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흑사자회(2)
후… 10분 후에 올라오라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어오기 전엔 클럽 같은 곳일 거라 예상했었는데,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뿌연 담배로 가득 찬 중앙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거나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눈도 그렇게 맑게 보이지 않았다.
정말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그런 마약 소굴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술집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면, 아마 이 뒤를 봐주는 조직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겠지.
역시나… 내 생각대로, 목에 큰 문신을 새겨놓은 경비원들이 허리춤에 총을 찬 채 여기저기 배치된 것이 눈에 띄었다.
[“마스터. 허리에 걸려 있는 저거….”]
그래, 제인. 나도 알아.
놈들이 들고 다니는 총, 그건 내가 잡은 강도들이 가지고 다니는 광선총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 * *
이제 어떻게 한다….
확실히 여기에서 그런 물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게 거의 확실시 된 상황에서, 나 혼자 여기 있는 경비원들을 다 잡아내고, 이곳에 존재하는 물건들을 죄 다 처리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지금 현 상황이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다.
대충 1층에만 4명쯤 되는 경비들이 술집을 지키고 있었고, 솔직히 여기저기 엎어져 있는 손님 중에서도 위장 경비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2층에 존재하는 인원까지 모두 치면,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이곳을 지키고 있으리라.
여긴 아무 계획도 없이 나 혼자서 올 만한 곳은 아니다. 내부 설계도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공을 어디서 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이런 작은 막 건물은 제인도 설계도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오늘은 후퇴할 때 후퇴하더라도, 여길 운영하는 집단에 대한 조금의 힌트라도 얻어가는 게 낫겠다.
거기에 나중에 다시 올 때를 대비해서 제인이 조금이라도 이 술집 내부의 구조를 분석하게 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룸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상구, 환풍구를 확인하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니, 오빠. 오늘은 애들 안 끼고 놀아?”
“됐어! 오늘은 그냥 바에서 마실 거야.”
“참나. 애들 매상이라도 올려주는 줄 알았네, 알겠어~ 다음엔 다른 오빠들이랑 같이 와!”
그런 내 행색이 이상한지 복도에서부터 마담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다가, 나한테 반복해서 퇴짜를 맞자 새침하게 다른 손님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아휴… 벌써 당 떨어지네….”
애초에 이런 퇴폐업소는 처음에다 저렇게 여성이 노골적으로 다가오니 계속해서 몸이 움츠러들게 된다. 내 주변 여자는 저렇게 나한테 다가온 적 없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현재, 이런 곳에 매일같이 드나들며 약이나 빨고 술이나 마시며 인생을 낭비하는 쓰레기 배역을 맡고 있는 상태다. 그럼 익숙한 척이라도 해야지.
나는 최대한 익숙한 척, 천천히 걸어 바 테이블로 향하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초짜처럼 주위를 괜히 둘러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에 기대선 나.
흠… 이 정도면 연기는 완벽하다 할 수 있겠다.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 있었으면 완벽했는데! 다크 카이저의 바지에는 주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인 보고 슈트에 주머니 좀 만들어 달라고 할까 봐.
가던 길에 자꾸 여기저기 퍼져있는 누군가의 발을 밟을 뻔하거나, 내 몸을 슬쩍슬쩍 더듬는 여자의 손을 자연스럽게 피하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하는 등의 아주 사소한 실수가 있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꽤나 익숙한 연기였다고 생각한다.
저기 있는 저 사람은 왜 자꾸 나를 째려보고 있는 거야? 괜히 눈 마주치면 싸움 나려나?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마침 타이밍 좋게 바 직원이 손에 들고 있는 유리잔을 닦으며 질문했다.
어… 이런 데 앉으면 위스키라도 시켜야 하는 건가?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아 내린 채, 매번 영화에서 듣던 대사를 읊었다.
“매일 마시던 걸로.”
바에 서 있는 바텐더는 이제 스물 대여섯쯤 되었을 거 같은, 노출이 많은 옷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목 근처에 크게 그려져 있는 사자를 형상화한 듯한 문신.
흑사자회(黑獅子會)의 문양이다.
나는 여자의 목에서 문신을 발견하곤, 슬쩍 눈을 돌려 주변에 있는 다른 경비병의 몸도 살펴 비슷한 문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자연스럽게 여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왜 이렇게 처음 온 사람처럼 주변에 신경을 많이 써요? 다른 데서 벌써 한잔하고 오셨나 봐요? 많이 취하셨네.”
아무래도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했던 모양이다.
역시나 아무래도 나란 놈은 연기 같은 걸 해선 안 되겠다. 앞으로 홀로그램 변장기는 봉인이다.
이미 내 연기가 굉장히 어색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괜히 2층까지 올라갔다간 위험할 소지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흑사자회가 엮여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니, 굳이 여기에 오래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
내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내 몸에서 전화벨 소리를 울리는 제인.
평소에는 틱틱거리지만, 역시 이런 때에 날 도와주는 건 제인밖에 없다.
나는 최대한 취한 척 전화를 받았다.
“뭐? 뭐라고? 어디라고? 지금? 나오라고?”
나는 재킷처럼 위장해 있는 내 망토에서, 강도에게서 빼앗은 지갑을 꺼내 돈을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화를 받는 척 건물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철컥
무언가를 꺼내 내게 겨누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야. 너 김학재 아니지? 너 누구야? 손들고 꼼짝하지 마.”
아… 걸렸네.
