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만화 속으로 나 강림-30화 (30/236)

제30화

친구

♩♬

오늘도 나를 깨우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아, 익숙한 천장이다.

[07:10]

내가 어제 몇 시쯤에 들어왔던가?

새벽 2시? 3시?

조금 더 늦게 잤다면 알람 소리에 머리를 쥐어뜯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늦게까지 활동했던 건 아니다.

3~4시간 정도 잤으면 충분하지.

이게 바로 나폴레옹 수면법.

어제 일찍 잤으니까, 오늘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비비적대면 이모가 걱정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 일어났네? 어제 너무 피곤해해서 오늘 좀 오래 자면 깨워주려고 했는데.”

“어제 좀 일찍 잤더니 몸이 좀 개운하네. 역시 수요일엔 좀 일찍 자고 그래야 되나 봐.”

언제나와 같은 식사, 샤워 후 등교.

“이모,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잘하고 와~.”

나오면서 슬쩍 바라본 이모의 얼굴은 분명 안심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 세계로 들어온 후로 매번 겪었듯이, 이 세상은 내게 어느 정도 히어로로서의 컨셉과 클리셰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제발 이거 하나만큼은, 내 정체를 이모에게 들키는 일이 없도록 조금만 도와줬으면 좋겠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 우리 집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려 등굣길로 향했다.

*    *    *

거의 일주일 만에, 한소연은 강림이가 항상 등교하는 골목길로 잠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역시나 오늘도….”

골목길로 얼굴을 빼꼼 내미니 저쪽에서 강림이를 기다리는 수아가 휴대폰을 만지며 서 있는 게 보였다.

나… 정말 할 수 있을까?

요 일주일간은 왜 나오지 않았는가 하면, 강수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짝사랑을 현실 도피 수단으로 삼지 말고. 그건 강림이에게도 실례되는 일이니까.”>

그런 말을 들었던 처음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라던지,

너는 평생 나처럼 못났던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라던지,

현실 도피 수단으로 짝사랑을 택한 게 뭐가 잘못된 일이란 말이야?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하는 등의 생각들을 했었지만. 한편으론 스스로 강수아가 했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소연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강림에게 가졌던 감정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소연이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매일 들여다보던… 소설에나 나오던 이야기를 따라 하고 있던 것에 불과함을, 소연은 수아의 말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강림의 이모를 강림의 여자친구로 착각할 리가 없었겠지.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강림은 겨우 고등학생 1학년일 뿐이고, 그런 어린 친구와 사귈 성인 여성은 많지 않을 거다.

그냥 자신은 강림을 통해 스스로를, 어른과 사귈 정도로 어른스러운 친구를 짝사랑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소연은 그 사실을, 강수아의 말을 듣고 난 후 이 일주일간의 고민을 통해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연은 자신이 강림을 생각하는 마음이 모두 거짓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강림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자신이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알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친구를 향한 마음인지, 정말 짝사랑하는 마음인지는 일주일간의 고민만으론 알 수가 없었다.

대신, 소연은 이제 자신을 가둔 환상 속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숨어서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줬으면 하는 건, 이제 소연 스스로도 질렸다.

강림이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줬던 것처럼, 소연도 강림에게 친구로서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소연은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사이로 한 걸음 내디뎌보기로 했다.

“수… 수아야. 안녕?”

*    *    *

오늘도 역시, 항상 걷는 등굣길.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여유 있게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고, 집에서 나와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나는 수아와 자주 마주치곤 했다.

강수아.

히어로 네임 퀘이사.

사실 내가 지금 현재 활동하는 히어로 중 정확한 소재를 아는 사람은 퀘이사뿐이다.

두 달쯤 되는 히어로 활동 중에서 만난 적 있는 히어로라곤 퀘이사와 파워 피스트뿐이었으니까.

그나저나 파워 피스트는 요즘 뭐 하고 살지? 내가 종종 들여다보는 히어로 뉴스에서도 잘 비치지 않는 느낌이다.

조금 아니, 꽤 호전적인 편이긴 하지만 쿨하고 멋진 히어로였던지라, 원작 「Heroicest」를 보던 어린 시절에 파워 피스트는 분명 호감 가는 히어로였다.

