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25화 (25/236)

제25화

짝사랑, 그리고 착각(2)

일부러 다니던 중학교보다 먼 고등학교를 왔으니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턴 나도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고등학교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내가 먼저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친구를 사귀어야지.

소연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소연의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같은 학교에서 온 친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중학생 때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바로 옆에 앉은 것만으로, 전날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하겠다던 다짐과 용기는 다 쓴 휴지처럼 구겨져, 마음속 한켠에 존재하던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져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같은 학교에 중학교 때 자신을 괴롭히던 일진 그룹에 속해 있던 황채경까지 함께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소연은 학교 내에서 얼굴조차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날 아는 쟤네들이 내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니면 어떻게 하지?

사실은 이미 내 이야기가 우리 반 애들한테 전부 알려진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모두 나를 피하면 어떻게 하지?

소연은 먼저 내민 손이 거절당했을 때 받을 상처를 견딜 용기가 없었다.

항상 반 친구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떨 때, 관심 없는 척 대여해 온 책을 읽는 게 학교생활의 전부.

소연은 그래서, 아무런 친구도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강림이가 소연에게 말을 걸기 전까진.

소연에게 있어서 강림이는 ‘저기’나 ‘야’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유일한 또래이자, 함께 도서 도우미라는 도피처를 만들어준 구세주에 가까웠다.

강림이를 알게 됨으로써 소연 스스로가, 괜히 가만히 있으면 민망하니까 소설책이나 보는 한소연이 아닌, 책을 좋아하는 도서 도우미 한소연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고마움이었다.

아무도 다가와 주지 않는 자신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주는 고마움.

소연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기댈 만한 곳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빨리 좋아하게 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던 것 같던 소연에게, 강림은 고등학교에서 만난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래서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끼오리가 제 어미 뒤를 졸졸 쫓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연은 강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집 앞에서 잠복하는 건 아니니까 스토커는 아니잖아?

그렇게 강림의 주변을 맴돌던 소연은 문뜩 자신의 마음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걸 느꼈다.

강림이가 여자친구가 있으면 내가 좋아하면 안 되는 걸까?

툭.

“아, 뭐냐?”

멍하니 생각에 빠져 복도를 걷던 소연은 누군가 부딪히자 반사적으로 겁에 질려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 X발. 너였냐? 미쳤냐?”

아… 왜 하필….

여기서 부딪힌 게 황채경인 거야….

그냥 부딪히고 빨리 사과라도 했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소연에게 있어 황채경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망쳐놓은 당사자였기에… 소연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 X발. 가만히 서 있는데 부딪혔으면 사과해야 할 거 아냐.”

아아… 왜 또 나한테만 이런 일이….

너무 억울해….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사는 게 너무 싫다….

다 죽어버렸으면….

소연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어. 소연이 안녕. 오늘 도서 도우미 일 때문에 잠깐 나 좀 볼까?”

“강림아….”

*    *    *

반에 같이 들어오자마자, 별말도 인사도 없이 수아는 자신의 자리에 가 바로 앉는다.

얼핏 싸늘해 보이지만, 수아 성격이 원래 그러니까.

“아니 3x3은 반칙이지.”

“그럼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칠판 앞에서 오목을 두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아이들… 부족한 아침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

오늘도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흔적.

나는 그 사람 사는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스으으읍… 하… 이게 바로 학교지.

“변태 같아, 나강림.”

“흡.”

역시나 가차 없구나. 수아야….

“어. 나강림~ 왔냐? 오늘은 이 누님이 너보다 일찍 왔다.”

“도유진, 뭐냐? 니가 지각을 안 하는 날이 다 있고.”

“그러는 날도 있는 거지. 이 자식아~.”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있는 이 학교.

학교에 도착해서 느끼는 이 해방감을 만끽했다.

내가 살면서 학교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다 오네.

〔“어둠의 황제여. 이곳에서 지옥의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어둡고 진득한 감정이 느껴지는구나.”〕

그때, 내 귓가에 오랜만에 들려오는 지옥의 마왕, 벨제뷔트의 목소리!

