열 능력자를 처리하는 게 베스트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놔두진 않을 모양이다.
팔꿈치에서 삐져나온 가시로 나를 정확하게 찔러 드는 신체 능력자의 공격.
나는 가시를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렀다.
저건 좀 징그러운데.
“너, 이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까부냐? 후환이 두렵지도 않냐?”
아직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놈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나 했더니, 놈의 가느다란 동공에 번뜩 빛이 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팔꿈치에 가시를 만드는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 이 녀석도 야간 시야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신체계열 능력자들은 그 이름대로 사용자의 육체를 이용하는 능력을 사용하는데, 꼭 자신의 육체를 강화하는 육체 능력 강화 계열 말고도,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는 변형계열의 능력자들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신체계열 능력자의 능력은 대부분 자기 스스로에게 국한되며,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놈이 다른 동료들에게 야간 시야를 만들어줄 일은 없을 거다.
Shoop!
내가 뭐라고 대답하길 기다리진 않을 모양이다. 놈은 곧바로 내게 팔꿈치를 휘둘러 왔다.
쯧. 애초에 능력 자체가 잘못됐다. 이러니까 깡패 새끼들 중에서도 말단이나 하고 있지.
하필이면 팔꿈치에 가시가 나오는 능력이다 보니, 자신의 가시를 상대에게 휘두르려면 몸이 앞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 쪽으로 기울어진 놈의 몸은 빈틈투성이였이다.
이번엔 내 얼굴로 휘둘러지는 팔꿈치의 가시를 피하며, 나는 놈의 배에 무릎을 박아 넣었다.
“꾸에엑!”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인 놈의 얼굴을 나는 가차 없이 걷어 차버렸다.
두 놈!
그와 동시에 다시 번뜩 켜지는 주변의 불.
벌써 하늘을 가리는 운명의 장막(THE DESTINY)의 지속 시간이 끝난 모양이다.
단 1분여 만에 자신의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쓰러져 버린 모습에 놀란 자연계 능력자는, 제 손에 둘려져 있던 전기 에너지를 나를 향해서 뿌려대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나는 놈이 뿌려대는 전류를 슈트로 받아내며 놈에 가까이 따라붙었다. 어차피 갱단 말단 놈의 전류가 그렇게 강하지 않을 거란 계산이었다.
아직 견딜 만해.
나는 가까워진 놈의 몸에 파고들어, 놈의 몸에 사정없이 마무리 뒤돌려차기를 먹였다.
CRASH!
셋. 게임 끝.
* * *
어? 깬다.
“어이. 정신이 좀 드는가?”
가장 먼저 쓰러트린 놈이라 그런지, 역시 제일 빨리 일어나네.
당하는 것도 딱 한 방 맞아서 쓰러진 녀석이라 그런가? 몸이 가장 멀쩡할 수밖에 없긴 하다.
“뭐야… 넌 누구야?”
깨어난 놈은 아직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나는 놈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일단 한 방 먹여주기로 했다.
POW!
내게 얼굴을 한 방 얻어맞은 녀석은 이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질문은 내가 하고, 너는 대답만 한다.”
“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지금 이러는 거야? 그까짓 자경단 옷 입고 활동한다고 지금 우리를 건든 거냐? 너 어디 소속 히어로야?”
이 새끼, 아직 정신이 덜 들었네.
나는 놈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다시 말하지만, 질문은 내가 하고 너는 대답만 한다.”
“너 이 새끼, 잘못 건드렸어. 우리 망령당은 너 같은 놈이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이 새끼 진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나는 주먹을 들어 올려 놈의 얼굴을 한 번 더 후려쳤다.
“못 해! 안 해! 너한테 말하느니 차라리 네 손에 죽는 게 더 나아!”
그 뒤로도 네다섯 번의 주먹질이 오갔지만, 놈의 의지는 꽤 강경했다. 눈앞에 있는 나보다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느낌이다.
어쩔 수 없지.
“그대는 지옥을 본 적 있나?”
망령당 당원은 퉁퉁 부은 피투성이 얼굴로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오른손엔 지옥의 군주가 잠들어 있지. 지옥의 군주는 보통 이런 일에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너에겐 특별하게 보여주지.”
나는 오른팔에 칭칭 감겨 있는 사슬을 한 겹 풀어낸 뒤, 오른손을 놈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넌 오늘 지옥이 어떤 건지 보게 될 거다.”
* * *
아무것도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왜 폼을 잡고 그러실까. 괜히 시간 낭비만 했잖아.
놈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망령당에 대해서 내게 필요한 중요한 정보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았다. 내 고문에도 버텼던 건, 갱단이랍시고 가지고 있는 일종의 깡이었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내 오른손에 잠들어 있는, 벨제뷔트가 만들어내는 공포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사실, 놈을 고문할 필요도 없이 망령당의 보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미닝리스.
원작에서도 나오는 슈퍼 빌런 중 하나로, 마약을 이용해 천산시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정신계 초능력자다.
자신의 능력이 마약과 결합하면 일어날 시너지에 대해서 깨달은 미닝리스는 원작 만화에서도 꽤 골칫거리로 그려지는 빌런 중 하나다. 사실은 지옥과 현세를 연결하는 문이 열린 뒤, 자신이 쌓은 업보 덕분에 지옥의 업화에 불타 죽어야 하는 빌런 중 하나이지만….
내가 지옥의 문을 닫아버린 탓에, 놈이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시나리오는 사라지게 되어버린 거다.
“대체 미닝리스. 넌 어디에 숨어 있는 거냐?”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만화 속에서 지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미닝리스가 숨어 있는 망령단 본거지를 실제로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삐뽀-삐뽀-
나는 뒤늦게 온 경찰차가 내가 쓰러트린 놈들을 데려가는 것을 보며 몸을 돌렸다. 아직 경한 은행에서 내게 건 현상수배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 입장에선 나도 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
난 그렇다고 경찰들과 싸울 생각은 없었으니까. 내가 저놈들을 잡아내고서 내 공을 주장하기도 힘들다. 아마 뉴스에 보도된다면 빌런끼리의 다툼 정도로 실리게 되겠지.
빌런 취급받는 히어로라….
다크 카이저에 걸맞는 대우구만.
이거야말로 다크 히어로지.
“하아….”
입에서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스타라이트는 단 한 번도 빌런 취급을 받은 적 없었는데….
아마 내가 다크 히어로라는 설정을 짰기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아닐까?
이젠 꽤 익숙해져 버리긴 했지만, 이 세계에 온 뒤로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도 오늘 한 것도 많고 힘드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집에 가야겠다. 이 정도면 동화율도 꽤 지켜낼 수 있을 거다.
나는 다시 콘크리트 정글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슈우우웅-!
이 소리는…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인데?
나는 익숙한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튕겨 피했다.
습격?
나는 긴장한 상태로, 일어나는 먼지 너머의 인영을 바라보기 위해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어디서 많이 본 진행인데 이거?
“다크 카이저. 찾았다.”
아, 또 너야?
“헤이. 거기 너! 다크 카이저! 네가 저지르는 악행을 막으러 바로 나, 파워 피스트가 등장했다.”
먼지 너머의 인영은, 경한 그룹의 스폰 히어로, 파워 피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