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자경단
이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원작을 중간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것마저도 5년이나 전의 이야기고. 만화책의 특성상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건이 나타날지를 내가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긴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원작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언제 일어날진 알 수 없지만, 원작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만큼은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바로 여기.
천산시에서 가장 큰 영화관인, GV 시네마의 뒷골목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 덕분에 빌런이 하나 만들어지거든.
나는 그래서 이곳에 다크-감시카메라를 몇 대 설치해 둔 뒤, 제인에게 이 주변을 감시하게 시켜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에 대비하고 있었다.
뭐… 이번에 내가 막으면 여기서 카메라를 철수시켜도 되겠지만.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골목길에는 대머리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한 아이로 구성된 가족을 총을 든 강도 셋이 위협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본 적 있는 장면 그대로다.
원래 주기적으로 이곳에 있던 강도들을 모두 치워버려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려고 했지만, 마치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원작에 있던 내용이 그대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저씨. 양손 다 들고 가만히 있으면 목숨은 살려줄 테니까, 가진 거 다 내놓고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살려주긴.
마약을 잔뜩 해서 겁이 없어진 강도들은 아저씨네 가족을 털고 나서도 그저 재미로 셋 모두에게 총을 쏴버린다.
그중, 병원까지 가서 겨우 살아남은 아저씨, 정학근은 자신이 직접 살상용 무기들을 만들고 세상을 저주하며 훗날, 빌런 네임 나이트 스코프가 되고 만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네.
언제나 그러했듯, 나는 히어로 랜딩을 준비했다.
BOOM!
“지금 여기, 나 강림….”
“다… 다크 카이저?”
물론, 매일 밤 가면을 쓰고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여 가까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매일 읊어야 하는 이 등장 대사의 쪽팔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생각엔 아마 이 옷을 입고 있는 동안은 평생 가지 않을까 싶다.
파지직… 파직….
내가 등장함과 동시에, 불안한 소리를 내며 깜빡깜빡하는 주변 가로등.
“히이이익.”
“불이 꺼지기 전에 해치워!”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 강도들이 내게 총을 치켜든다.
불이 꺼지기 전에 해치운다는 소리를 하는 악당들이 생긴 걸 보니, 내가 유명해진 게 다시 한번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게 겨눠진 총구를 보고, 슬쩍 내 뒤에 숨어 있는 정학근 아저씨의 가족을 보았다.
내가 여기서 괜히 피하게 된다면, 내 뒤에 있는 아저씨네 가족이 위험해질지도 모르겠네.
“쏴!”
나는 놈의 객기에 코웃음 치며 등 뒤의 망토를 손으로 잡고 앞으로 끌어내렸다. 감히 그런 권총 따위로 나를 잡겠다고?
[“마스터. 하늘을 가리는 운명의 장막(the DESTINY)을 사용할까요?”]
제인. 그건 아껴두도록 해.
쟤들 같은 잔챙이들에겐 운명의 장막을 사용하기도 아깝다. 그런 능력 따위 쓰지 않고 맨손으로 이겨주지.
겁도 없이 내게 쏘아지는 총알 세례.
후… 다크 카이저의 ‘악명’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 후환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소형화기로는 내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 더 다크 쉴드>를 절대 뚫을 수 없지. 총알이 무한할 리도 없고, 총알 다 떨어지면 너흰 뒈지는 거야. 기대해.
tik - ti - tik
전혀 흠집조차 나지 않는 다크 쉴드의 에너지를 보며, 나는 입가로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 사이에 다크 쉴드에는 꽤 경험치를 많이 발라놨거든.
〔“어둠의 황제여… 전투 스타일이 점점 겁쟁이 같아지는구나. 나랑 처음 만났을 땐 그러지 않았는데….”〕
벨제뷔트가 괜히 나를 자극했지만, 나는 코웃음 쳤다.
무슨 개소리세요. 일단 안 뒈지는 게 제일 중요하지. 뒈지고 나면 가오고 뭐고 안 남아. 너도 봐봐. 어차피 내 오른손에 봉인당하고 나니까 맨날 나한테 아쉬운 소리나 해야 하잖아.
〔“…….”〕
철컥… 철컥….
탄창이 비어야만 나오는 소리가 좁은 골목길을 울렸다.
나는 곧바로 들고 있던 다크 쉴드를 아래로 내리고, 내 바로 앞에 있던 놈의 목을 잡아 바닥에 집어 던진 후, 놈의 얼굴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CRASH!
떨어지기 전에 미리 스피드 모드로 바꿔놓은 덕에 놈이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총기를 가진 놈들이랑 싸울 때는, 파워 모드보다 스피드 모드가 훨씬 좋지.
내가 순식간에 한 명을 쓰러트리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남은 두 놈이 들고 있던 총기를 버리고, 품 안에서 다른 권총을 꺼내 내게 겨눴다.
후… 아까 겪어보고도 아직도 나와 대적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나는 우매한 강도에게 다시 한번 깨우침을 주기 위해, 다크 쉴드를 들어 올렸다.
ZIE-YOUU!
어라?
놈이 꺼낸 권총에선 총알 대신 광선 빔(beam)이 쏘아져 나왔다.
놈들이 꺼낸 총은 권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 방만에 자비 없이 깎여버린 다크 쉴드를 보며 당황할 새도 없이, 다른 놈이 손에 들고 있는 광선총에 모이기 시작한 에너지.
다크 쉴드의 에너지가 간당간당하게 남은 걸로 봐서, 쉴드가 모든 데미지를 흡수하지 못하고 남은 타격이 내 몸에 스며들 가능성이 높았다.
〔“2:8.”〕
그와 동시에 내 귓가로 들려오는 벨제뷔트의 목소리.