〔“지옥의 마왕이 아니라 지옥의 군주다. 어둠의 황제여.”〕

이 학교에서 봉인된 벨제뷔트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감정을 뿜어내는 사람이라면, 역시 한소연밖에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소연이가 도서 도우미가 된 이후론 꽤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학교 애들 중 책을 좋아하는 애들이 드문 모양인지, 의외로 도서 도우미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이민아 선생님에게 소연이를 추천했다.

원래부터 책을 자주 빌리러 오는 소연이를 민아 선생님도 기억하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어 두 사람은 생각보다 금방 어울릴 수 있었다.

원작에서 한소연이 빌런이 되어 활동하는 시기는 지금보다 1년이나 후의 일이기 때문에, 나는 최소한 1년 이상의 시간은 벌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강림 인생 23년간, 친구 먹기 가장 좋은 방법은 밥 먹고 술 먹는 게 최고였다.

도서 도우미니까 매일 같이 밥 먹으러 간다는 핑계로, 소연이가 가장 힘들어하던 식사 시간도 챙겨줬고. 거기에 웃는 얼굴 보기 힘들던 한소연이 웃기까지 했으니까, 이 정도면 꽤 가까워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친구 하나 없던 소연이에게 친구 같은 존재가 둘이나 생겼는데, 1년 뒤에 일어날 일이 벌써 생겼겠어?

에이, 별일 아니겠지….

.

.

응, 아니야.

별일 아니겠지, 라고 생각해서 이 세계를 망치는 건 한 번만으로 족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면 확인을 해야지.

나는 소연이 학교에 왔는지 확인하려고 복도로 나왔다.

슬렁슬렁 5반으로 건너가 슬쩍 건너봤을 때, 자리에는 소연이 있지 않았다.

얘 아직 학교 안 왔나? 그러면 여기가 아닌가? 싶어 다른 곳을 찾아 몸을 돌리려던 바로 그때,

이제 막 등교한 듯, 복도 저 너머에서 가방을 메고 이곳으로 향하던 소연이 황채경과 부딪혀 실랑이가 벌어지는 장면을 발견하였다.

이런. 저것 때문이었나?

황채경은 요즘 도유진이 같이 다니지 않게 되면서부터 고삐가 풀린 것마냥 학교를 휘어잡으려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걸려도 괜히 재수 없게 황채경한테 걸렸네.

내가 친구가 되면서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세계는 역시 한소연이 조금이라도 숨을 돌리게 놔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소연이를 향해 걸어가던 그때,

“아, X발. 너였냐? 미쳤냐?”

스르르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이지만, 나는 보았다.

소연의 발밑으로 펼쳐지는.

쩍 갈라진 채 그 깊이가 보이지 않는.

들여다보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무채색의 구멍이 서서히 열리고 있는 광경을.

*    *    *

히어로 코믹스들이 다들 그렇듯, 원작 만화인 「Heroicest」의 세계에도 작가 마음대로 만들어진 수많은 차원이 존재한다.

어비스(Abyss).

벨제뷔트가 있는 지옥이라는 차원이 죄를 지은 영혼이 벌을 받기 위해 가는 곳이라면, 어비스는 인간의 근원적 공포와 관련된 심연의 괴물들이 존재하는 곳을 의미한다.

한소연은 어비스와의 차원 문을 열어, 어비스에 있는 심연의 괴물들을 불러내 다루는 이능/정신계 능력자다.

한소연이 스스로의 능력을 제대로 깨우치지 않은 상태에서 심연의 괴물들이 학교에 나타났을 때 일어날 대참사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이, X발. 가만히 서 있는데 부딪혔으면 사과해야 할 거 아냐.”

쟤가 미쳤나? 하지 마!

“대답 안 해? 요즘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내가 우습지?”

하지 마! 임마!

“야!! 찐따 새끼야!”

하지 말라고!!

나는 식겁을 하고 거의 뛰다시피 해가며 소연과 황채경의 사이를 가로막고 소연을 보았다.

흠칫.

심연의 구덩이가 눈으로 옮겨간 듯 깊이가 보이지 않는 무채색의 눈동자.

[“정신 차려요, 마스터!”]

그 심연의 공포 덕분에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나를 깨우는 제인의 목소리 덕분에 다시 정신을 되찾았다.