하긴, 경한 그룹은 규모가 큰 회사니까 그 밑에서 일하는 파워 피스트도 바쁘겠지. 흠… 그래도 경한에서 빠져나오게 할 구실을 만들어주긴 해야 되는데.

깨끗한 기업 이미지와 다르게 뒤에서 별별 더러운 짓을 다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파워 피스트는 능력이 흔들릴 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앞으로 있을 세계관의 확장을 계속해서 막아내려면 히어로 측의 힘이 뒤떨어지지 않게 최대한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에, 파워 피스트의 멘탈 케어 또한 내가 해줘야 할 숙제 중의 하나이긴 하다.

원래 내 맨 처음 계획은 경한 그룹의 사대희에게로의 선전포고였지만, 내 스스로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와서야 내 힘과 영향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그럼… 일단 나하고 최소한의 접점이라도 있었던 다프네로 가서, 퀘이사와의 연결고리부터 다시 만드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강수아와 언제나 마주치던 그 길에 도착했을 때, 수아의 옆에 누군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익숙한 느낌의 뒷모습인데….

“어? 소연이네?”

그 뒷모습은 한소연이었다.

*    *    *

한소연?

한소연이랑 강수아?

히어로 퀘이사와 빌런 어비스의 위치는 꽤 오랫동안 대적해서 싸워왔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였던 데다가, 서로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관계였다는 걸 생각했을 때… 둘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교하고 있는 모습은 원작의 팬이었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 입장에선, 쟤네 둘이 같이 사이좋게 걸어 다니는 그림만큼 안 어울리는 그림이 없거든.

맨날 만화 속에서 치고받는 전투 씬만 봤었는데.

이렇게 빨리 친해질 수 있다고?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친구들의 옆으로 달려갔다.

“안녕! 소연아! 수아야!”

원작과 확실하게 달라지고 있다. 그럼 소연이와 빌런 어비스 위치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강림. 왔어?”

“어…? 응… 강림이 안녕….”

“뭐야? 소연이랑 수아랑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어? 둘이 같이 붙어 있는 거 처음 보네.”

“나강림. 설레발치지 마.”

“아… 그게. 원래 나도 저기. 저기 살거든.”

내 말에 소연이 저쪽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연아.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내가 거기가 어딘지 어떻게 알겠니?

그래도 귀여우니까 봐준다.

“아, 그래? 가까운 데 살았구나?”

“응… 사실은 너희가 맨날 여기 앞에서 그… 둘이 같이 등교하는 거 보고 있었는데… 좀 용기가 없어서 같이 가자고 하지 못했거든. 근데 오늘은 같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친구… 친구니까.”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하고 머리를 한 손가락으로 꼬아대는 소연.

바뀌었네. 소연이.

장하다, 한소연!

그래. 너도 한다면 할 수 있는 친구였어.

“나강림. 자식 다 키워낸 부모 같은 표정이네.”

“당연하지, 하. 눈물이 앞을 가리네.”

너무 뿌듯한 게 티가 났나?

새벽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연기랑 표정 관리도 좀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래도 이런 뿌듯한 일은 좀 좋아해도 되는 거 아닐까?

둘 다 말이 많은 아이들은 아니라 나 혼자서 둘 모두에게 말을 거느라 조금 진땀을 빼야 하긴 했지만, 둘이서만 걷던 길보단 훨씬 더 많은 것이 채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4월, 쌀쌀했던 날씨가 풀려가기 시작하고 꽃이 피는 봄이 찾아왔다.

4월 말쯤 중간고사가 있을 텐데….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니까 슬슬 수업을 듣는 동안 밀려오는 졸음을 참기 힘들어진다.

[“마스터. 마스터는 새벽까지 히어로 활동을 했다는 핑계로 맨날 학교에서 잠만 주무셨잖아요.”]

아. 이모는 내가 공부 열심히 하는 줄 알잖아.

학원까지 다닌다고 학원비 타가면서, 성적이 하나도 안 올라서야 되겠어?

물론 학원비는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다. 나중에 몰래 다시 이모 계좌로 입금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이모에게 돌려드리든지 해야지.

우리 이모는 내게 공부와 관련된 터치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공부한다고 학원 다닌다고 하니까 감동하셨잖아.

