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어둠의 황제 오른손엔 지옥의 군주가 살고 있다
커다란 주먹에 온 체중을 싣고 바닥에 내리꽂은 듯한 랜딩 자세.
“헤이. 거기 너! 다크 카이저! 네가 저지르는 악행을 막으러 바로 나, 파워 피스트가 등장했다.”
파워 피스트… 또 너냐?
거대한 양손을 뻗어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는 등장 포즈를 통해 자신의 스폰서를 광고한 파워 피스트는 다시 몸을 돌려, 그 거대한 양팔을 나를 향해 들어 올렸다.
얘랑은 싸우고 싶지 않은데….
경한 그룹에 이용당하고 있긴 하지만, 본성이 나쁜 친구는 아니다.
거기에 빌런들은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라 상관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히어로들하고 싸우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지난번 패배,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다… 납득이 안 가.”
그렇긴 하겠지. 나도 내가 놈을 이겼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거의 질 뻔한 걸 편법으로 어떻게든 벗어난 거지.
“미안하지만, 나랑 이야기를 좀 ….”
“난 말이야. 처음에 네가 힘 타입일 거라고 생각했어. 근육의 발달을 보면 알 수 있거든. 그런 근육을 가진 능력자는 대부분 힘 타입이야.”
“나는 너랑 싸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힘 타입하고 싸워서 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달라졌어. 근육의 모양이 바뀌고, 힘이 줄어들고, 갑자기 속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어. 아마 신체를 변형하는 능력도 있는 모양이지?”
“내 말이 들리긴 하는가?”
“거기까진 좋아. 분명 조이기까지 몰고 가서 너를 쓰러트릴 수 있었는데, 갑자기 네 몸에서 열이 뿜어져 나와 놓치고 말았다. 생각건대, 이건 사전 정보의 차이다. 너는 나를 알고 있었고, 나는 너를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내 공격에 쉽게 대응할 수 있던 거다.”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
“거기까지. 더 말해 뭐해? 실력으로 이야기하자. 이번엔 널 깔끔하게 발라주지.”
“자넨 웅변해도 되겠어. 다른 사람 말은 안 듣고 자기 말만 하는 게 ”
역시나 내 말도 다 듣지 않고 다짜고짜 먼저 휘둘러지는 공격.
이번엔 좀 위험한데.
방금 스스로 줄줄 말해준 것처럼, 이제 와서 놈한테 똑같은 걸 또 시도해 봐야 먹히지 않을 거다.
쾅-!
놈의 주먹이 부딪힌 벽에 또다시 스탬프로 찍어버린 것처럼 놈의 주먹 모양이 깊게 남았다.
저런 거에 한 대라도 처맞으면, 오늘도 다프네에 가서 황서연에게 치료를 받아야 할 테지.
지난번에 상대해 봤듯, 거기에 파워 피스트가 스스로 공언했듯 힘 대 힘으로 들어가면 나는 절대 놈을 이길 수 없다.
나는 지난번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놈의 주먹 안쪽으로 파고들며 슈트 모드를 바꿨다.
SUIT MOD
The Dark Kiaser
철컥… 철커덕….
제인의 대답과 동시에 변형해 가는 내 슈트.
쉭!
또다시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파공음!
이번엔 놈도 알고 있었다는 듯 반대편 손을 주먹을 쥐어 내게 뻗어내는 대신, 손바닥을 펼쳐 날벌레를 후려치는 것처럼 내게 손바닥을 휘둘러 왔다.
이대로 파고들어 공격하면 분명 놈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겠지만, 나는 저 손바닥에 맞아 튕겨 나가게 될 거다.
스피드 스타 모드는 다크 카이저의 파워 모드에 비해 내구성이 약하다. 놈의 공격에 한 방이라도 잘못 맞게 되면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놈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는 대신, 빠른 스피드로 놈의 손바닥을 피하는 것을 택했다.
내 얼굴 바로 앞을 지나가는 놈의 손바닥.
아슬아슬했다.
아마 조금만 더 망설였다면 저 손바닥에 맞아 허공을 날았겠지.
