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휴일
[am 9:01]
어둠의 황제, 다크 카이저.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더 다크 카이저는 밤에만 활동하는 히어로다.
다크 카이저라는 이름과 활동 시간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럼 스타라이트는 낮에만 활동했냐고?
아니 뭐… 그냥 내가 그렇게 정했다.
직장인들도 주 52시간제로 일하는데, 히어로인 나는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사실 눈앞에 닥치는 일들을 쫓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서, 벌써 오늘이 이 세계에 와서 맞이하는 세 번째 토요일이다.
해가 지기 전까지, 주말의 아침과 낮만큼은 내게 있어 유일한 휴식 시간이나 마찬가지인 거다.
나도 좀 쉬어야지.
평일 내내 신경이 곤두서 피로한 몸을 주물럭거리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반쯤 일으킨 몸을 다시 침대로 내던졌다.
스타라이트도 쉴 땐 쉬었을 거 아냐. 안 쉬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제인. 나 밤이 되기 전까진 좀 쉬고 싶으니까, 긴급 사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사건 알람 꺼줬으면 좋겠어.”
[“예. 마스터.”]
내 눈앞에서 괜히 불안하게 켜져 있던 사건 알람이 사라졌다. 매일 무슨 일만 생기면 번쩍번쩍 빛을 내며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홀로그램이었는데, 눈앞에서 지워지니 조금 맘이 편하다.
지난 2주 동안의 주말에는 피곤해서 짬만 생기면 죽은 듯이 잠만 잤는데, 지금은 꽤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내 육체가 조금 발전한 탓인지, 드디어 내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할 시간이 생겼다.
어디 보자… 이 세계의 티비 프로그램이라도 한번 봐볼까?
이 세상의 예능은 얼마나 재밌는지 한번 보자.
잠시 티비 여기저기를 돌려보던 나는, 금세 흥미를 잃고 티비를 껐다.
생각해 보면 토요일 아침 9시부터 티비에서 재밌는 프로그램이 하길 바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나는 힐끔 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am 9:23]
그래, 티비가 아니더라도 주말은 아직 길다.
좋아. 게임이라도 해볼까?
나는 침대에서 책상 쪽으로 슬슬 기어가 발로 컴퓨터의 전원을 눌렀다.
* * *
<적팀이 찬성 4표, 반대 0표로 항복에 동의하였습니다.>
[ㅈㅈ 요]
[ez]
됐다. 이겼다.
나는 승리 창이 뜨기 전에 재빨리 상대를 도발하는 채팅을 찍어 넣었다.
[xcd]
[xㅊㅇ]
[ㅌㅊㅇ]
<승리>
그와 동시에 들리는 우리 팀의 승리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간만에 하는 게임은 꽤 잘 풀렸다.
반사 신경도 좋아진 덕분인지 정글러가 오지 않아도 쉽게 솔 킬을 낼 수 있었으며, 게임 캐릭터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줬기 때문인지, 팀원이 아무리 큰 똥을 싸질러도 내 손으로 쉽게 치워 버릴 수 있었다.
아, 오픈 게임이라 빨리 끝났네.
주 캐릭터는 이전과 다름이 없는 데도 게임 내내 탑 캐리로 승리를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4연승.
[am 11:57]
“이상하네.”
[“뭐가요?”]
“재미가 없어.”
상대 라이너와 라인전을 하는 동안에 느끼는 그 묘한 흥분감, 고양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그 느낌. 승리를 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과 쾌감. 그런 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네. 분명 학교에 있을 때나 밤거리를 쏘다닐 땐, 게임이 너무 하고 싶고 집에서 푹 쉬고 싶고 그랬는데.
♪
내 스마트폰을 울리는 카톡 소리.
뭐야.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누가 카톡을 보내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박준석 : 야 일어났냐?]
[나: ㅇㅇ]
[박준석 : ㄹㅇ ㄱ]
[나: ?]
[박준석 : 레온 ㄱ]
레온?
지난번에 갔던 PC방 이름이었던 게 문뜩 기억이 났다.
[나: ㅇㅋ]
그래. 게임은 혼자서 하면 원래 재미없지.
