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엑스트라(2)
엑스트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히어로든, 경찰이든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멋대로 잣대를 세워놓고선 굳이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별일 없이 지나갈 일이라고 자만했던 거다.
원작에서 레빗즈는 동생과 형, 2명으로 구성된 2인조 빌런이다. 원작의 주인공 최강훈, 스타라이트가 가장 먼저 해결하는 사건.
최강훈은 레빗즈의 강도 사건을 해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후 그들을 대신해 아산 성모병원의 부패한 병원장을 협박해 그들 어머니의 치료를 돕는다. 이후, 그들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흔한 후일담조차 등장하지 않는 완전한 퇴장.
게임으로 말하자면, 튜토리얼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내게 너무 쉽게 생긴 힘에 취해 이 모든 게 게임 같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그 오만이 이 세상에 이렇게 크게 피해를 주게 될 줄 몰랐다.
그 오만이 병원 테러라는 무서운 결과를 가지고 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침에 그 뉴스를 본 순간, 경고창과 함께 동화율이 5퍼센트 가까이 떨어졌다. 기껏 올라간 동화율이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내가 만들어낸 빌런이 저지를, 나도 모르는 사건들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강림, 내 말 안 들려?”
나는 나를 부르는 강수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지금 등교 중이었지.
“어, 수아구나. 안녕? 언제 왔어?”
기분 탓인지 수아의 목소리가 조금 냉랭하게 느껴졌다.
“우린 원래 여기서 매번 마주치는데.”
“아. 그렇네.”
등교는 매번 수아랑 같이했었지.
난 맥없이 웃으며 말하곤 머리를 매만졌다.
“너 어디 아프구나?”
“어? 어, 아니야. 오늘은 내가 좀 정신이 없어서….”
“혼자 사우나 온 줄 알겠어. 보는 내가 불쌍하니까 얌전히 받아.”
난 엉겁결에 강수아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닦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강수아가 내게 먼저 말을 걸고, 거기에 손수건까지 받았다는 사실에 덕심으로 감격할 만도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어… 이 손수건은 내가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게. 미안해.”
“아픈 게 뭐가 또 미안하니? 상태 보고 담임선생님한테 조퇴한다고 해.”
이런 상황에 혼자 집에 가서 쉬라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아니야. 정말 괜찮아.”
“고집은.”
내게 새침하게 말한 강수아가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나강림 새끼야아! 나 또 지각할 뻔했잖아. 너 대체 언제 아침에 나 깨워줄 거… 야, 너 괜찮냐?”
여느 때와 같이 나를 괴롭히려던 도유진이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어? 나 왜?”
“너 얼굴이 지금 장난 아닌데…? 너 혹시 어디 아프냐?”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도유진이 내 얼굴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너 혹시, 또 누가 너 괴롭히냐?”
“어? 아니. 아니. 아픈 것도 아니고, 누가 나 괴롭히는 것도 아니야. 괜찮아.”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내 얼굴이 어떻길래, 오늘 내 얼굴을 보는 애들마다 이러는 거야?
난 정말 괜찮은데.
“아니, 괜찮다니까….”
“내 눈 똑바로 봐봐. 대체 무슨 일인데?”
나는 나와 자꾸 눈을 마주치려 하는 도유진을 피해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했다.
“야. 수업 곧 시작하는데 어디 가?”
“니 알 바 아니잖아. 신경 꺼.”
당황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숨기기 위해 교실 바깥으로 나왔다. 저 멍청이 도유진까지 그럴 정도면 내 얼굴이 많이 엉망이긴 한 모양이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라도 한번 하고 와야….
갑자기 내 소매를 잡아끄는 듯한 손길.
한소연?
“저… 저기… 이거.”
한소연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곤, 자신의 반으로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쥐여준 봉투 안엔 감기약과 두통약, 그리고 손수건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니, 얘는 언제 이런 걸 사온 거야?
내게 봉투를 쥐여주고 쪼르르 자신의 반으로 사라지는 한소연을 잠시 바라보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 * *
끼릭 끼릭
나는 틀어져 있던 수도를 잠궜다.
한바탕 찬물을 얼굴에 끼얹은 뒤, 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라졌네. 못 알아보겠어.
매일 밤 슈트를 입고 밤거리를 헤매며 얻은 근육들과 골격 덕분에, 내가 알던 이전 세계의 나강림과 이 세계의 나강림은 꽤 많이 달라 보였다.
그래. 아직은 내가 해결할 수 있다. 지금의 나라면 해낼 수 있다. 오늘 저녁에 밤거리에 나가 해결하면 될 일이다. 얼마나 강해졌을지 몰라도, 벨제뷔트에게 동화율을 조금 나눠준다면 해치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저녁까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건 내 오산이었다.
* * *
웅성웅성.
내가 화장실을 나오고 있을 때, 학교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가방을 메고 우르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야, 강림아. 오늘 이 주변에서 빌런이 테러 예고했다고 다 집에 가래.”
가방을 싸매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박준석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야, 오늘은 빨리 끝났으니까 우리 집에서 신작 히어로 애니메이션… 야, 강림아! 가방은 가지고 가야지!”
나는 가방도 내버려 둔 채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학교에서 달려 나온 나는, 아무도 없는 후미진 골목길로 향했다.
CCTV 없고, 열려 있는 창문,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 모두 없고. 제인, 슈트 켜.
[“마스터 어떻게 하시게요? 아직 아침이에요. 해가 이렇게 높게 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다크 카이저의 능력 대부분이 꽤 약화될 텐데요.”]
“히어로 네임이랑 활동이 무슨 상관인데? 스타라이트는 낮에만 활동했나? 잔말 말고 슈트나 가동시켜.”