“역시. 육체 변형 능력이었군. 이번엔 봤다. 그리고 그 육체 변형 능력, 육체 변형이 마음먹은 대로 곧바로 되는 건 아닌 모양인 것 같고. 아무래도 변형하는 동안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지.”
파워 피스트가 씨익 웃어 보이며, 자신의 펼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양 손바닥. 아마 저게 최대치인 듯, 놈의 표정도 꽤나 피곤해 보인다.
“딱 한 방. 한 방으로 승부해 주지.”
파리채냐?
빠르게 움직이는 나를 잡기 위해, 마치 파리채처럼 손바닥을 펼쳐 나를 후려쳐 잡으려는 모양이다.
가까스로 놈이 휘두른 손을 피해내자, 이번엔 벽이 아닌 바닥에 놈의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그전에 주먹은 마치 철퇴처럼 빠르게, 그리고 위력적으로 박아 넣기 위해 만들어진 크기라고 하면, 이번 거대 손바닥은 그냥 최대한 넓은 범위를 한 번에 후려쳐 나를 잡아버릴 모양이다.
아니 근데, 어떻게 자기 몸에 두 배는 돼 보이는 커다란 손바닥을 이렇게 빠르게 휘두를 수 있는 거야?
평상시엔 이 세계가 만화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지만, 가끔 이런 비현실적인 일이 생기면 이 세계가 만화 속 세계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한다.
제인, 전투 스타일 분석 완료했어?
[“상대 전투 스타일 분석 중…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하네.
제인, 그럼 운명의 장막은 한 번 더 쓰려면 얼마나 남았어?
[“현재 다크 카이저의 수준으로는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힘들어요. 오늘 건 아까 쓰셨으니까, 또 사용하실 순 없어요.”]
아까 운명의 장막을 사용하지 말고 좀 남겨둘 걸 그랬다. 그러면 지금도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이러면 또 놈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잖아.
두 번이나 부르긴 싫었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의 체인을 풀었다.
【“오. 뭐야. 이게 누구신가? 어둠의 황제 다크 카이저 님 아니신가? 어둠의 황제 다크 카이저 님의 오른손에 갇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봉인된 지옥의 군주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날 찾으셨을까?”】
“아이고. 우리 지옥의 군주님. 혹시 제가 공양해 드린 식사는 만족스러우셨을까요?”
【“식사? 뭐? 아까 다크 카이저 님께서 필요해서 잠깐 집어 넣어준 잔챙이의 ‘공포’ 말인가? 그게 과연 ‘식사’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인가? 그냥 ‘사료’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이럴 줄 알았다.
또다시 손바닥이 내가 있던 곳으로 휘둘러졌고,
콰콰광-!
손가락 사이를 통해 가까스로 놈의 공격을 피해내는 데 성공했다.
“바쁘니까 잔말 말고, 이번 한 번 사용하는데 3:7 어때?”
【“글쎄… 누가 나를 이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 집어 넣어놓고 부탁하러 와놓고선, 아무것도 줄 생각이 없나 보네. 그럼 난 한잠 더 때려 볼까? 한 백 년쯤 자고 일어나면 되겠지?”】
“5:5”
【“다크 카이저 님께서 별로 급하지 않으신가 보네.”】
“알았어. 알았어. 네가 7해. 내가 3할게.”
【“진작 그럴 것이지.”】
내 오른손에 봉인된 벨제뷔트가 씨익 웃는 게 느껴졌다.
【“준비됐다. 어둠의 황제.”】
“파워 피스트.”
“응?”
“내가 봉인해 두었던 오른손까지 사용하게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나는 체인을 완전히 풀어내고 파워 피스트를 향해 오른손을 펼쳤다.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옥의 흑염이 파워 피스트를 덮쳤다.
* * *
[히어로 활동 성공. 동화율이 올라갑니다.]
[오늘 획득한 동화율 : 0.30%]
[악마와의 계약으로 벨제뷔트에게 0.21%의 동화율을 지불합니다.]
[오늘 획득한 동화율 : 0.09%]
[현재 동화율 : 29.19%]
[오늘 획득한 경험치 : 22exp]
[현재 경험치 : 302exp]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네.