친구들아. 내가 간다.
* * *
[pm 12:21]
은은하게 풍기는 음식 냄새.
타닥타닥 PC방 특유의 기계식 키보드 소리.
간간이 들리는 탄식 소리와 감탄사.
드문드문 들려오는, 누군가 틀어놓은 약간 철 지난 듯한 발라드 음악.
이거지. 이게 내가 그리워했던 그 PC방이지.
이런 분위기에서 게임을 해야 게임 할 맛이 나는 거지. 분명 지난번에 PC방에서 게임을 했을 땐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나강림. 여기.”
“오. 벌써 사람이 이렇게 모였다고?”
벌써 반 친구들이 박준석 포함 4명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할 게임은 총 5명이서 할 수 있는 팀 대전 게임이다.
4명, 빈자리는 마지막 하나.
역시. 주인공인 나강림은 마지막에 등장하는군.
박준석, 얘는 오타쿠 주제에 꽤 붙임성이 있다.
“얘들도 같이하재서 불렀다. 괜찮지?”
“그래. 기왕이면 사람이 많은 편이 더 좋지.”
“야, 나강림. 너 서폿 가.”
“남자는 탑 밖에 안 간다. 꼬우면 투탑.”
“미친놈.”
* * *
[pm 01:48]
모니터 화면을 꽉꽉 채워오는 2글자.
<승리>
그래.
역시….
혼자서 집에서 게임 할 때보단 낫네.
“그래도 이 느낌이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여전한 찝찝함.
뭔가 게임을 하는 게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게임인데… 왜 예전보다 재미가 없지?
저 멀리서 알바가 짜장라면을 들고 이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인다.
“야, 잠깐 기다려. 내가 시킨 라면 온다.”
“와. 야, 새끼 혼자 처먹네.”
“야, 내 돈 주고 내가 먹는데 뭔 상관이야.”
박준석, 이 새낀 다 좋은데 눈치가 없어. 지만 배고프냐? 시키면 시킨다고 말을 하지. 같이 먹으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게임만 하고 있기엔 배가 꽤 고파왔기 때문에, 대충 캐릭터를 고르고 나도 박준석이 시킨 짜장라면을 시켰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라?
라면을 들고 우리 쪽으로 오는 알바의 얼굴이 퍽 익숙하다.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도유진? 너 여기서 뭐 하냐?”
내게 라면을 들고 온 알바는 내 인생 최고 흑역사이자, 내 소꿉친구 도유진이었다.
* * *
“도유진. 너 여기서 뭐 하냐?”
“나강림?”
잠시 나를 보고 당황한 표정이던 도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라면을 내려놓고 돌아선다.
“주문하신 짜파게티 나왔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도유진. 너가 무슨 일로 이런 곳에서 알바를 다 하냐?”
“아, 니 알 바 아니잖아. 신경 꺼.”
내 원래 세계에서 도유진은 그 누구보다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 용돈에 부족함이 없이 사는 애였다. 이전에 양아치들이랑 놀면서 뜯고 다니는 것도 뭔가 이상했는데, 얘 왜 이러고 다니는 거야?
“저… 저기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나와 도유진이 동시에 박준석을 돌아보았다.
“왜? 뭔데?”
“저기… 단무지 안 주셨는데요.”
박준석, 저 눈치 없는 놈….
* * *
[pm 5:11]
같이 게임 하던 친구들은 시간이 늦어지기 전에 다 가버렸고, 나 혼자만 남아 몇 시간 정도 더 버텼다.
도유진이 요즘 하는 행동들이 불안하기도 했고, 갑자기 바뀌어 버린 도유진의 행동이 불안하기도 했으니까.
도유진도 언젠가 집에 갈 거고, 그때 같이 가면서 이야기나 좀 해봐야겠다 싶었다.
“저기 알바 님. 여기 볶음밥 좀 볶아주세요.”
“나 교대할 거야. 이제 퇴근할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 시켜.”
“아, 그래? 그럼 나도 이제 그만할래.”
도유진이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너 끝났다며. 같이 집에 가려고.”