진짜 홀로그램 변장기, 내가 다시는 안 쓴다.
나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까 운명의 장막을 사용하지 않고 남겨둔 것은, 아마 이때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래서 이름이 운명의 장막인 모양이다.
제인, 운명의 장막 준비해 줘.
“여기 수상한 새끼 들어왔거든? 확인 한번 해 봐야 할 거 같아. 어. 생긴 건 김학재인데, 하는 짓은 절대 학재가 아니야.”
[더 다크 카이저-하늘을 가리는 운명의 장막(the DESTINY)이 준비되었습니다. 신호 주시면 바로 불 끌게요.]
나는 제인의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앞쪽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ZIE-YOUU!
그와 동시에 내 등을 향해 쏘아지는 광선.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몸을 살짝 비틀며 앞쪽에 있던 테이블을 뛰어넘어 몸을 굴렸다.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광선.
그와 동시에 격한 움직임 덕분에 내 몸에 걸려 있던 홀로그램 변장이 해제되고 만다.
술집의 어두침침한 조명에 다크 카이저 슈트의 그림자가 유독 크게 비친다.
“꺄아아아악!”
“히어로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야!! 저 새끼 잡아!!”
여자의 비명 같은 목소리와 동시에 경비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인! 이때야! 불 꺼!
철컹!
무언가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사위.
“꺄아아악!”
“뭐야?”
“누가 불 껐어? 불 켜!”
“정전이야!”
원래부터 어둡게 가려져 있는 술집인지라, 모든 조명이 내려가자 거리에서보다 훨씬 쉽게 어둠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다크 카이저의 슈트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반타블랙, 어둠에 몸을 숨긴 나를 놈들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거다.
나는 아수라장이 된 술집의 벽에 몸을 붙였다.
“손전등! 손전등 켜!”
“다 조용히 해! 지금부터 시끄럽게 하는 새끼, 그냥 죽여 버린다?”
“야, 씨발. 문 걸어 잠가!”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켜지는 라이트.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 생각해 보니 거리에서 싸울 때면 몰라도, 실내에서 일하는 경비들은 손전등을 들고 다닐 만도 했다.
“비상 전원 올려! 이 새끼 대체 어디 숨었어?”
[“마스터. 여긴 생각보다 불이 빨리 켜질 거 같은데요. 비상 발전기도 돌리는 모양이에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야간 시야 모드를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홀로그램 변장기가 있으니까, 다시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면 일단은 조금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주변을 훑어보며 탈출구를 찾았다.
이미 대다수의 출입구는 경비들이 죄다 걸어 잠가 버린 상태. 거기에 출구 근처엔 라이트가 두세 개씩 왔다 갔다 하며 나를 찾고 있는 상태였다.
저 근처로 갔다간 아마 들킬 가능성이 높겠다.
나는 다시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존재하는 창문에선 희미하게나마 빛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근처에 갔다간 또다시 사격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잠겨 버린 출구보단 창문이 훨씬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나는 바 뒤에 있는 창문을 통해 탈출하기로 하고, 다시 몸을 돌려 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여기! 여깄다! 여기로 온다!”
POW!
자신 쪽으로 달려오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바텐더의 얼굴에 사정없이 주먹을 날려 쓰러트리고, 나는 바 뒤쪽의 창문을 깼다.
쨍그랑!
* * *
쨍그랑!
“이쪽 창문이야! 이쪽 창문으로 도망쳤어!”
쓰러졌던 여성 바텐더는 얼굴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켜 깨진 창문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저기다! 저기 보인다!”
“저 새끼, 잡아!”
바텐더의 말대로, 빠져나간 창문 너머로 무슨 인영이 옥상으로 뛰어다니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에, 경비들은 그 인영을 쫓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저… 괜찮으십니까?”
“뭐? 지금 내가 중요해? 빨리 저기 도망가는 놈부터 잡으라고! 이 멍청한 새끼들아!”
뒤늦게 몇몇 경비들이 바텐더의 안부를 물었지만, 한 대 얻어맞은 바텐더는 독이 잔뜩 올랐는지 경비들을 향해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기 시작했다.
“어디… 어디 가십니까?”
여자가 절뚝거리며 문으로 향하는 걸 보며 놈을 잡으러 가던 경비 한 명이 여자에게 물었다가,
“너 내가 방금 뭐라고 했어?”
표독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바텐더를 보며,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가 다크 카이저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얻어맞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 * *
가로등마저 깜빡거리는 어두컴컴한 골목길. 나는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좁은 골목길까지 나를 따라온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나를 쫓고 있는 흑사자회의 깡패들은 저 멀리서 나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을 거다.
아무도 없지?
“흐… 후아….”
나는 바텐더로 변해 있던 변장을 해제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흑사자회.
원작에서도 꽤 규모가 큰,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조직폭력배들이다.
원작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활동하던 조직이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으니, 이미 조직의 규모가 꽤 큰 건 놀랄 일이 아니긴 하다.
일단은 흑사자회가 운영하는 술집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지금은 한번 빠지는 편이 낫겠다.
아무래도 혼자서 저런 큰 조직폭력배들을 처리하기엔 내 능력이 아직 모자라다.
역시 아무래도 혼자는 힘들겠어.
이젠 정말 다른 히어로들과 접촉을 조금 해봐야 할 모양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내가 바 밑에 기절시켜 놓은 바텐더를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곳까지 추격이 따라붙기 전에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