이번에도 내 힘이 아니라, 조금 편법을 써서 이긴 느낌이라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당해줄 순 없으니까.
내가 내 오른손에 벨제뷔트를 봉인할 때까지만 해도, 난 벨제뷔트를 평생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이 체인도 그렇고, 이 봉인도 그렇고, 거기에 네 힘도… 이 세계의 것이라기엔 너무 이질적이야. 너 이 세계의 인물이 아니군?”】
벨제뷔트가 내 오른손에 갇히고 며칠 후 내게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말이지.
그 이후로도 시시때때로 놈은 내가 하는 것들을 지켜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며칠간 내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벨제뷔트가 내게 제안해 왔다.
자신의 힘을 빌려주겠노라고.
자신의 힘을 빌려준 대신, 네가 매일 같이 얻는 동화율의 일부를 자신에게 나눠달라고.
벨제뷔트의 의도가 의심이 갔기 때문에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편법 없이 원작에서도 강력한 취급을 받던 히어로나 빌런을 잡기엔, 내 힘이 턱없이 모자란 모양이다.
삐빅- 삐빅- 삐빅-
때마침 저녁 10시에 맞춰놓은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오늘 다크 카이저로서의 활동은 여기까지.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또다시 밤하늘을 갈랐다.
* * *
“이모! 다녀왔습니다.”
“아이고. 우리 강림이 왔어? 오늘도 고생 많았어. 오늘도 이 시간까지 공부하느라 힘들지?”
“에이 뭐. 학생이 공부하는 건 당연한 건데, 뭘요.”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항상 저녁부터 밤엔 히어로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홀로그램이 나를 대신해서 잠만 자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거기에 그게 가능하다고 쳐도, 지난번에 슈트가 과부화했을 때도 그러했듯 내가 크게 다쳤을 땐 홀로그램이 꺼져 버릴 위험도 있다.
그래서 그냥 예전에 준석이에게 했던 영어학원에 간다는 거짓말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반선생 고등 종합 학원
저녁 7시 ~ 밤 10시까지.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 통학은 학원버스로 책임집니다.」
예전에 말했듯, 치안이 좋지 않은 이 세상에선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진짜 학원을 등록하고 출석을 하지 않으면 이모에게 전화가 갈 테고, 그럼 내가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는 게 들통이 나겠지.
그래서 그냥 제인을 시켜서 유령학원을 하나 만들어 버렸다. 말끔하게 인터넷 홈페이지 하나 만든 정도야, 제인에겐 누워서 떡 먹기 수준이니까.
물론 이모는 내가 학원에 다닌다는 말에 혹시 모를 안전에 대해 크게 우려하셨지만,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는 내 말에 속아 넘어가 버렸다.
죄송해요, 이모. 그런데 이것도 이모와 함께 살기 위한 일이에요.
“어휴. 이모, 나 일단 먼저 씻고 올게. 거의 하루 종일 밖에만 있었더니 따뜻한 물에서 샤워가 하고 싶네.”
“어? 너 올 시간 돼서 치킨 시켜놨는데?”
아. 치킨은 못 참지.
나는 치킨을 시켰다는 이모의 말에 식탁에 앉으려다, 내 몸에서 나는 땀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학원 다녀오는 놈이 땀에 절어 있으면 이모가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
“아, 이모 근데 나 너무 피곤해서 일단 따뜻한 물에 좀 씻고 싶네. 먼저 얼른 씻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 * *
어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하루 종일 슈트 안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온몸이 땀범벅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거울 앞에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꽤 잔근육이 붙어가는 내 몸을 감상했다.
매일 욕실에 들어와 씻을 때마다 놀랄 정도로 나 자신이 바뀌어 가는 게 느껴질 정도니까, 아마 슈트 입고 활동하면서 내 근육이 꽤 혹사가 되긴 하는 모양이다.
아직까진 아무도 내가 이 세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건 아닌가 보다.
“강림아! 치킨 다 식어!”
“네, 지금 나가요!”
그래. 이모랑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생에 대한 대가는 충분하다.
이 일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