흥정할 시간이 없다. 콜.
내 손에서 뻗어나간 흑염은 쏘아진 레이저를 집어삼키더니,
허공에서 폭발해버렸다.
Click! Click….
BOOM!
충격 때문인지 펑 소리와 함께 깜빡이던 가로등이 함께 꺼져 버려, 사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까 벨제뷔트한테 괜한 소리를 해버린 모양이다.
아까 자극 안 했으면 3:7 정도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워할 틈이 없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가까스로 밝혀주던 가로등들이 모두 꺼져 버린 탓에, 주변이 보이지 않아 나는 마스크의 야간 시야 모드를 켰다.
내가 쓰지 않아도 운명처럼 펼쳐져 버린 이 어둠의 장막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낫겠지.
“내 슈트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반타블랙 색의 슈트라, 어둠에 몸을 숨기기 유리하지.”
“히이이익!”
내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란 강도가 손에 들고 있던 광선총을 한 번 더 발사했다.
ZIE-YOUU!
놈이 쏘아낸 광선이 숙이고 있던 내 머리 위를 지나 벽을 때렸다.
나는 놈이 총을 발사했다는 걸 보자마자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놈의 턱을 후려쳤다.
SMASH!
마지막으로 남은 강도 한 놈은, 동료가 쏜 빔에 잠깐 비쳐 보인 나를 향해 재차 사격했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쏜 사격에 맞을 정도로 나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내가 뻗은 주먹에 나가떨어져 쓰러지는 마지막 강도.
Krunch!
손에 들고 있던 광선총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지이잉….
마지막 강도가 쓰러짐과 동시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골목길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조악한 솜씨로 만들어진 광선총의 부품이 바닥에 흩어진다.
잠시간의 고요.
“우… 우오….”
“우와아아!!!!”
짝짝짝짝짝짝짝!
그 고요는 내 뒤에 서 있던 정학근이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하는 통에 금방 깨지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떨어져 있는 광선총의 부품을 살펴보았다.
“다… 다크 카이저! 다크! 카이저! 대단해!”
원작에서 이 강도들이 이런 무기를 사용한 적은 없다. 하긴, 이 강도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도 중년 부부에게 꼭 사용했어야 한다는 법은 없긴 하다.
[“각각 광선총에 들어 있는 연료의 양을 비교해 보았을 때, 어차피 최대 세 방까지밖에 못 쐈을 거예요. 평소에 아끼는 비장의 무기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여… 여 여보. 일단 경찰. 경찰에 신고해.”
어찌 됐든, 놈들이 이런 하이 슈퍼테크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혹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경고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놈들이 어디서 이런 무기를 구했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크 카이저! 다크 카이저 최고! 최고다!”
아… 진짜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시끄럽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려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쉬이잇.”
“하아앗. 네… 넵! 쉿! 쉿!”
“으윽… 으으윽….”
마침 한 명이 깨어나고 있네.
벨제뷔트한테 동화율도 많이 먹였겠다, 한 번 더 도와주라고 부탁해도 꽤 기분 좋게 응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벨제뷔트를 이용해 심문하기 위해 오른손의 체인을 풀었다.
[“마스터! 뒤에 애가 있어요.”]
아. 애는 보면 안 되지.
벨제뷔트가 만들어낸 지옥의 공포는 심문받는 사람에게 비명과 더불어 각종 분비물을 유발한다.
성장기의 어린아이에게 유해할 수도 있는 수준이다.
“잠시… 아이의 귀와 눈을 가리시오.”
“네… 넵.”
나는 부부가 아이의 귀를 가리는 것을 보고, 벨제뷔트가 봉인된 오른손을 강도에게 가져다 댔다.
“그… 그아아아악!”
강도의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 * *
정학근은 오늘,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며칠 전에 사소한 일로 싸우고 난 마누라와 화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사과의 의미로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해서 나왔는데… 마침 오늘 영화관에 무슨 문화의 날인지 뭔지를 해서 사람들이 잔뜩 오는 바람에, 남은 자리가 없었던 거다.
“아. 같이 영화를 보러 나오자고 했으면 예매라도 해놨어야지. 이럴 거면 뭐 하러 나오자고 한 거예요?”
“아. 나라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올 줄 알았나? 자리가 없는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럼 자기는 그사이에 뭐 했는데?”
“애 데리고 이 한밤중에 자꾸 왔다 갔다 하게 하고 말이야? 어?”
“애 있는 거 아는 사람이 밖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나라고 사람이 이렇게 많이 올 줄 알았나? 나름 노력한 건데….
바가지를 긁어대는 마누라 덕분에 출구마저 잘못 찾아 나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정학근은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자신들을 향해 총을 내미는 강도를 맞이하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강도들의 맛이 간 눈을 보며, 아 이제 내 인생이 끝이 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쯤,
“지금 여기, 나 강림.”
다크 카이저가 정학근의 인생으로 들어왔다.
총알이 빗발쳐도 시민의 앞을 지키는 당당함. 가로등 불이 깜빡일 때마다, 강도들이 손에 쥐고 있는 이상한 무기에서 나오는 빔이 어두운 골목길을 밝힐 때마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튀어나와 강도를 한 명씩 제압하는 그 압도적인 퍼포먼스.
강도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아이의 귀와 눈을 가리라고 한 후 들려온 강도의 비명을 들으며, 정학근은 인생 처음으로 희열을 느낀 것만 같았다.
“내 이름은 다크 카이저. 죄지은 자들을 벌하고, 외면당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 이 세계에 강림했다.”
다크 카이저가 떠나가며 한 그 대사를 들은 그 순간, 정학근은 인생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나도 히어로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