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엑스트라(3)
“너… 너너너… 다다다… 다크… 카이저….”
레드 레빗은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분노, 자괴감, 두려움으로 범벅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레드 레빗의 눈에 떠오른 자괴감과 두려움을 보며,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과연 이 사람을 쓰러트릴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때,
갑작스럽게 레드 레빗의 온몸에서 알 수 없는 빛깔의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했다.
원작에서도 몇 번 나온 적 있는 2차 각성의 징후다.
“보보… 복… 복수…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먼저 보… 보, 복수해서, 내 형제의 우… 워… 워… 원수를 갚겠다.”
형제의 원수?
분노한 레드 레빗의 고함이 지하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아니, 오히려 비명에 가까웠다.
악의와 증오에 가득 찬 비명.
그 악의와 증오의 대상이 나라는 사실이 너무도 두려웠다.
날것에 가까운 그 비명에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악당들은 모두 나쁜 놈들이긴 했지만, 이렇게 증오심을 가지고 내게 덤벼드는 악당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비명은 내게 왜 그랬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그야,
나는 선한 히어로고,
넌 원작에서도 나온 적 있는 빌런이었잖아.
[“마스터! 정신 차려요!”]
귓가에 날아드는 제인의 날카로운 목소리!
나를 향한 악의와 증오에 희미해졌던 정신을 겨우 다시 붙잡았다.
“꺄아악!”
“슈퍼 빌런?”
“저거 폭탄 아니야?”
꽤 큰 병원의 지하 주차장이기 때문인지, 아직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몇 명 정도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전에 저지른 아산 성모병원 테러 사건 때는 다른 히어로들이 많이 온 덕에 인명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경한 병원에 온 건 나 혼자뿐이다.
이젠 정말 나 혼자서, 이 병원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만 한다.
레드 레빗은 화염을 사용하는 자연계 슈페리어.
방금 폭발물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기는 했지만, 2차 각성에 성공하면서 화염을 장거리에서 분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주차장이기 때문에 주변에 불을 막을 만한 물건은 없었다. 자동차로 막아내면 기름 때문에 자동차가 폭발할 거다.
제인! 혹시 내 공책에 있던 능력 중 다크 쉴드, 지금 당장 개방할 수 있어?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 더 다크 쉴드>요? 개방이 가능한 능력이긴 한데, 아직 경험치가 충분하지 않은데요.”]
방패의 능력이 조금 감소해도 상관없으니까, 있는 경험치 다 때려 박아서 만들어줄 수 없어?
[“네, 알겠습니다. 더 다크 쉴드. 지금 개방되었습니다.”]
Dark Sh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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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름과 동시에, 등 뒤에 있는 망토를 내 손 앞으로 끌어와 내 온몸을 감쌌다.
일순간, 내 오른손에서 새어 나온 어둠이 구체화 되어 망토를 감싸고 에너지 쉴드로 변형되었다.
제발, 내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화염이길….
“모두 도망치세요!!! 이 건물에서 빠져나가요!!! 폭탄이 있어요!!!”
무질서한 혼란과 비명 속에서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쉴드에 닿을 화염을 막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던 그때.
스위이이익-
짙푸른 에너지가 뱀의 혀처럼 바닥을 훑었다.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비명…!
망토를 밑으로 내리자 마치 빙판처럼 얼어붙어 버린 지하 주차장과 아직 빠져나가지 못하고 얼어붙은 바닥에 발이 묶인 아이와 아이 엄마가 보였다.
“레드 레빗이 아니었어?”
“감히… 그… 이름을… 네가… 함부로 부르지 마라!!!!”
내 쪽으로 쏘아지는 얼음 광선!
발을 움직이려 했으나, 방금 바닥에 깔린 얼음 에너지 덕에 내 발까지 묶여 버렸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날아오는 얼음 광선을 다크 쉴드를 들어 올려 겨우 막아냈다.
막아냄과 동시에 내 눈앞에 떠 있는 홀로그램의 에너지 칸이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내게 광선을 쏘아낸 레드, 아니 블루 레빗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스스로가 각성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흐… 흐… 흐흐….”
블루 레빗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동안, 나는 바닥에 얼어붙어 버린 부츠를 뽑아내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드드드… 득… 득….
“너처럼, 히어로가 왔을 때를 대비해서 한 가지 더 준비해 둔 게 있지.”
내 모습을 지켜보던 블루 레빗은, 자신의 상의를 거리낌 없이 찢었다.
“흐으읍!”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 엄마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흉측하게 말라붙어 버린 그의 몸에는 기폭 장치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이 사람은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었구나.