슈트 온.
[슈트 가동 중
10%…
30%…
50%…
90%…
100%…
가동 완료.
슈트를 개방합니다.]
슈트를 챙겨 입은 나는 곧바로 옥상을 타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저거 뭐야? 까마귄가?”
“하늘에 시커먼 게 날아다니네.”
“저거 빌런 아니야?”
밤에 나를 지켜주던 반타블랙 색의 슈트는, 낮엔 오히려 나를 더 눈에 띄게 만들었다.
[“다크 카이저. 이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다크 카이저 아직 현상수배 중인데요?”]
“그런 거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레드 레빗이 어디에 있는지만 신경 써.”
[“네. 일단 경찰 발표로 위험 지역으로 선정된 지역 위주로 찾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발견되면 말씀드릴게요.”]
내가 만약 레드 레빗이라면, 나는 어디로 갈까?
레드 레빗이 첫 번째 타깃으로 선택한 아산 성모병원.
벨제뷔트가 말하길, 이 세계에서 매해 오천만 명 이상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현세와 지옥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악인이 많은 이 세상은,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선서해야만 될 수 있는 의사들마저도 악인으로 만들어냈다.
그중 가장 쓰레기 같고 게으른 의사들을 모아서 병원을 만든다면, 그곳이 바로 아산 성모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다른 병원들이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혹은 감당하고 싶지 않은 환자들을 대충 밀어 넣는 의료계의 쓰레기통 같은 곳이었다.
이미 치료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된 환자들에게 있어선, 그곳마저 최후의 보루였을 것이다.
그래서 레빗즈가 아산 성모병원의 병원장 김은탁에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은행 ATM기나 털러 갔겠지.
아산 성모병원은 그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 같은 곳이었다. 최후의 보루까지 밀려나기 전, 얼마나 많은 병원들을 전전했을까?
그 중, 레드 레빗이 가장 증오할만한 병원이 어디였을까?
오래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답이 나왔다.
“제인. 경한 센트럴병원 주변으로 찾아봐. 우린 거기로 간다.”
* * *
경한 센트럴병원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는 묘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놈은 경한 병원에 있다. 확실해.”
놈이 테러를 예고한 곳은 학교, 터미널, 백화점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른바, 인구 밀집 시설들 뿐이었다.
처음엔 분명 자신의 원한을 갚기 위해 아산 성모병원을 택했는데, 굳이 다음 타깃으로 학교와 백화점을 선택한다고?
[“마스터. 경한 병원이에요.”]
“제인. 경한 병원 설계도. 빠르게 내려받아 줘. 경험치가 얼마나 소모되든 상관하지 말고.”
『천산시 경한 센트럴병원 설계도
다운로드 준비 중.
…10%
…50%
…100%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
눈앞에 설계도가 펼쳐지고, 내가 놈이라면 어떻게 해야 쉽게 이곳을 폭파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병원을 폭파시킬 만한 폭발물은 병원 안으로 들어가긴 힘들 거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화물을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곳. 화물차가 들어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곳이라면….
나는 병원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붉은 토끼 가면을 쓴 남자는, 자신이 설치한 폭약 위에 드러누웠다.
아마 빌어먹을 멍청한 히어로와 경찰들은 자신이 미끼로 던진 다른 동네에서 자신을 찾는다고 뒤지고 있을 테지.
“킬… 킬킬… 바… 바바바… 바보 같은 놈들….”
<경한 센트럴병원>은 가장 깨끗한 기업,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업, 경한 그룹의 사대희 회장이 빈민들을 위해 만든 병원이었다.
“개… 개개… 개 X 같은 기업. 비비… 비, 빌어먹을 기업.”
겉으로 보기에 그가 만든 경한 센트럴병원은 정말로 빈민들을 위한 병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산 성모병원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더 악독한 짓을 하고 있는 개 같은 병원이다.
빈민을 위한 병원이라고? 모두 X 같은 거짓말이다.
엄마와 처음 왔을 땐, 분명 금방 고칠 수 있는 별것 아닌 병이라고 했다. 고칠 수 없는 병은 없다고, 경한을 믿어보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을 먹으면 먹을수록, 엄마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그리고 결국, 엄마가 우릴 알아보지도 못하게 돼서야 우리는 그 빌어먹을 병원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와야만 했다.
“분명 그 의사가 엄마에게 놓던 주사 때문일 거야! 그게 아니면 우릴 못 알아볼 리가 없어. 그놈들이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
나는 아… 아, 바보같이… 형제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그 후로도 저명하다는 병원을 다 돌아봤지만 다들 고개만 저을 뿐, 전혀 차도가 좋아지지 않았다.
처음엔 예금, 그리고 적금. 그리고 우리 생활비까지 점점 바닥날 무렵, 우린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빌어먹을 빌런이 되었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처럼 나의 형제는 결국 악당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정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히어로에게 짓밟혀 죽어야만 했다.
“어… 어차피 죽을 거면… 그때 그… 그그… 냥… 가… 가가같이 갈걸 그그그… 그… 그랬어.”
치이이익
남자는 성냥을 그었다.
퍼엉!
* * *
퍼엉!
나는 레드 레빗이 허튼짓을 하기 전에 놈이 숨어 있는 트럭의 트레일러를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스럽게도 성냥엔 불이 붙어 있지 않았다.
등장 대사고 나발이고, 나는 일단 레드 레빗을 끄집어내 밖으로 집어 던졌다.
CRASH!
놈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밖으로 튕겨 나갔다.
“너… 너너너… 다다다… 다크… 카이저….”
레드 레빗은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분노, 자괴감, 두려움으로 범벅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