“어. 소연이 안녕. 오늘 도서 도우미 일 때문에 할 얘기 있었는데….”

제발… 소연아, 정신 차려….

만약을 대비해 소연의 뺨을 때릴 준비까지 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부름에 소연의 눈동자에서 빛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소연의 발밑에 펼쳐지던 무저갱이 같던 심연의 어둠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X발… 살았다….

나는 소연과 황채경의 사이를 계속해서 막은 채, 등을 돌려 황채경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내가 얘 좀 데려갈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괜찮지?”

황채경은 내가 끼어든 게 맘에 들지 않은 듯,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지만….

너 같은 애가 노려본다고 무서운 줄 아냐. 학교 안에서나 일진 놀이하며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주제에.

나는 지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똑같이 황채경에게 눈을 부라려 주었다.

지금 네가 노려보는 거보다, 어비스에서 기어 올라올 괴물들이 벌일 일들이 더 두렵거든?

“너. 자꾸 도유진 빽 믿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게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

퉤.

황채경은 내 발밑에 침을 퉤 뱉더니 몸을 돌렸다.

이 새끼. 학교 복도에 침 뱉고 다니는 못된 버릇은 어디서 배워먹은 거야? 엄마 없는 나보다 못 배워먹었네.

나는 슬쩍 내 뒤에 서 있는 한소연을 보았다.

소연이 몸 주변에서 열리려던 심연의 구덩이는 더 이상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하. 큰일 날 뻔했네.

*    *    *

치이익-

나는 콜라 캔을 따 소연에게 건넸다.

“자. 내가 사는 거야. 마셔.”

“어? 응… 고마워….”

어… 혹시 코카콜라 파가 아니라 펩시콜라 파였나?

혹시나 해서 옆을 돌아보자, 상기된 얼굴로 콜라를 조심스럽게 홀짝대는 소연이가 보였다.

다행이네. 코카콜라 좋아하나 보다.

원작에서 나오는 인물이긴 하지만, 만화는 글보다 그림이 많은 한계 때문에 세세한 사항 같은 걸 파악하긴 힘들다.

콜라를 조심스럽게 홀짝거리던 소연이 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도서 도우미 일… 뭐 때문에 부른 거야?”

뭐? 무슨 도서 도우미 일?

[“마스터. 아까 마스터가 도서 도우미 일 때문에 잠깐 보자고 했었잖아요.”]

아!

그제야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아. 아아. 별건 아니고. 음… 그… 그게… 어. 오늘 민아 쌤 식사를 밖에서 하고 오신다고 하셨던 거 같아서. 우리가 최대한 일찍 먹고 올라가자고 하려고 그랬어.”

“아아….”

다행히 내 변명이 먹혀들어 간 모양이다.

“오늘… 민아 쌤… 어디 안 간다 그랬는데….”

아니었네.

“어, 그게… 아까 다시 만났는데 어~ 갑자기 약속이 생기셨다고 하셔서….”

“아… 그렇구나… 콜라… 고마워… 아까 도와준 것도 고맙고….”

괜히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 트라우마를 또 자극할까 싶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야. 우린 친구잖아.”

*    *    *

“아니야. 우린 친구잖아.”

언제나 그랬듯, 무저갱이 같은 어둠 속에서 강림은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방금은 창피함과 억울함, 분노로 눈앞이 깜깜해졌었지만… 강림이가 제 눈앞에 나타난 순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돌아온 게, 마치 마법 같았다.

인터넷에서 사랑은 마법 같은 거랬어….

소연은 혼자 그렇게 생각하며 발개진 볼을 차가운 콜라 캔으로 누르며 달랬다.

강림이가 준 콜라….

이 캔 이대로 집까지 가져가야지.

강림이 자신에게 친구라고 선을 그었던 게 서운할 만도 했지만, 오히려 소연은 강림이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줬다는 게 너무 기뻤다.

나 같은 애를 친구라고 생각해주는구나.

생각해 보면 강림이처럼 멋지고 착한 사람에게 여자친구가 없다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래. 난 강림이 옆에서 친구로만 있어도 충분해.

소연은 강림의 연애를 존중해 주기로, 그 옆에 친구로 남아 있기로 했다.

.

.

하지만, 여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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