한눈에 봐도 몸집이 크고 우람했던 블루 레빗은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그래서 얼굴에 가면만 바꿔 썼어도 블루 레빗인 걸 못 알아차렸던 거다.
형제를 잃고 난 뒤 마음마저 죽은 탓이리라.
“어디, 히어로 양반. 이것도 한번 막아봐라!”
Beep!
버튼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카운트다운.
[3:00]
순간,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59]
카운트다운이 1초 내려간 바로 그 순간, 멈췄던 시간이 돌아왔다.
[“마스터. 부츠에 스파이크 모드도 개방했어요. 바닥이 미끄러워도 걸어 다닐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제인.
얼음 속에 박혀 있던 내 부츠가 빠짐과 동시에, 나는 곧바로 발밑이 얼어붙어 있는 시민을 향해 내달렸다.
pic-pak-pic-pak
부츠의 스파이크가 얼음에 박히는 소리가 조용한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이젠 틀렸다.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 눈앞에 보이는 이 두 사람만이라도 구해야 한다.
내 쪽으로 쏘아지는 블루 레빗의 얼음 광선!
나는 다크 쉴드를 들어 올려 블루 레빗의 얼음 광선을 막아내며 앞으로 쭉 내달렸다.
[1:58]
거침없이 계속해서 쏘아지는 얼음 광선과 그를 막아내며 거침없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쉴드의 에너지.
“살려주세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까 싶은 작은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
“아이부터. 애부터 살려주세요!”
왼손으로 방패를 치켜든 채, 오른손에 있는 체인으로 아이와 아이 엄마의 발을 묶고 있는 얼음을 번갈아 가며 계속해서 후려쳤다.
제발. 조금만 더 빨리.
제발!
[1:43]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아이를 안은 엄마를 쉴드로 감싸 안은 채, 지하 주차장의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제인이 내 화면에 띄워준 카운트다운이 불안하게 깜빡인다.
[1:35]
[1:34]
나는 발밑이 불안정해 자꾸 쓰러지려는 아이 엄마를 거의 안다시피 들고 내달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계속해서 쏘아지는 얼음 광선을 막아내며, 입구까지 내달린 나는 아이 엄마에게 말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내 말을 들은 아이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나는 블루 레빗이 쏘아낸 얼음 광선에 얼어붙고 말았다.
쨍그랑!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얼어붙어 있음에도 아이 엄마가 비상 버튼을 깨부수고 누른 뒤, 계단을 올라 건물을 빠져나가는 것을 소리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비상 버튼을 누르고 도망치는 것이, 아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으리라.
저벅저벅.
블루 레빗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0:57]
“하… 히어로 양반. 그래도 끝까지 히어로 노릇을 하려고 하는구만. 감동이야. 지금은, 이 얼음 안에 갇혀서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신세지만 말이야.”
비상 사이렌 소리를 들은 사람 중에 몇이나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정말… 정말로… 다행이야. 너를 내 마지막 선물로 내 어머니와 동생에게 데리고 갈 수 있어서.”
최소한 내가 구한 아이와 아이 엄마는 시간 내에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겠지?
[0:30]
“자. 나와 함께 우리 인생 마지막 불꽃놀이를 구경하자고.”
블루 레빗이 얼어붙은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제발… 이 남은 30초 동안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0:29]
[0:28]
.
.
.
.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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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 하하”
.
.
[0:10]
.
.
.
“으하하하하하하하!”
[0:00]
UMHAHAHAHAHAHAHA!!!!!
영겁 같던 시간이 지나고 카운트다운이 끝났지만,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다.
“뭐야? 이… 이게 왜 이러지?”
[“마스터! 폭탄이 얼어붙어서 불발된 모양이에요.”]
그와 동시에 어디론가 떠나 있던 내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아직 기회가 있다!
제인! 당장 슈트 과부하 시켜! 과부화한 슈트의 온도로 녹여내면 돼!
〔“HAHA! 그래서야 시간에 맞추겠어? 이번 한 번만 이 몸이 대가 없이 도와주마. 네가 없으면 이 몸도 동화율을 얻을 수 없을 테니.”〕
뭐라고?
그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연에 가까운 지옥의 흑염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전조도 없이 검은 불꽃이 눈앞까지 치솟자, 당황한 블루 레빗이 뒤로 물러서는 게 보인다.
나는 흑염으로 녹아버린 얼음을 깨부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중에 갚도록 하여라. 어둠의 황제여.”〕
몸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나는 곧바로 블루 레빗을 후려쳤다.
CRASH!