* * *
[pm 5:41]
도유진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은 원래부터 친한 친구 사이셨다. 우리 동네, 부모님이 하시던 카페의 단골손님이셨으니까.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도유진이 나와 동갑이라는 걸 알고 가게로 자주 데리고 놀러 오셨고, 자연스럽게 나와 도유진은 같이 노는 시간이 많아졌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부모님과 함께 좋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던 날 울먹이던 것도,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알고 가장 크게 울어줬던 것도 모두 기억한다.
그만큼 도유진은 나랑 오랜 시간 같이 지냈던, 꽤 소중한 소꿉친구였다.
그때 그렇게 어리던 도유진과 내가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다는 게 어색해져서, 나는 괜히 도유진에게 심술궂게 말했다.
“야. 너 왜 이런 데서 알바 하냐? 알바 하는 거보다 애들 삥 뜯는 게 더 쉽지 않냐?”
도유진은 내 말을 듣고 나를 흘깃 흘겨보았다.
오우, 야… 얘는 태생이 일진이라 그런가? 눈빛이 꽤 매섭다.
“X발. 돈이 좀 필요해서 그랬다. 왜?”
“고등학생이 돈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한데?”
“아, 그걸 니가 알아서 뭐 하게. 신경 꺼.”
쟤 저거, 저거. 말버릇이다. 말버릇.
“애들 삥 같은 거 뜯는 거 그만두고, 나이 먹었으면 철 좀 들어라.”
“그래서 그만하고 알바 하고 있잖아. 이 새끼야.”
“뭐야. 이제 애들 삥 안 뜯으려고?”
“네가 그렇게 살지 말랬잖아. 그래서 알바 시작한 거야. 그렇게 돈 버는 게 창피해져서.”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도유진을 노려보았다.
“너. 대체 왜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니까?”
“신경 꺼, 새끼야. 저기 니네 집 다 왔다. 집에나 가.”
저벅저벅 걸어가는 도유진의 등 뒤로 노을 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오늘은 그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 * *
[pm 6:21]
저녁 6시 반. 해가 지기 시작한 이 시간부터 나는, 나강림이 아니라 다크 카이저가 되어야만 한다.
다크 카이저.
내가 어리고 순수할 때, 혼자 공책에 끄적여 만들었던 나만의 히어로. 그때의 나는 누군가를 구해주는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 공책 속 작은 히어로는 화재가 일어난 주택단지에서 사람을 구출하고, 침몰하려는 배를 끄집어 올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려는 전쟁을 막았다.
하지만 뭐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어린 시절은 영원하진 않잖아?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릴 적에 꿈꿔온 히어로라는 장래 희망은, 어느새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희망 사항으로 남아버렸다.
내가 사는 세상엔 히어로라는 직업은 없었고,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또 사회에 나가기 위해 점점 머릿속을 내 인생에 필요한 것들로 채워 나가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내 머릿속에서 내가 만든 히어로 다크 카이저에 대한 내용도 점점 잊혀갔다.
이모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낡고 엉기성기한 가면을 얼굴에 써본 건, 어릴 적 미련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충동적인 행동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로 그날,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 가면과 함께 이 세계로 떨어졌다. 나는 내가 그토록 열망했지만 잊고 있었던 다크 카이저가 되었고, 내가 한때 가장 동경했던 만화의 주인공 대신 이 세계를 살아가게 되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도시에 어둠이 오면, 나는 내가 아니라 다크 카이저로서 이곳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지켜나가야만 한다.
슈트 온.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검은색 물질들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다크 카이저의 슈트를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가면 쓴 눈 위로 떠오르는 슈트의 상태를 표시해 주는 홀로그램.
[ 슈트 가동 중
10%…
30%…
50%…
90%…
100%…
가동 완료.
슈트를 개방합니다.]
슈트를 입으면서 느껴지는 묘한 흥분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고양되는 이 느낌.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 물질이 풀려나고, 온전한 다크 카이저의 모습이 된 나는 오늘도 어두운 도시의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난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매일 밤 이런 걸 느끼고 있는 나는, 아마 더 이상 남들처럼 게임 같은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