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난 히어로 같은 거 진짜 싫어.
금세 어둡네.
PC방에도 갔다가, 병원에도 갔다가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9시가 넘어버린지라, 보호자도 아닌 내가 병원에 계속 있을 수는 없고.
우선은 집으로 가기 위해 나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앉았다.
정신이 멍했다.
나는 오랜만에 동화율과 관련된 창을 띄웠다.
[현재 세계 동화율 : 37.25%
함께 동화된 인물 : 이소희, 도유진, 도지훈, 강은화, 도재익
동화율이 낮아질 경우, 함께 동화된 다른 세계의 인물들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히어로 일을 하면서 조금씩 쌓아가던 동화율은 갈수록 획득하는 양도 많아졌지만, 그만큼 잃는 양도 점점 늘어만 갔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지지부진해지며 오르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화율이 더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얼마나 오르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사실 오르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외려 안일했던 탓일까?
도유진이 동화되었다는 메시지를 들었을 때, 도유진의 가족 이름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도유진의 가족도 함께 이곳으로 왔겠거니 했었다.
내가 한 번도 도유진 가족의 안위를 확인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내가 한번 큰 실수를 해서 동화율을 떨궜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어디서 또 실수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앞으로 내 실수로 동화율이 점점 떨어진다면?
점점 멍해지는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채, 나는 버스 안에서 우두커니 창문만을 바라보았다.
* * *
[“마스터! 마스터!”]
아무런 생각 없이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제인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정말 제인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아마 이런 기분 자체도 제인이 읽어내고 있겠지.
정말 싫다.
[“마스터. 오늘은 그럼 하루 정도 쉬는 게 어때요? 수치상 거의 3개월간 휴식 없이 활동했으니, 능률이 떨어질 수도 있죠. 오늘 하루는 집에 들어가서 부족한 잠을 채우면서 신진대사를 올리는 편이 좋겠어요. 재충전해야 내일 다시 활동을-.]
됐어….
[“마스터.”]
됐어! 됐다고! 그럼 우리 이모도 지훈이 형처럼 나에게서 뺏어가려고? 내 인생도 히어로 활동에 저당 잡히게 해놓고서, 내가 아는 사람들까지 이 이상 피해를 입게 하라고? 그놈의 동화율이 떨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나보고 쉬라고? 이런 상황에서 쉬어?
나는 쾌활하게 말하는 제인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져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제인의 목소리는 귀를 막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삑-
마침 우리 집 앞의 버스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오기 시작해,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오늘 밤에도 나갈 거야.”
내 말을 들은 듯, 출구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 학생. 집을 왜 나가? 요즘은 집 나가서 밤거리 돌아다니다 큰일 나, 학생.”
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나를 걱정해 주는 아주머니와 제인의 말을 무시한 채 버스에서 내렸다.
* * *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의 이 엉망인 기분을 이모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모라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내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건…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 자는 척을 해, 이모에게 지금 내 상황에 대해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모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이모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일단 안에 들어가면, 다녀왔습니다! 인사하고
아이고, 이모 나 오늘 좀 피곤하네. 후딱 씻고 나올게. 하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언제나처럼 티비를 보는 대신, 빨리 방 안에 들어가 누워서 자는 척해 버리면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삐 삐 삐 삐 삐
띠리링
“어라, 우리 강림이 왔어? 오늘도 고생 많았네… 강림이 혹시, 무슨 일 있니?”
설거지를 하다 왔는지 물기 있는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아주시는 이모.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걱정해 주는 이모의 얼굴을 보자, 앞에서 열심히 연습했던 말들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 흩어지고 말았다.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무언가.
“에구… 강림아. 왜 울어? 응? 이모가 있잖아. 괜찮아. 뭐가 그리 서러웠어.”