이 시기쯤 되면 선생님들이 슬슬 중간고사와 관련된 떡밥을 슬슬 던지기 때문에, 중간고사가 한 달쯤 남은 이 시기는 피로가 몰려오더라도 이 악물고 수업 진도를 조금이라도 따라잡고, 필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중학교 3학년 때의 나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아니었다. 조금만 노력해도 오른 흔적 정도는 남길 수 있으리라.

아~ 낮엔 고등학생, 밤엔 히어로 활동. 투잡 뛰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구나.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때마침 울리는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

“오늘은 여기까지. 점심 맛있게들 먹어라.”

일단 점심 먼저 먹고 생각하자.

나는 소연이가 있는 5반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내 앞을 가리는 그림자.

“엉…? 수아야?”

뭐야? 나한테 할 말 있나?

“나도 오늘부터 도서 도우미야. 밥 같이 먹어.”

으잉?

*    *    *

이거 약간 걱정되네.

[“마스터. 뭐가 걱정되는데요? 마스터가 의도했던 대로 잘되는 거 아닌가요?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 친하게 되면 나쁠 거 없잖아요.”]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니야.

이 AI야. 넌 밥을 먹을 일이 없어서 그런가, 이런 부분에서 영 맹탕이구나.

잘 생각해 봐. 갑작스럽게 식사를 하는 사람이 두 명에서 세 명이 돼버린 상황이잖아. 짝이 안 맞아.

그럼 한 자리가 저절로 비게 된단 말이야.

여기서 소연이를 혼자 앉게 내버려 둔다? 그럼 소연이 성격상 자기가 따돌림당한다고 생각하고 땅 파고 있을 거고. 수아를 혼자 앉게 내버려 두면, 수아 성격상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 알기가 힘들단 말이야. 이러면 곤란해.

셋이서 짝이 안 맞는 상황에 조금 걱정이 돼서, 나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맨 뒤로 빠졌다.

“……?”

“나강림. 뭐 해?”

자연스럽진 못했던 모양이다.

줄을 서 있던 내가 갑자기 맨 뒤로 빠지는 모습을 본 소연이와 수아가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모르는 척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너희 먼저 먹으라고. 배고플까 봐.”

내가 맨 뒤에 서면, 쟤네 둘이 마주 보며 앉겠지. 그럼 만사 해결이다.

“꼭 사서 고생하지.”

“가, 강림아~! 우리 저기 창가에 앉을 테니까 그쪽으로 와~!”

결국 나는 내가 의도한 대로, 자연스럽게 소연이와 수아를 서로 마주 보게 앉히고, 나도 뒤이어 옆에 앉으려 했으나….

“어라, 이모. 저는 왜 소시지가 없어요?”

“어머. 학생~ 미안해. 딱 학생 차례에 소시지가 다 떨어졌네. 미안해. 일단 이거라도 먹어.”

“…….”

[“마스터… 이게 정말 그렇게까지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나요?”]

제인. 조용히 좀 해줘. 나도 약간 현타 오니까.

*    *    *

“소연아. 잠깐 쌤 좀 볼래?”

“네…? 네에… 잠시만요….”

“아, 강림아. 수아가 이번에 처음으로 일하니까 네가 대신 인수인계 좀 해줄 수 있지?”

“아, 네. 알았어요, 쌤.”

셋이서 도서실에 도착하자, 민아 쌤이 먼저 소연이를 데리고 도서 정리를 하러 갔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하는 소연이는 도서 분류 코드에도 빠삭했기 때문이다. 이 분류 코드는 어느 학교에 가도 다 비슷하다나. 그래서 책 제목만 보고도 착착 정리를 잘한다.

수아와 둘이 남겨진 나는, 일단 수아에게 도서 도우미로서의 일들에 대해 알려주기 전에 먼저 묻고 싶었던 걸 묻기로 했다.

“수아야. 근데 너 왜 갑자기 도서 도우미 하려고 한 거야?”

수아는 나의 질문에, 슬쩍 열심히 민아 쌤과 이야기 중인 소연을 바라본다.

“그냥. 한소연이 나랑 친구 하고 싶다고 해줘서. 나도 친구 한번 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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