동시에 튕겨 나가는 블루 레빗. 그리고 얼굴에서 벗겨져 버린 붉은 토끼 가면.
“너… 너너어… 주… 주주죽… 죽었어… 아직 내겐 히… 히힘이….”
블루 레빗은 나를 향해 재차 얼음 광선을 쏘아내려는 듯 손을 내뻗는다.
나는 반사적으로 망토를 잡으려다 말고 내렸다.
다크 쉴드는 에너지를 다했다.
스피드 모드 온.
나는 죽자 살자 달려 피하기로 마음먹고, 슈트의 스피드 모드를 작동시켰다.
이제 내가 놈의 얼음 광선을 파훼할 방법은 이 방법뿐이다.
슈트의 모드가 바뀌기도 전에 일단 뛰려던 바로 그때,
“어라?”
그의 손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놈의 시선이 떨어진 가면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나는 곧장 놈을 향해 내달렸다.
“왜… 왜…?”
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을 때 해치워야 한다.
나는 곧바로 내달려 온몸을 내던져 놈에게 태클을 걸었다.
BOOM!
놈이 쓰러짐과 동시에 놈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체인으로 꽁꽁 묶어 온몸을 결박했다.
“왜… 왜… 안 되지…?”
나는 블루 레빗의 의문에 나도 모르게 레드 레빗의 가면을 힐끔 보고 말았다.
아… 실수했구나.
“으… 으아아…….”
블루 레빗은 내 시선을 보고 그제야 눈치챈 듯 버둥거리며 가면을 향해 기어가려고 했다.
저게 놈의 <규약>인 거다.
아마 오직 빨간 토끼 가면만이 그가 능력을 쓸 수 있게 해줄 거다.
CRASH!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싸구려 토끼 가면을 발로 밟아 부쉈다.
Noooooooooooooooooo!!!
.
.
.
.
으….
으으….
으으으….
으으아… 아아… 아….
아무도 없는 지하 주차장에선 블루 레빗, 아니 레드 레빗의 흐느낌이 동굴처럼 메아리쳤다.
“나… 나나나… 나를… 주죽… 죽… 죽여라… 날… 주주죽… 죽… 죽여… 죽여….”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레드 레빗의 목에 손을 얹었다. 내가 지금… 지금… 레드 레빗을 죽인다면… 내가 한 실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다시 내가 가진 다크 카이저의 힘을 휘두르며 히어로로서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죽여!!!!!!!”
레드 레빗의 외침에 흠칫 놀라, 레드 레빗의 목에서 손을 뗐다.
대신, 나는 얼어버린 바닥에 메모를 남겼다.
<이 사람에게 가면을 주지 마세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슈퍼 히어로들의 멋진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 한켠에 불편하게 내려앉는 감정.
저 정도 되는 악당을 왜 죽이지 않는 거지? 그냥 죽여 버리면 마음 편할 텐데. 앞으로 볼 일도 없을 거고.
쟤가 결국 나중에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어 버리잖아. 왜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서 멋있는 다크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
자기 멋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다크 히어로.
무엇이든 척척 해결하고, 이미 저지른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빌런도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다.
‘다크 카이저’니까. 이름에 다크가 들어갔고, 밤에만 활동하고, 하는 행동도 조금 비슷하니까. 그래서 내가 진짜 다크 히어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수 없는 실패와 깨달음을 통해 자기 자신의 숙명을,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의 책임을 깨달은 진짜 히어로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가짜’다.
만화 속 세상에 들어와 힘이 생겼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인 스타라이트가 사라졌기 때문에.
내가 정말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세상의 주인공이 존재하던가?
아니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내가 이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온 그 순간부터, 나는 만화를 보고 있던 독자가 아닌 이 세계를 살아가는 그저 한 명의 사람이 되었던 거다.
나는 총을 쥔 어린아이처럼, 큰 힘에 취해 손에 쥔 총을 내 마음대로, 악당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겨누고 다녔을 뿐.
큰 힘과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 고민도 해본 적 없다. 그저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히어로들을 흉내 내고 있었을 뿐이다.
총을 가진 사람은 그 총을 누군가에게 겨눌 수 있지만, 뒷일을 책임질 수 없다면 그것을 함부로 격발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사람이 진 죄의 판결은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었던 거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손에서 격발된 총알은 이미, 두 사람이나 죽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죽일 자격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다. 내겐 누군가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업보를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하리라.
나는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we o-we o-we o-we o
사이렌 소리가 내가 도망치는 골목을 울렸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너무나도 무거워져 슈트를 해제해 버렸다.
나는 이 가면을 쓸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