나를 안아주는 이모의 따뜻한 품 때문인지, 아니면 또 안일하게 주변을 둘러보지 않은 내 스스로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 * *
나는 이모의 앞에 앉아, 도유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같은 학교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도유진이 돈을 벌기 위해 알바를 다니는 걸 알았다는 사실. 그리고 돈이 필요했던 이유가 실은 히어로 일을 하려다 쓰러진 도유진의 오빠, 도지훈의 치료비였다는 사실까지.
도유진이 약을 팔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나의 히어로 활동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들은 말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심정에 대한 부분은 이모에게 전달이 되었던 것 같았다.
“지훈이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나도 꿈에도 몰랐네… 언니가 그렇게 된 이후로 내가 연락이라도 꾸준히 드렸어야 했는데… 그래도 강림아.”
“그건 그냥 사고야. 네가 막을 수 없는 사고. 이 세상엔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사고들이 많아. 친한 형이 갑자기 다쳐 입원해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마치 네 탓인 것마냥 말할 필요까진 없어.”
아니야, 이모… 그건 내 탓일지도 몰라.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꿀꺽 삼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하도 엉엉 울어서 얼굴이 엉망이니까 일단 씻고 나와. 이모가 내일은 좀 일찍 나올 테니까 같이 병원에 가보자.”
“네, 이모….”
“얼른 가서 씻고 와.”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욕실로 들어와 거울 앞의 나를 바라보았다.
고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질질 짜기나 하고. 진짜 전역한 육군 예비역 맞냐? 나강림? 어?
“히어로 같은 거. 진짜 싫어.”
도유진이 내게 했던 말이 방금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귓가를 울렸다.
언제부터일까.
히어로를 싫어하게 된 게.
친오빠가 다쳤을 때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
어릴 땐 같이 좋아하는 히어로 만화영화를 기다렸다가, 도유진네 집에서 보기도 했었는데.
아….
도유진은 내가 옛날부터 히어로를 좋아했으니, 친오빠가 그런 일로 사고가 난 일에 대해서 내겐 더 얘기 못 한 걸지도 모른다.
그런 걸 신경 쓸 만큼 세심한 애인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 붙여놓고만 싶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었을 때 나한테만 숨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한테만….
쏴아아아아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내 얼굴을 적셨다.
* * *
어찌 되었든, 또 밤은 깊어지고 나는 언제나와 같이 슈트를 입었다. 내 기분이 어떻든, 나는 히어로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늦은 밤에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
밤 12시가 되기 5분 전. 약속했던 장소로 나가 아저씨를 기다렸다.
솔직히 조금 걱정되긴 했다. 내가 건물의 옥상을 뛰어다니는 이유는, 최대한 빠르게 이 도시의 곳곳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고를 막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히어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사실상 기동력이다. 능력이 아무리 강하고 그 머리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사건 사고를 막아낼 타이밍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까.
지난번 싸움에서 겪어봐서 알지만, 다크 스코프가 입고 있던 그 슈트,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 무게를 가지고 옥상을 뛰어다니는 날 따라올 수 있기나 할까?
하긴,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나와의 격차를 느끼고 내 뒤를 제대로 따라붙지 못하고 멀어진다면, 외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히어로로서의 격차를 보여줌으로써 다시 집으로 보낼 트집을 잡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티비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심사위원마냥 가차 없이 채점해 버릴 생각이다.
다크 스코프 씨는 제가 원하는 히어로가 아닙니다.
내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난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을 확실하게 지키는 사람이니까. 내 기분이 나쁘다고 사이드 킥에게 화풀이할 순 없는 노릇이지.
그나저나, 약속 시각이 다되었는데 아직도 안 왔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시간을 보았다.
[11:59:50]
히어로를 한다는 사람이 시간을 못 지켜? 기본부터 안 되어 있구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12:00:00]
부스럭!
정확히 12시에 내 옆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신문지가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그 속에서 다크 스코프가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시추에이션이래?
얼척이 없어서 멍하니 다크 스코프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대충 내 분위기를 눈치챈 다크 스코프가 기지개를 쭉 켜며 내게 말했다.
“아이고. 나이가 들다 보니까 가끔 잠이 부족해서… 이렇게 틈이 있으면 바닥에서라도 쪽잠 자고 그럽니다. 안에 핫팩이랑 보온재 잔뜩 넣어둬서 하나도 안 춥거든요.”
약속 시각까지 피곤할까 봐 자고 있었다는 의미다. 뭐, 이런 아저씨가 다 있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튼 약속 장소에 나보다 훨씬 일찍 나와 있었던 게 틀림없으므로, 트집 잡을 구석이 없어져 버렸다.
나는 슬쩍 아저씨가 입고 있는 슈트를 훑어보았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세련된… 아니, 무거워 보이는 슈트. 저런 슈트를 입고 과연 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아이고.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다크 카이저 님 발목 잡진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깨달았는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하는 다크 스코프.
철커덕 철컥 텅!
꾸물꾸물 완전히 몸을 일으키는 동안, 무거운 슈트에서 예의 그 무거운 철판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저런 무거운 슈트를 입고 날 따라 나올 수 있다고?
나는 뭔가 약간 오기가 생겨, 주변 건물 중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을 목표로 잡고 뛰어올랐다.
이렇게 높은 건물의 옥상에 한 번에 뛰어오르는 것은 나로서도 힘든 일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점프로 벽을 향해 뛰어오른 후, 그 벽을 발로 걷어차 반대편 벽으로 뛰어올랐다.
거기에 있는 창틀이나, 창살 같은 걸 잡고 다시 한번 반대편 벽으로 점프하고, 또 그 벽을 발로 걷어차 옥상까지 빠르게 올라오는 데 성공하였다.
말로 해서 길어 보이지만, 그렇게 10층 건물 위로 올라올 때까지 걸린 시간은 10초가 채 되지 않았다.
어디 아저씨. 어떻게 쫓아오나 보자고.
지이이잉- 탁!
이전에 본 적 있던 갈고리가 내가 있던 옥상으로 떨어지더니, 줄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갈고리에 걸린 줄을 타고 아저씨가 순식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물론 나보다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남들 발목을 잡을 정도로 느린 편은 아니긴 했다.
“아이고. 이렇게 높은 곳까지 써보긴 처음인데, 생각보다 잘 되네요. 어휴, 무서워라.”
내 옆에서 뭐라고 엄살을 부리는 아저씨를 무시하고, 나는 이번엔 멀리 보이는 옆 건물을 향해 뛰었다.
마찬가지로 내 점프력만 가지고 뛰어넘기엔 조금 먼 거리지만, 내 점프력이 부족한 경우엔 나는 내 망토에 있는 활공 기능을 이용해서 멀리 있는 건물의 옥상까지 날아올라 도달할 수 있었다.
어디 아저씨는 어떤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마찬가지로 나와 비슷하게 망토를 이용한 활공을 하는 다크 스코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따라 했지?
사실 제인이 만들어준 슈트의 능력은, 과학이나 초능력을 넘어선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질적인 능력이다.
그러니까, 제인이 만들어준 슈트의 능력을 아무나 따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아저씨가 내 쪽으로 날아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까이 와서 보니까 조금 알겠다.
내 생각보다 망토의 크기가 훨씬 크고, 마치 글라이더처럼 딱딱한 뼈대가 존재했다.
근데 저렇게 큰 걸 어떻게 메고 다니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나와 같은 옥상에 도달해 발을 내딛는 다크 스코프.
촤촤착
그와 동시에 망토가 자연스럽게 접히며 그 크기가 작아졌다.
대체 저런 걸 어떻게 만든 거야?
내가 잠시 멍하니 아저씨를 바라보고 있자,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뭐 하십니까? 빨리 가죠. 히어로는 속도가 생명이지 않습니까.”
뭐… 이 아저씨… 생각보다 쓸 만할지도…?